유토피아가완성형 공간으로등장하는 것이 아니라세상을 유토피아로바꿔가려는 개인들이유토피아의 가능성을 가지고있다고 생각해요.

과학을 통해 인간이 우주와 세계를 보며 느끼는 감정을 주로 표현했는데, 이제는 나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게 될 때경이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완전히 다른 존재와의 접촉이나,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누군가를 이해하게되거나, 혹은 타인이 나를 이해하게 될 때 느끼는 인식의전환, 인식의 확장이 있잖아요. 거기에 관심이 있어요.

그 경계가 아슬아슬할 때가 있어요. 결국 우리가도달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게 중요하다고 봐요. 저는 사람들이 들어주기에 존재하고, 사랑해주기에 계속할 수 있는 건데 사람들이 저의 본질을 잊을 때가 있어요. 멋있는 뮤지션으로서 표현하는것은 황소윤으로서 표현하는 것이고, 인간 황소윤을아해준다면 여성인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모습도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냥 멋있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소비되는 건 위험하고, 저 역시 바라는 일은 아니에요.

언제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나요??
되려고 하지 않을 때. 전 지금도 아름다운 것 같거든요. 제 생각을 이야기하거나 무언가에 몰두해 있을 때아름답다고 느껴요. 무대 위에 서 있을 때도 가장 아름답죠. 뮤지션뿐만 아니라 내 안의 내가 너무 많은데 (웃음)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잖아요. 그런 순간을 더 많이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보여지는 직업을 가질수록 남을 의식하게 될 때가 많고, 그건 필요보다 불필요할 때가 더 많으니까요.

루이제 린저의 소설 《생의 한가운데에 좋아하는 구절이 있어요. "니나는 마치 폭풍우에 좀 파손된, 그러나 대해에 떠 있고 바람을 맞고 있는 배와도 같았다. 그리고 볼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배가 어디든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새로운 대륙의 새로운 해안에 도착해서 대성공을 거두리라는 것을 돈을 걸고 단언할 것 같았다." 훼손과 상처, 두려움에 꺾이지 않고 어디든지 가는 여성. 이런 분들이 제가 사랑하는 여성상이지 않나 싶습니다.
재재

유연함. 유연함이라는 말 안에 많은 게 포함되겠지만, 일단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아는용기 같아요.

사랑의 순간은 사랑 있는 사람에게 유독 잘 발각된다는 듯 드문드문 만나온 정다운 감독은 한결같이 다정한 사람이다. 지금 눈 앞에 앉은 사람을 성실히 대하는사람, 그런 당신이라면 새롭게 발견해줄 것 같아 나를 툭풀어놓게 되는 사람. 인물 한 명을 선정하고 기록하는 단편 연작 프로젝트 ‘다운큐멘터리 dawnamentary‘에는 그의 사랑과 다정의 재능이 최대치로 집약돼 있다. 그리고 그 재능은 주인공이 여성이 되는 순간 빛을 발한다.

자신을 내려놓지 않은 채로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봐요.
나를 버리고 난 뒤에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거지, 나를그대로 둔 채 그 사람을 이해하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배우 이주영은 몇 년 사이 번민과 자괴를 건너왔음을 불현듯 툭 털어놨다. 그때 그가 선택한 것은 자신을 천천히 다시 읽는 것이었다. 어떤 날은 내밀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다른 날에 멀리서 관조하기도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나대로 사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답을 얻게 됐다고 말했을 때 나는 놀랐다. 내 결핍을 제일 잘 아는 자가 나 자신이니 두려울 것 없다는 듯, 일말의 후회는 없다는 듯한 그의 단단한얼굴을 바라봤고, 그 얼굴을 오래 기억하게 될 거라 확신했다. 후회 없음‘이 자력으로 인생을 설계해온 자기 삶의주인만이 누릴 수 있는 보상이라면, 그날의 이주영은 조금 홀가분해 보였다.

