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협상 불가능한 가치‘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나는 등골이오싹합니다. 모든 진정한 가치, 인간의 가치는 협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내 손가락이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보다 더가치 있다고 내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가치 있는 것의
‘가치‘는 그 자체로 협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이디어는 토론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식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급한 성격을 띠고, 모든 문제에는 기술적 해결 방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식별 과정이 힘들고 어렵게 느껴질 겁니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올바른스위치를 찾아내면 끝나는 기계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물론 종교인들 중에도 ‘식별‘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불확실한 것을 몹시 싫어하며, 모든 것을 흑백으로환원하려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이데올로그와 근본주의자, 경직된 사고방식에 억눌린 사람들은 식별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자 한다.
면 식별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진리를 가리키던 단어인 알레테이아aletheia가 그런 뜻으로, 스스로 드러나는 것‘, ‘덮개가 벗겨지는 것‘을의미합니다. 한편 히브리어 간투사인 ‘에메트emer‘는 진리를 확실한 것, 확고한 것, 기만하지도 실망시키지도 않는것, 즉 충실한 것과 관련짓습니다. 따라서 진리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사물과 사람이 각자의 본질을 드러내보일 때 우리는 그것에서 확실하게 진실된 면을 보고, 신뢰할 만한 증거를 근거로 그것을 믿게 됩니다. 이런 확실한 증거에 마음의 문을 열려면 겸손하게 생각하며, 선하고진실하며 아름다운 것과 조용히 만나기 위한 여지를 남겨두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방법을 로마노 과르디니(독일의가톨릭 사제이자 신학자, 종교철학자-옮긴이)에게 배웠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방법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그의 저서 《주님》에서 과르디니는 ‘엘 판사미엔토 인콤플레토el pensamiento incompleto(미완성인 생각)‘의 중요성을나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는 어떤 생각을 끝없이 전개하다가 멈추고는 우리에게 관상하는 여유를 줍니다.
그는 독자에게 진리를 직접 만나는 공간을 마련해줍니다.

요컨대 유익한 생각은 항상 미완성이어야 합니다. 그래야그 이후의 결과가 가능할 수 있으니까요. 과르디니를 읽으며 나는 모든 것에서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불안에 사로잡힌 영혼이란 증거입니다. 그에게 배운 지혜 덕분에 나는 규범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들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갈등에 휘말리지 않고서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존헨리뉴먼이 말했던 것처럼, 나도 진리가 항상 우리 너머에, 우리 밖에있지만, 우리 양심을 통해 우리에게 손짓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동의의 문법》에서 썼듯이, 진리는 이성을 통해서는 정상적으로 다가갈 수 없고, 상상을 통해, 직접적인 인상의 도움을 받아, 사실과 사건의 증언으로, 역사와 서술을 통해 다가갈 수 있는 "온화한 빛과 같습니다. 뉴먼은우리가 처음에는 모순되는 진리로 여겨지는 것을 받아들이며 그 온화한 빛이 우리를 인도할 것이라 믿을 때, 우리너머에 있는 더 큰 진리를 볼 수 있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포용하는 만큼 우리가 진리를 포용하지 않으므로, 진리가 아름다움과선함의 도움을 받아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끌려고 한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진리에 접근하는 이런 방식은 탈진실의 인식론과 확연히 다릅니다. 탈진실의 인식론은 우리에게 증언의 청취보다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선택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새로운 가능성을 차단하는 고정된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에도 동의 assent 와 지속적인탐색이란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과거 전통이 그랬습니다. 5세기에 레랭의 성 뱅상이 "교회의 믿음은 해가 지남에 따라 강화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하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더 깊어진다"라고 명확히 정리했듯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령에 다가가는 방법에 대한교회의 이해와 믿음은 확장되고 공고해졌습니다.

전통은 박물관의 전시물이 아닙니다. 교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지만 점점 굵어지고 매번 더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처럼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교리란 하느님이 확정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

진리에 굳건히 뿌리를두는 것과 더 큰 이해를 위해 마음을 여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느 시대에나 모든 남녀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울리도록 우리가 복음을여러 맥락에서 번역할 때, 성령이 항상 우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전통은 재가숭배되는 곳이 아니라 불이 보존되는 곳"이라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구스타브 말러의 말을 즐겨 인용합니다.

