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천天 하늘의 힘과 지地 땅의 힘 거기에 인ㅅ, 인간의 힘까지 아우를 수 있는 사람만이 왕이되고 리더가 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고대 중국에서 이상적 통치자의 모습은 성인이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내성외왕內聖王(안으로는 성인이면서 밖으로는 군주)으로 개념화하였지요. 성인의 성자는 ‘耳(귀)+(드러내다)‘으로 이뤄져 있는데, 성인은 귀(들)를 중시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듣는다는 경청敬聽의 의미는 서로 공감共感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나, 즉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지향합니다.

사막에서 살아가려면 물을 밖에서 구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낙타처럼 혹은 선인장처럼 자신의 몸속에 수분을 저장해 두어야 하죠. 자신의 갈증을자신의 체액으로 적셔주는 외로운 그 작업에 익숙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막에서 자라는 생물들은 타자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아무런 보상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 단절이 오히려 그들의 내면을풍요롭게 만듭니다.

그럼, 낙타는 무슨 꿈을 꿀까요? 열사의 모래밭을 지날 때 속눈썹이 긴 낙타는 결코 하늘을 쳐다보는 일이 없습니다. 낙타의 꿈은 그의 등 위에 달린 혹 속에 있어요. 자신이 키워온 그 혹이 자신의 하늘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구름이 흐르고 거기에서 비가 내립니다. 거기에서 상상력이 무르익습니다. 거기에서 시가 나오고 소설이 나옵니다.

철학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불행에 좌절하지 않는 희망입니다. 희망처럼 좋은 물건이 없습니다. 희망이 있으면 나에게 나도 몰랐던 재능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희망은 철학을 뛰어넘습니다. 어쩌면 희망이 있다면 철학이란 상품이 더는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희망은절망을 몰아내지만 희망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입니다. "내 것이냐, 네것이냐를 따지는 소유의 희망은 가짜 희망입니다.

사실 포기해버린, 이미 지쳐 버린 29마리의 사냥개들은 사슴을 직접 보고달린 게 아니었어요. 앞의 사냥개를 쫓아 덩달아 뛰었을 뿐이죠. 맨 먼저달렸던 한 놈의 사냥개만이 사슴을 직접 봤기에 끝까지 뛰어갔던 겁니다.
희망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망은 절대로 쓰러지지 않습니다. 사슴을 발견한 사냥개만이 끝까지 쫓아가듯이, 희망을 품은 사람은 어떤 난관에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7많고 많은 희망가 중에서 미겔 데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쓴 《돈키호테 Don Quixote》(1605)에 나오는 이 시만큼 기막힌 희망가가 또있을까 싶습니다.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진다‘는 노랫말에 돈키호테의 황당무계하지만 아름다운 이상주의가 담겨 있습니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무적의 적수를 이기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고귀한 이상을 위해 죽는 것.
잘못을 고칠 줄 알며,
순수함과 선의로 사랑하는 것.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라만차의 시골 지주 ‘알폰소 키하노‘는 핍박받는 이의 편에 서야겠다고어느 날 다짐하고는, 자신의 이름을 ‘돈키호테‘라고 고치고 ‘산초 판자‘와 모험을 나섭니다. 영어의 ‘키호티즘 Quixotism‘이라는 단어가 있어요.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저돌적으로 나아가는 성품이나 경향을일컫는 말인데 돈키호테에서 파생되었죠. 풍차를 거인으로 생각하고, 양떼를 교전 중인 군대로 생각하며, 포도주가 든 가죽 주머니를 상대로 격투를 벌인 돈키호테를 떠올려보세요. 여행이 이렇게 어처구니없고 황당할지라도, 그는 ‘오직 믿음을 갖고, 별에 닿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훗날 소설 《돈키호테>를 각색한 뮤지컬 <라만차의 사람Man of La Mancha〉에서 극중 돈키호테가 부르는 <불가능한 꿈Impossible Dream>은 앞서 시에서 느껴지는 장중함을 넘어 달콤하며 낭만적인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이루지 못한 꿈을 꾸고쳐부수지 못할 적과 싸우며견디지 못할 슬픔을 견디고용감한 사람도 가기 두려워하는 곳에 가고순수하고 정결한 것을 사랑하고잡을 수 없는 저 별을 잡으려고 손을 뻗는 것,
이것이 나의 여정이다.