승모근이 어떻고 허벅지가 어떻느니같은 소리에 주저할 것이 아니라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선 근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버티는 것만이 답인때인 어떤 날에 나를 곧게 세워두는 건 정신력도 의지도아니고 복직근, 복횡근, 복사근, 기립근, 둔근이라는 것을 순발력, 집중력, 창의력, 노오력 등 세상의 모든 ‘력’중의 ‘력은 체력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는 "나만 잘 타겠다고 꽁꽁 숨기고, 도둑 훈련하던 시절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나 혼자 잘 타는 거에큰 욕심이 없어요" 라고 말한다. 그 실천으로 유튜브 채널사이클 선수 김원경〉과 블로그 ‘자전거 타는 마리‘를 운영하며 운동 방법, 정서 관리, 부상과 회복 등에 대한 노하우를 나눈다. 몸과 마음을 잘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이야기한다.
어느 때보다 몸에 대한 담론이 활발한 지금,
동시대 여자들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본다.

일찍이 이 모든 기이한 허들을 뛰어넘으며 살아온김원경은 ‘운동하는 여자‘로서 말한다.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들 다 최면이에요. ‘너는 그런 사람이잖아‘ ‘원래네 성격은 안 그렇잖아 하는 말들이 결국 내게 거는 최면같아요. 근데 다른 사람들이 만든 최면의 총합을 자기라고 착각하기 쉽잖아요. 바깥으로부터의 최면을 차단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같아요. 각자 가지고 있는힘을 충분히 사용했으면 좋겠어요."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나쁜 일이 자신을 온통 뒤덮도록내버려두지 않았다. 나쁜 일이 나쁜 일로 끝나지 않도록애썼다. 우리가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고 어떤 일에서든고마운 점을 찾아내는 이들임을 기억했다. 사랑은 불행을 막지 못하지만 회복의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인터뷰집 《깨끗한 존경》을 묶으며 네 명의 인터뷰이를 만났어요. 여자 두 분, 남자두 분이었는데 네 사람이 다 다른 면에 있어 용감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누군가의 용기를 배우는 일을 좋아하는데요. 용기가 있으려면 너무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이면 안 되는 것 같아요. 네 사람은 모두 다른 존재와 잘 연결되는 사람이었어요. 나밖에 못 보는 사람 말고 저 사람에게로 시선을 이동할 수 있는 사람, 내가 저 인생을 살아보지 않았지만 그 자리로 가서 왠지 그 사람이 볼 법한 눈으로 세계를 볼 수 있는사람들이 바로 제 인터뷰집에 나오는 이들이에요.