어떻게 해야 영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영은 각기 다른언어를 말하고, 다른 방식으로 우리 마음에 다가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결코 강요하지 않고 제안하는 데 반해,
적은 단호하고 집요하며 심지어 한결같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우리를 바로잡으려 하되, 항상 온유하고격려하며 위안과 희망을 줍니다. 악령은 현혹적인 환상과솔깃한 감각으로 우리를 유혹하지만, 덧없고 무상한 유혹일 뿐입니다. 악령은 두려움과 의심을 이용하여 재물과 명성으로 우리를 꼬드깁니다. 우리가 무시하면, 악령은 우리에게 경멸과 비난으로 반격하며 "너희는 무가치한 존재"라고 욕합니다.

적의 목소리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현재를 보지 못하고,
미래의 두려움이나 과거의 슬픔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목소리는 현재를 말하며,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돕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는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 무엇이 나에게 좋고, 무엇이 우리에게 좋으냐?"라고 묻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반면에 적은 우리를 벽에 밀어붙여 꼼짝 못하게 합니다. 선한 영은우리에게 희망을 주지만, 악한 영은 의심과 불안의 씨를 뿌리고 비난합니다. 선한 영은 선하게 행동하며 주변 사람들을 돕고 섬기고 싶은 욕망을 우리의 내면에 불러일으키고,
올바른 길을 가려는 힘을 북돋워줍니다. 반대로 악한 영은나를 내 안에 가두며, 나를 경직되고 편협하게 만듭니다.
악한 영은 두려움과 불만을 조장합니다. 악령은 나에게 슬픔과 두려움과 분노를 심어줍니다. 악령은 나를 해방시키기는커녕 노예로 만듭니다. 또한 나를 현재와 미래로 안내하기는커녕 두려움과 체념의 울타리에 가두어버립니다.

우리는 하찮은 것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그것을 지키려고 온갖 시도를 다하지만, 그런 시도는 감추어집니다.
그 하찮은 것이란 자존심을 지탱해주는 것, 예컨대 권력과영향력, 자유와 안전, 지위와 돈, 재산 따위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이 획득된 행운‘이라 칭한 것을 잃지 않으려는 두려움에 우리는 그 행운에 더욱더 집착하게 됩니다. 따라서자아에서 빠져나와 더 큰 것의 일부가 되라는 권유를 받으면, 의심과 억측의 악령이 우리에게 자신의 애착심을 비밀리에 감추며...

이렇게 우리의 애착을 정당화해주는 변명거리들을 하나씩 받아들이다 보면 우리마음은 강팍해지며 그 변명거리에 집착하고, 결국 그 변명거리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하지만 화해자의 책무는 갈등을 정면에서 마주하며 견디는 것입니다. 또 식별을 통해 의견 충돌의 표면적 이유너머를 보고, 관련된 사람들에게 새로운 통합의 가능성을열어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통합은 양극의 어느 쪽도 말살하지 않고, 양쪽 모두에서 좋은 것과 유효한 것을 새로운관점에서 찾아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런 돌파구는 대화의 선물로 생겨납니다. 사람들이 서로 신뢰하며 겸손한 자세로 함께 선을 추구할 때, 또 하느님의 은사를 서로 교환하며 서로에게 기꺼이 배우려할 때이런 돌파구가 열립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를 힘들게 하던문제의 해결책이 예기치 않게 떠오릅니다. 말하자면 새로운 창조적 발상의 결과가 밖에서부터 주어집니다. 이런 결과는 내가 ‘범람‘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고의 범위를 경계짓는 둑이 무너지며 범람한 연못에서 물이 넘치듯이, 전에는 대립으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던 해결책들이 봇물 처럼 쏟아지기 때문입니다.

‘범람은 그리스어 perisseuo의 여러 뜻 중 하나입니다.
시편 작가가 시편 23장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술잔이 넘친다고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perisseuo는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 무릎에 쏟아질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기도 합니다.[루카 복음서 6장 38절] 또한 perisseuo는 요한 복음서 10장 10절에서 예수님을 통해 생겨난 생명을 뜻할 때는 명사로,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두 번째서간 1장 5절에서 바오로가 하느님의 관대함을 묘사할 때는 형용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버지가 허겁지겁 달려가방탕한 아들을 껴안았다는 이야기, 혼주가 길과 들에서 손님들을 불러와 큰 잔치를 베풀었다는 이야기, 밤새 그물을헛되이 던졌지만 새벽녘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를 끌어올렸다는 이야기, 또 예수님이 죽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이야기 등의 유명한 구절에서도 하느님의 마음이 범람합니다.