아무리 희망이 없어 보여도아무리 길이 멀어도정의를 위해서 싸우고천상의 목표를 위해서는 지옥에 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영광의 여정에 충실해야 나 죽을 때 평화로우리그리고 이것 때문에 세상은 더 좋아지리아무리 조롱받고 상처 입어도한사람이라도 끝까지 노력한다면잡을 수 없는 저 별을 위해

나그네에게 신념은 버려야 할 짐일지 몰라요 신념에 사로잡혀 답이 정해져있는 사람과는 대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대화가 중요한 것이죠 길 떠난 나그네에게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은 달라야 해요그래서 오늘이 제일 아름답고, ‘지금 여기‘가 중요한 것이죠. 오늘도 내일도 변하지 않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신념은 위험합니다. 관점에 따라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게 인간사인데, ‘예스‘와‘노‘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기 때문이에요. 메이비 maybe를 허용해야 합니다.
‘maybe‘ 덕분에 우리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념에 기대어 산다는 건 시간낭비가 아닐까요? 신념 속에 빠져 거짓 휴식을 취하지 말고 변화무쌍한 진짜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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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죽음이 "생애 말기신체, 정서, 사회 기능에 대한 개인의 기대와 같이 인식적 차원에서 죽음에 접근하는 것이라면, 웰다잉은 "존엄한 죽음을 위해 개인이 적극적으로 취해야 할 삶의 태도와 행동적 차원에서 죽음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말이다.
그 이론적 정의는 웰다잉이 무엇인지 말해주는가? 애석하게도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인식적 차원이 부각된 좋은 죽음과 실천적 차원이 강조된 웰다잉을 구별해서 다루는 게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다. 앞서 인용한 이론적 정의는 웰다잉에관한 어떤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야망을 드러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웰다잉이 무엇인지 밝히는 데 실패하고만다. 그 정의 안에 ‘죽음‘ 대신 다른 단어를 넣어도 말이 된다.

웰다잉이 강조하는 좋은 죽음(표방)과 능동적인 죽음 준비(실천)라는 ‘가치의 틀‘은 죽음을 각종 기술로 통제할 대상으로만들고, 정작 죽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불평등한 삶의 조건에는 주목하지 못하게 한다. 학력, 직업, 소득, 지역 등에 따른죽음의 불평등성을 잘 살고 잘 죽어야 한다‘는 윤리적 언어 표현으로 가리거나 정당화한다. 웰다잉이 상정하는 자기의 죽음을 능동적으로 준비하는 개인은 자기 주도적으로 삶을 계획하고, 관리하고, 계발하고, 실현하는 ‘자기 안에 갇힌 주체‘로 보인다. 그에게 정책, 제도, 법률, 또 가족, 친구, 동료 등의 이른바 사회적 관계는 잘 죽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로 치부되거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을까?

오늘날 웰다잉의 유행은 그만큼 사람들이 잘 죽지 못하고있다는 말이자, 죽음이 개인의 노력으로 대비해야 하는 일이됐다는 방증이다. 마치 죽음이라는 불행을 막는 주술이 등장한 것 같다. 우리는 잘 죽는 것만 고민하면 될 정도로 좋은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게 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잘 죽는 거라도 고민하는 것일까? 웰다잉은 우리에게 죽음에 관한 두툼한 언어와 상상력을 촉구한다.