올가토카르추크의 말을 만났다. "다정함이란 다른 존재, 그들의 연약함과 고유한 특성, 그리고 고통이나 시간의 흐름에 대한 그 존재들의 나약한 속성에 대해 정서적으로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것입니다. 다정함은 우리를 서로 연결하는 유대의 끈을 인식하고, 상대와의 유사성 및 동질성을 깨닫게 합니다. 이 세상이 살아 움직이고 있고, 서로끈끈하게 연결되어 있고, 더불어 협력하고, 상호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돌이켜보니 10명의 여성 모두 사랑하기를, 존엄하기를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미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낭비하지않는, 손쉬운 비관과 혐오를 거부하고 어려운 낙관을 실천하는 사람들과의 대화였다. "상처로 만들지 않을 힘이나에게 있다고 말이에요. 회복의 힘이 내게 있으니까." 이슬아 작가가 인터뷰 마지막에 한 이 말을 문장으로 옮길때 나는 삶의 어느 순간에서, 작고 어두운 방에 혼자 웅크려 있을 때 그의 말을 떠올리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약해질 때 사랑하는 여자들을 떠올려요. 부서지지 않는 단단함이 아니라 부서지는 것쯤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단단한 여자들을요." 이제 나는 모델 박서희의 말을 되새기며 다치는 것쯤 두려워하지않으려고 한다. "다름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강한 사람 같아요." 정다운 감독의 말과 "강함이란, 내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용기"라는 재재의말을 떠올리며 나와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더 노력해볼 작정이다. "내가 붙인 내 이름을 내가 굳게 믿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요." 이길보라 감독의 조언에 힘입어 나를 의심하고 검열하는 일을 줄여갈 거다. "각자 가지고 있는 힘을충분히 사용했으면 좋겠어요." 김원경 선수의 다독임에다시 한번 나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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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산책이 인간의 정신 과정을 작동시키는 방법이라는것을 알고 있다. 두 다리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생각이 흘러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미술 작품을 보기 위해 떠나는 긴 여행은 그이상이다. 인간의 관심이 특정한 방향을 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행은 인간의 집중력을 향상한다. 여행을 하는 동안선사 시대 미술, 브랑쿠시 등 목표가 무엇이든 주로 그것만 생각하게 된다. 그 결과로 배우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조금 변하게 된다. 따라서 출발할 때와 똑같은 사람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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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협상 불가능한 가치‘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나는 등골이오싹합니다. 모든 진정한 가치, 인간의 가치는 협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내 손가락이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보다 더가치 있다고 내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가치 있는 것의
‘가치‘는 그 자체로 협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이디어는 토론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식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급한 성격을 띠고, 모든 문제에는 기술적 해결 방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식별 과정이 힘들고 어렵게 느껴질 겁니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올바른스위치를 찾아내면 끝나는 기계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물론 종교인들 중에도 ‘식별‘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불확실한 것을 몹시 싫어하며, 모든 것을 흑백으로환원하려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이데올로그와 근본주의자, 경직된 사고방식에 억눌린 사람들은 식별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자 한다.
면 식별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진리를 가리키던 단어인 알레테이아aletheia가 그런 뜻으로, 스스로 드러나는 것‘, ‘덮개가 벗겨지는 것‘을의미합니다. 한편 히브리어 간투사인 ‘에메트emer‘는 진리를 확실한 것, 확고한 것, 기만하지도 실망시키지도 않는것, 즉 충실한 것과 관련짓습니다. 따라서 진리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사물과 사람이 각자의 본질을 드러내보일 때 우리는 그것에서 확실하게 진실된 면을 보고, 신뢰할 만한 증거를 근거로 그것을 믿게 됩니다. 이런 확실한 증거에 마음의 문을 열려면 겸손하게 생각하며, 선하고진실하며 아름다운 것과 조용히 만나기 위한 여지를 남겨두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방법을 로마노 과르디니(독일의가톨릭 사제이자 신학자, 종교철학자-옮긴이)에게 배웠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방법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그의 저서 《주님》에서 과르디니는 ‘엘 판사미엔토 인콤플레토el pensamiento incompleto(미완성인 생각)‘의 중요성을나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는 어떤 생각을 끝없이 전개하다가 멈추고는 우리에게 관상하는 여유를 줍니다.
그는 독자에게 진리를 직접 만나는 공간을 마련해줍니다.

요컨대 유익한 생각은 항상 미완성이어야 합니다. 그래야그 이후의 결과가 가능할 수 있으니까요. 과르디니를 읽으며 나는 모든 것에서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불안에 사로잡힌 영혼이란 증거입니다. 그에게 배운 지혜 덕분에 나는 규범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들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갈등에 휘말리지 않고서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존헨리뉴먼이 말했던 것처럼, 나도 진리가 항상 우리 너머에, 우리 밖에있지만, 우리 양심을 통해 우리에게 손짓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동의의 문법》에서 썼듯이, 진리는 이성을 통해서는 정상적으로 다가갈 수 없고, 상상을 통해, 직접적인 인상의 도움을 받아, 사실과 사건의 증언으로, 역사와 서술을 통해 다가갈 수 있는 "온화한 빛과 같습니다. 뉴먼은우리가 처음에는 모순되는 진리로 여겨지는 것을 받아들이며 그 온화한 빛이 우리를 인도할 것이라 믿을 때, 우리너머에 있는 더 큰 진리를 볼 수 있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포용하는 만큼 우리가 진리를 포용하지 않으므로, 진리가 아름다움과선함의 도움을 받아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끌려고 한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진리에 접근하는 이런 방식은 탈진실의 인식론과 확연히 다릅니다. 탈진실의 인식론은 우리에게 증언의 청취보다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선택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새로운 가능성을 차단하는 고정된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에도 동의 assent 와 지속적인탐색이란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과거 전통이 그랬습니다. 5세기에 레랭의 성 뱅상이 "교회의 믿음은 해가 지남에 따라 강화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하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더 깊어진다"라고 명확히 정리했듯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령에 다가가는 방법에 대한교회의 이해와 믿음은 확장되고 공고해졌습니다.