그런 사랑의 범람은 무엇보다 삶의 기로에서 일어납니다. 그때 우리가 마음을 열고 취약함을 드러내고 겸손하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교만의 둑을 무너뜨리며 새로운가능성을 상상하게 해줍니다.

가족에 대한 시노드에서는 이혼자, 별거자, 재혼자에대한 배려 및 그들과 성체의 관계라는 특별한 쟁점보다 훨씬 폭넓은 문제가 다루어지는 게 당연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언론이 그 시노드를 특정한 집단과 관련된 것이라 규정지음으로써 그 시노드의 전체적인 목표를 하나의 쟁점으로 축소하고 단순화해버렸습니다. 게다가 그 시노드가 이혼자와 재혼자에게 영성체를 허용하느냐 허용하지 않느냐를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것처럼 보도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규칙을 완화해야 한다는 쪽과 엄격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쪽으로 여론이양분되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런 여론의 추세를 반영한언론 보도는 시노드가 넘어서려던 궤변론적 태도를 더욱강화시킬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성령께서 우리를 구해주었습니다.
2015년 10월 가족을 주제로 한 2차 시노드가 끝나갈 때쯤돌파구가 열렸습니다. 이번에는 범람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 깊은 지식을 지닌 사람들, 특히 빈 추기경인 크리스토프 쇤보른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토마스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적 전통에서 진정한 도덕적 교리를 되살리며, 궤변적인 도덕으로 추락한 퇴폐적 스콜라 철학으로부터 구해냈습니다.

사람마다 마주하는 상황과 환경은 각양각색이며 모든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일반 법칙은 없다는 아퀴나스의 가르침 덕분에, 시노드는 각각의 사례에 따라 개별적인 식별의 필요성에 합의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법 자체를 바꿀 필요가 없었습니다. 교회법을 어떻게 적용하느냐를 바꾸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각 사례의 특수성을 고려하고,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관계하는 하느님의 은총을 경청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것을 흑백으로 나누며 은총과 성장을 가로막는 이분법적 도덕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자거나 느슨하게적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범주에 깔끔하게 들어맞지않는 상황들에 어느 정도 여지를 두고 규칙을 해석하자는것이었습니다.

그 합의는 성령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엄청난 돌파구로,
우리 전통의 범위 내에서 진리와 자비를 새로운 관점에서 더 낫게 통합한 것이었습니다. 교회법이나 교리를 바꾸지 않고 오히려 그 둘의 진정한 의미를 되살린 덕분에, 이제 교회는 동거자나 이혼자와 함께하며, 그들이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일하는지를 지켜보면서, 교회의 가르침을 충만히 받아들이도록 더 잘 도울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일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정치면 기사 속에는 온갖 갈등과 분노를 표출하는 공격적인 단어와 문장들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단어와 문장에는 보이지 않는 칼날이 장착되어 있어, 그런 날카로운 대화나 기사들을 듣거나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 많다. 어떻게 이 증오와 폭력의 언어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제도로서의민주주의는 안착되었지만 ‘심리적 차원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요원한 것 같다. 심리적차원의 민주주의가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나는 이제 민주주의가 절차적 차원과제도적 차원을 넘어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단계‘까지 가야 한다고 믿는다. 심리적차원의 민주주의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아픈 마음까지 헤아려주는 민주주의이며, 내 주장을 말했을 때 남들이 받을 충격이나 상처까지 헤아리는 민주주의가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비폭력적인 대화, 타인의 마음에 상처와 충격을 주지 않는대화를 나누는 기술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넷플릭스 드라마 〈어웨이(Away)>를 보며 타인에게 상처주지 않는 대화의 기술을 배웠다. 3년 동안 화성탐사선을 타게 된 우주비행사 엠마 그린(힐러리 스웽크)은 젊은 여성으로서 막중한 임무를 맡아 리더십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다. 여성에 대한 교묘한차별, 나이 어린 리더에 대한 불신, 팀원들의 질투와 오해, 3년 동안 어린 딸과 남편을보살필 수 없게 된 상황 등으로 인해 ‘화성탐사선의 리더‘라는 영광보다 그로 인한 고통이 더 큰 것이다. 하지만 엠마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베스의 가족과 이웃은 베스의 내성적인 성격을 향해 그 어떤 비난도 질책도 하지 않는다. 베스가 남들보다 좀 더 천천히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한없이 기다려주고, 그녀가 자신의 재능과 마음을 숨기려 하지만 말없이 온몸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깊은속내를 헤아려준다. 비폭력 대화란 이런 것이다. 그 어떤 판단도 조건도 유보하는 것,
그가 언젠가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조용히 길을 열어주는 것. 조건 없는 사랑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차분한 기다림은 어떤 마음의 장벽도 밀어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으로 부풀다 절망으로 꺼진 자리,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텅 빈 자리와 텅 빈 말이있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걸었던가.
목적과 이유를 잃고 오래 허둥댔다. 그러나 ‘위해서 와
‘때문에‘를 지워가니 침묵이 소리를 내고 빈자리가 모습을 보인다. 희망이 눈을 빼앗고 절망이 눈을 감게했던 자리. 도대체 이 침묵과 빈자리를 어떻게 대해야하는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런 말은 하고 싶다. 이정표를 잃은 곳에서 길이 보인다. 아, 나는 이런 길 위에 있구나.