동사 몽테는 ‘오르다’를 의미한다. 즉 인간과 비인간(동식물, 사물,
물질, 신 등)이 아래에서 위쪽으로 움직여 간다는 뜻이다. 이러한 물리적 이동은 인간 사회에서 상징적 의미를 획득한다. 가령 높은 지위를 얻고, 이동 수단을 타고, 주변에서 중심으로 가고, 세력이 왕성해지고, 감정이 치솟고, 소리를 내고, 의례에서 향이 피어나고, 해와 달이 뜨고, 수치 따위가 늘어나고, 공들여 준비한 일을 발표하고, 벽 등에 액자 따위를 걸고, 명성이커지는 것을 표현할 때 동사 몽테를 쓸 수 있다. 즉 몽타주(혹은오름)는 ‘특별한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신체적조건을 벗어나는 일, 중력을 거스르는 일,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하는 일, 들리지 않던 것을 듣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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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의 문제는 마치 주사위 놀이같다. 먼저 ‘보이지 않는 손‘이 노화, 질병, 돌봄, 죽음을 새긴주사위를 던진다. 그 결과는 ‘우연히‘ 누군가의 일상에 들이닥친다. 각자 그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 또 다른 주사위를 던진다. ‘행운‘을 기대하면서 던지는 주사위다. 최대한 천천히 늙기를, 덜 아프기를, 깔끔하게 죽기를 바라며. 또 착하고 경제력도갖춘 가족이 나를 잘 돌보기를, 다정하고 친절한 의료진을 만날 수 있기를, 말 잘 통하고 헌신적인 간병인을 만날 수 있기를기대하며 주사위를 던진다. 그런데 ‘만약‘ 주사위 던지기의 결과가 나쁘거나, 더 이상 던질 주사위가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주사위 놀이는 양면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하나는 우연,운, 기회, 가능성을 뜻하고, 또 하나는 투기, 모험, 위험, 사행성을 의미한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커뮤니티 케어‘가 특정한 기준으로선정한 환자 집에 비대면 의료기기를 설치하고, 문턱을 제거하고, 가끔 사회복지사나 의료인이 방문하는 사업은 아닌지우려된다. 집에서 죽으면 ‘좋은 죽음(혹은 자연사)‘이고, 시설에서 죽으면 ‘나쁜 죽음(혹은 객사)‘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존엄한 죽음은 집 그 자체가 아니라 공적 세계에 울려 퍼지는 ‘집 안의 목소리들‘에 달려 있다.

오늘날 요양원과 요양병원을 노인 시설로만 볼 수는 없다.
‘국가의 발전과 미래‘를 출산율(생산인구)로 환원하는 인구 위기론에서 돌봄이 필요한 노인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의존적 노인‘, 그를 둘러싼 규범, 가치, 감각, 기준, 법 등이 요양원과 요양병원이라는 실체로 현현했다. 다시 말해 국가는 ‘정상가족‘을 기대하기 힘든 시대를 위기로 상정했고, 발전에 쓸모 있는 인구와 쓸모없는 인구를 분류했다. 의존적 노인은 이러한 정치적 상상과 인식 속에서 선별되고 의료적, 생물학적차원으로 규정된 ‘인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의존적인데, 마치 노인만 의존적인 존재인 것처럼 딱지를 붙인 셈이다.
한편 ‘집안일‘에 머물던 노인 부양은 공적 영역으로 확대되었다기보다는 시장으로 옮아갔다. 이제 개인이 좋은 돌봄을

구청 공무원은 낡은 형광등을 LED로 교체하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밥솥과 냉장고를 열어본 후 필요한 식료품을 메모했다. 부엌에 식탁을 놓을 수 있는지도 알아보겠다고 했다. 문득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수급자가 아니었다면 할머니의 삶은 어떻게 됐을까? 상상만 해도 정신이 아찔했다. 할머니가 수급자라서 다행인 한편, 보건복지 정책이 할머니를 ‘취약한 대상‘으로 고착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수급자가 되기 위해서, 또 수급자가 된 이후에도 자신의 취약함을 얼마나 많은 공무원에게 서류와 말로 ‘증명‘했을까 싶었다.