전통은 박물관의 전시물이 아닙니다. 교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지만 점점 굵어지고 매번 더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처럼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교리란 하느님이 확정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

진리에 굳건히 뿌리를두는 것과 더 큰 이해를 위해 마음을 여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느 시대에나 모든 남녀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울리도록 우리가 복음을여러 맥락에서 번역할 때, 성령이 항상 우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전통은 재가숭배되는 곳이 아니라 불이 보존되는 곳"이라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구스타브 말러의 말을 즐겨 인용합니다.

어떻게 해야 영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영은 각기 다른언어를 말하고, 다른 방식으로 우리 마음에 다가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결코 강요하지 않고 제안하는 데 반해,
적은 단호하고 집요하며 심지어 한결같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우리를 바로잡으려 하되, 항상 온유하고격려하며 위안과 희망을 줍니다. 악령은 현혹적인 환상과솔깃한 감각으로 우리를 유혹하지만, 덧없고 무상한 유혹일 뿐입니다. 악령은 두려움과 의심을 이용하여 재물과 명성으로 우리를 꼬드깁니다. 우리가 무시하면, 악령은 우리에게 경멸과 비난으로 반격하며 "너희는 무가치한 존재"라고 욕합니다.

적의 목소리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현재를 보지 못하고,
미래의 두려움이나 과거의 슬픔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목소리는 현재를 말하며,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돕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는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 무엇이 나에게 좋고, 무엇이 우리에게 좋으냐?"라고 묻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반면에 적은 우리를 벽에 밀어붙여 꼼짝 못하게 합니다. 선한 영은우리에게 희망을 주지만, 악한 영은 의심과 불안의 씨를 뿌리고 비난합니다. 선한 영은 선하게 행동하며 주변 사람들을 돕고 섬기고 싶은 욕망을 우리의 내면에 불러일으키고,
올바른 길을 가려는 힘을 북돋워줍니다. 반대로 악한 영은나를 내 안에 가두며, 나를 경직되고 편협하게 만듭니다.
악한 영은 두려움과 불만을 조장합니다. 악령은 나에게 슬픔과 두려움과 분노를 심어줍니다. 악령은 나를 해방시키기는커녕 노예로 만듭니다. 또한 나를 현재와 미래로 안내하기는커녕 두려움과 체념의 울타리에 가두어버립니다.

우리는 하찮은 것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그것을 지키려고 온갖 시도를 다하지만, 그런 시도는 감추어집니다.
그 하찮은 것이란 자존심을 지탱해주는 것, 예컨대 권력과영향력, 자유와 안전, 지위와 돈, 재산 따위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이 획득된 행운‘이라 칭한 것을 잃지 않으려는 두려움에 우리는 그 행운에 더욱더 집착하게 됩니다. 따라서자아에서 빠져나와 더 큰 것의 일부가 되라는 권유를 받으면, 의심과 억측의 악령이 우리에게 자신의 애착심을 비밀리에 감추며...