정작 나 자신이 듣지 못했으면서 함부로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존재라고 선언해버렸다. 내 안의 영리한 철학자가 자신의 듣지 못함을 그들의 말하지 못함으로 바꿔치기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수십 번이고 똑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말해준 야학 학생들 덕분에 겨우 몇 마디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알아차린 것 하나. 세상에 목소리 없는 자란 없다. 다만듣지 않는 자, 듣지 않으려는 자가 있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쌀 미米 자에 팔십팔八十八 자가 숨어 있잖아. 건조한 숫자라도 보기에 따라서 풍부한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어. 아라비아의 숫자 8은 또 어떻고, 옆으로 눕히면 수학의 무한대의 기호가 되지. 그리고 안과 밖이 연접되어 있는 뫼비우스의 띠가 되기도 해. 둘 다 일상의 생각을 뛰어넘는 신비한 세계의 이야기잖아. 한자의 팔도 마찬가지야. 글자 모양을 보면 끝이 열려있어. 그래서 앞날이 환히 열린 개운開運을 상징하고, 그 발음 역시 ‘펼 발자와 같아서 발전發展, 발재發財의 뜻과 통해, 중국 사람들은 자동차 번호나 전화번호에 팔자가 겹친 것이 있으면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해요."

"눈에 선해요. 코로나 때문에 작은 일상의 행복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외로운 뒤통수가 보이는 것 같아요."
"별것 아닌 모임, 사사로운 오후의 대화, 이런 일상의 작은욕망도 무참히 짓밟혀버린 코로나 팬데믹의 격리 생활, 그게바로 솔제니친의 굴라크 군도 정신병동이거나 안네가 겪었던유태인 구역의 은신처이거나 나치의 집단 수용소 아니겠어. 아니면 전쟁 때의 포로수용소와 방공호 속이거나. 우리는 지금그 같은 격리된 감금의 역사를 살고 있는 거지. 코로나가 아니라도 벌써 그런 상황은 이미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었던 거지.
이 눈물 없는 황무지의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얻었는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가.

"내가 만약 유럽에서 태어났고 누군가 내게 우리 가문의 문장을 만들라고 했다면 나는 이걸로 정했을 거야. ‘왜?‘ 어떻게?‘ 하는 물음표가 있어야 ‘아!‘ 하고 무릎을 탁 치는 느낌표가 생기지. 물음표가 씨앗이라면, 느낌표는 꽃이야."
"어른이 되어서도 물음표는 사라지거나 줄어들지 않았나요?"라는 질문에 그는 우엉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내 인생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고 가는삶이었어. 누가 나더러 ‘유식하다, 박식하다고 할 때마다 거부감이 들지. 나는 궁금한 게 많았을 뿐이거든.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여겨도 나 스스로 납득이 안 되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어.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오가는 것복하면 산 게 아니지."
어제와 똑같은 삶은 용서할 수 없어. 그건 산 게 아니야. 관습적 삶을 반이 내 인생이고 그 사이에 하루하루의 삶이 있었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잘 알려진 대로 피노키오는 진실이 아닌,
혹은 논리학자들의 표현대로라면 ‘참이 아닌 이야기를 해야만코가 길어진다. 그렇다면 "지금 내 코가 길어지고 있어" 라는 피노키오의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참일까, 거짓일까? 만약피노키오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코는 길어지지 않을 것이다.따라서 "지금 내 코가 길어지고 있어" 라는 말은 거짓이다. 반대로 피노키오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면 코는 길어질 것이다. 따라서 그의 말은 참이다. 그렇다. 이것은 역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