현장에 가보니 커뮤니티 케어는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는보건복지 정책이었다. 취약계층은 노동능력을 상실한 가난한노인 환자였다. 한국에서 ‘복지‘라는 단어는 대개 ‘취약계층‘을염두에 둔다. 그 ‘상식‘을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보건복지정책이 겨냥하는 취약계층이란 무엇인가? 반대로,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보건복지 정책이란 무엇인가? 취약한사람들의 계층 이동을 돕는다는 것인가? 혹은 ‘보통‘ 사람들이취약계층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는 정책인가? 혹시 계층 간의분리를 고착시키는 정책은 아닌가?

현장에서 취약계층과 보건복지라는 개념은 상호작용하며불평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했다. 정부의 정책은 할머니삶의 조건보다는 할머니의 ‘취약함 그 자체‘에 관심이 많았다.
할머니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보다는 오히려 할머니가 취약한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수급자인 할머니가 소일거리로 생활비를 벌충하고, 질병을 유지하고, 딸과 거리를 두는 삶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어설프게‘ 돈을 벌거나 건강하거나 딸과 교류를 하다가는 수급자 자격을 박탈당할수 있는 구조였다. 수급자가 아닌 할머니가 지금처럼 손녀와함께 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한편, 앞서 언급한 공무원들의‘명단‘은 곧 취약한 삶의 관리였다. 커뮤니티 케어 정책은 ‘어려운 어르신들‘을 샅샅이 찾아내 그 명단의 크기를 확대하는일이었다. 그 명단이 ‘노인 게토‘ 만들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그 결과 호스피스 의료진은 임종이 임박하거나, 말기에 대한 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환자를 만나게 된다. 환자는 호스피스에서 의미 있는 생의 끝자락을 보내고 싶어도 체력과 시간이 없다. 완화의료 전문가들은 호스피스의 가치를 실현하기보다는 ‘임종 처리‘ 역할을 맡으면서 소진된다. 이런 현실에서‘호스피스는 죽으러 가는 곳‘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싹튼다. 간혹 책이나 다큐멘터리에서 접하는 선진국 호스피스의 사례들,예컨대 가든파티, 바닷가 여행,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하기 등을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이유다.

이 ‘역동적인 과정‘이 진행되면 될수록돌봄의 가치는 부서지고, 가족 보호자의 부담은 커지며, 의료진은 분열한다. 질병의 치료 가능성과는 별개로, 환자 삶의 위험이 증식하는 구조다. 그래서 호스피스에 주목해야 한다. 의료라는 컨베이어벨트 말단에 위치한 호스피스에 대한 관심은곧 이 체계를 총체적으로 점검하고 수리하는 일과 밀접히 연결되기 때문이다.
호스피스를 ‘죽으러 가는 장소‘가 아니라 모든 환자를 위한‘환대와 돌봄의 시공간‘으로 더 과감하게 상상해야 한다. 시민들이 호스피스를 어렵지 않게 이용할 수 있는 사회라면 죽음의 풍경도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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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점차 펼쳐지고 밝혀지는 과정이며더 멀리 갈수록 더 많은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물을 이해하는 것이저 너머에 있는 사물을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준비다.
히파티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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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로 ‘의심Zweifel‘은 숫자 ‘2zwei‘와 ‘접falten‘에서 나왔습니다. 무언가가 이중으로 접힌 것이라고 보면, 의심은 "두 가지 가능성 앞에서 드는 불확실함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의심에 관해 묵상하면서 우리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 체험과 마주합니다. 즉 모든게 이중적이라는 사실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 하늘과 땅,남자와 여자, 믿음과 불신처럼 우리 삶에는 이원성이 존재합니다.이와 동시에 우리는 일치, 즉 하나 되기를 갈망합니다. 이러한 갈망은 특히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매우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의심은 우리를 인간 실존의 본질로 이끕니다.

-에밀 시오랑은 의심이 많은 철학자였습니다. 루마니아 출신인그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했고 삶의 의미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한 가지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음악의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아포리즘"에서 그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의심이 곳곳에서 덮친다. 그런데 예외가 하나 있다. 회의적인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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