이렇게 우리의 애착을 정당화해주는 변명거리들을 하나씩 받아들이다 보면 우리마음은 강팍해지며 그 변명거리에 집착하고, 결국 그 변명거리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하지만 화해자의 책무는 갈등을 정면에서 마주하며 견디는 것입니다. 또 식별을 통해 의견 충돌의 표면적 이유너머를 보고, 관련된 사람들에게 새로운 통합의 가능성을열어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통합은 양극의 어느 쪽도 말살하지 않고, 양쪽 모두에서 좋은 것과 유효한 것을 새로운관점에서 찾아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런 돌파구는 대화의 선물로 생겨납니다. 사람들이 서로 신뢰하며 겸손한 자세로 함께 선을 추구할 때, 또 하느님의 은사를 서로 교환하며 서로에게 기꺼이 배우려할 때이런 돌파구가 열립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를 힘들게 하던문제의 해결책이 예기치 않게 떠오릅니다. 말하자면 새로운 창조적 발상의 결과가 밖에서부터 주어집니다. 이런 결과는 내가 ‘범람‘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고의 범위를 경계짓는 둑이 무너지며 범람한 연못에서 물이 넘치듯이, 전에는 대립으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던 해결책들이 봇물 처럼 쏟아지기 때문입니다.

‘범람은 그리스어 perisseuo의 여러 뜻 중 하나입니다.
시편 작가가 시편 23장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술잔이 넘친다고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perisseuo는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 무릎에 쏟아질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기도 합니다.[루카 복음서 6장 38절] 또한 perisseuo는 요한 복음서 10장 10절에서 예수님을 통해 생겨난 생명을 뜻할 때는 명사로,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두 번째서간 1장 5절에서 바오로가 하느님의 관대함을 묘사할 때는 형용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버지가 허겁지겁 달려가방탕한 아들을 껴안았다는 이야기, 혼주가 길과 들에서 손님들을 불러와 큰 잔치를 베풀었다는 이야기, 밤새 그물을헛되이 던졌지만 새벽녘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를 끌어올렸다는 이야기, 또 예수님이 죽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이야기 등의 유명한 구절에서도 하느님의 마음이 범람합니다.

그런 사랑의 범람은 무엇보다 삶의 기로에서 일어납니다. 그때 우리가 마음을 열고 취약함을 드러내고 겸손하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교만의 둑을 무너뜨리며 새로운가능성을 상상하게 해줍니다.

가족에 대한 시노드에서는 이혼자, 별거자, 재혼자에대한 배려 및 그들과 성체의 관계라는 특별한 쟁점보다 훨씬 폭넓은 문제가 다루어지는 게 당연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언론이 그 시노드를 특정한 집단과 관련된 것이라 규정지음으로써 그 시노드의 전체적인 목표를 하나의 쟁점으로 축소하고 단순화해버렸습니다. 게다가 그 시노드가 이혼자와 재혼자에게 영성체를 허용하느냐 허용하지 않느냐를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것처럼 보도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규칙을 완화해야 한다는 쪽과 엄격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쪽으로 여론이양분되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런 여론의 추세를 반영한언론 보도는 시노드가 넘어서려던 궤변론적 태도를 더욱강화시킬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성령께서 우리를 구해주었습니다.
2015년 10월 가족을 주제로 한 2차 시노드가 끝나갈 때쯤돌파구가 열렸습니다. 이번에는 범람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 깊은 지식을 지닌 사람들, 특히 빈 추기경인 크리스토프 쇤보른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토마스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적 전통에서 진정한 도덕적 교리를 되살리며, 궤변적인 도덕으로 추락한 퇴폐적 스콜라 철학으로부터 구해냈습니다.

사람마다 마주하는 상황과 환경은 각양각색이며 모든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일반 법칙은 없다는 아퀴나스의 가르침 덕분에, 시노드는 각각의 사례에 따라 개별적인 식별의 필요성에 합의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법 자체를 바꿀 필요가 없었습니다. 교회법을 어떻게 적용하느냐를 바꾸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각 사례의 특수성을 고려하고,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관계하는 하느님의 은총을 경청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것을 흑백으로 나누며 은총과 성장을 가로막는 이분법적 도덕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자거나 느슨하게적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범주에 깔끔하게 들어맞지않는 상황들에 어느 정도 여지를 두고 규칙을 해석하자는것이었습니다.

그 합의는 성령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엄청난 돌파구로,
우리 전통의 범위 내에서 진리와 자비를 새로운 관점에서 더 낫게 통합한 것이었습니다. 교회법이나 교리를 바꾸지 않고 오히려 그 둘의 진정한 의미를 되살린 덕분에, 이제 교회는 동거자나 이혼자와 함께하며, 그들이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일하는지를 지켜보면서, 교회의 가르침을 충만히 받아들이도록 더 잘 도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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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정치면 기사 속에는 온갖 갈등과 분노를 표출하는 공격적인 단어와 문장들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단어와 문장에는 보이지 않는 칼날이 장착되어 있어, 그런 날카로운 대화나 기사들을 듣거나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 많다. 어떻게 이 증오와 폭력의 언어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제도로서의민주주의는 안착되었지만 ‘심리적 차원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요원한 것 같다. 심리적차원의 민주주의가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나는 이제 민주주의가 절차적 차원과제도적 차원을 넘어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단계‘까지 가야 한다고 믿는다. 심리적차원의 민주주의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아픈 마음까지 헤아려주는 민주주의이며, 내 주장을 말했을 때 남들이 받을 충격이나 상처까지 헤아리는 민주주의가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비폭력적인 대화, 타인의 마음에 상처와 충격을 주지 않는대화를 나누는 기술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넷플릭스 드라마 〈어웨이(Away)>를 보며 타인에게 상처주지 않는 대화의 기술을 배웠다. 3년 동안 화성탐사선을 타게 된 우주비행사 엠마 그린(힐러리 스웽크)은 젊은 여성으로서 막중한 임무를 맡아 리더십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다. 여성에 대한 교묘한차별, 나이 어린 리더에 대한 불신, 팀원들의 질투와 오해, 3년 동안 어린 딸과 남편을보살필 수 없게 된 상황 등으로 인해 ‘화성탐사선의 리더‘라는 영광보다 그로 인한 고통이 더 큰 것이다. 하지만 엠마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베스의 가족과 이웃은 베스의 내성적인 성격을 향해 그 어떤 비난도 질책도 하지 않는다. 베스가 남들보다 좀 더 천천히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한없이 기다려주고, 그녀가 자신의 재능과 마음을 숨기려 하지만 말없이 온몸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깊은속내를 헤아려준다. 비폭력 대화란 이런 것이다. 그 어떤 판단도 조건도 유보하는 것,
그가 언젠가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조용히 길을 열어주는 것. 조건 없는 사랑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차분한 기다림은 어떤 마음의 장벽도 밀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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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으로 부풀다 절망으로 꺼진 자리,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텅 빈 자리와 텅 빈 말이있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걸었던가.
목적과 이유를 잃고 오래 허둥댔다. 그러나 ‘위해서 와
‘때문에‘를 지워가니 침묵이 소리를 내고 빈자리가 모습을 보인다. 희망이 눈을 빼앗고 절망이 눈을 감게했던 자리. 도대체 이 침묵과 빈자리를 어떻게 대해야하는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런 말은 하고 싶다. 이정표를 잃은 곳에서 길이 보인다. 아, 나는 이런 길 위에 있구나.

정작 나 자신이 듣지 못했으면서 함부로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존재라고 선언해버렸다. 내 안의 영리한 철학자가 자신의 듣지 못함을 그들의 말하지 못함으로 바꿔치기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수십 번이고 똑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말해준 야학 학생들 덕분에 겨우 몇 마디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알아차린 것 하나. 세상에 목소리 없는 자란 없다. 다만듣지 않는 자, 듣지 않으려는 자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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