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몇 방울로 세례성사가 의미하는 바를 다 드러낼 수 있는가? 평일에, "사적(私的)" 세례를 위해 "특별히 몇몇 사람만 초대" 한 채 가족끼리 모여서 주일날의 신도들의 모임을 무시하면서도, 이 아이가 하느님과 그리고 교회와, 인류와, 온 세상과 근본적인 관계를 맺는 양 생각한다면 천만에, 결코 그렇지 않다! ... 주님의 첫 제자들은 강, 샘, 바다처럼 물이 많은 곳에서 세례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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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대 도시에서는 모든 중요한 집들은 전부 연못(수영장)을 갖추고 있었다. 종교 자유 이전엔 (313년에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 자유 얻음 역주)바로 이러한 집에서 주일에 신자들이 모였다. 4세기에는 대성당들이 기념비적인 영세당들을 갖고 있었고, 이 안에는 새로이 영세받을 이가 계단을 내려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깊은 물통이 있었다. 10세기경엔 이미 어른 입자가 더 이상 존재치 않게 됨에 따라 어린아이를 담그기에 충분한 정도의 큰 대야 모양의 그릇으로 바뀌었다. 이후 세례는 더욱더 간소하게 치러졌으니, 아기의 머리 위에서 물병으로 붓거나, 집단 세례의 경우에는 물을 뿌리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제 물로 씻는(= 목욕) 예식인 침례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침례는 이전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동방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침례는 서방교회의 예식서에도 언제나 가능한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3세기 말경에 후보자가 많아진 까닭에 주교 홀로 모두에게 세례를 베풀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주교는 후보자들이 침례할 물을 축성하기만 하였다. 이리하여 사제와 부제들이 주교의 이름으로(여인 후보자인 경우는 여부제가) 세례성사를 계속 진행하였다(동방교회들에는 여부제 제도가 존재했으나, 서방교회는 이 제도를 받아들인 적이 없다 - 역주). 곧이어 주교는 영세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성령의 선물을 청하는 "세례 후 예식"을 하였는데 이때 안수를 하거나(서방교회) 견진 기름을 바른 후(동방교회) 이마에십자 표시를 긋고 평화의 인사를 나누었다.
4세기에 들어서 교회가 자유를 얻게 되었고 이교도들은 차츰 사라졌으며유아세례의 수는 더욱더 늘어가기만 하였다. 주교좌가 있는 도시에서 멀리떨어진 시골에도 본당들이 많이 세워지게 되었다. 따라서 두 가지 해결책이있었으니, 하나는 신생아가 태어난 즉시 주교의 이름으로(사제가) 세례를주고, 견진은 주교가 그 지역을 지나갈 때까지 미루는 것이고, 둘째 방법은일반 사제에게 견진을 베풀 권한을 줌으로써 세례와 견진의 연관성을 살리는 방법이었다.
동방 전례의 교회들은 둘째 해결책을 선택했다. 사제가 세례 후 즉시 견진을 베풀었는데, 이때에도 언제나 주교가 축성한 기름을 사용했고, 어린아이의 경우에는 성찬식 때 축성한 성혈 몇 방울이라도 주었다. 우리 서방교회에서는 첫째 해결책을 골랐으니, 사제는 신생아에게 세례를 주었고 주교가 세례 후 예식(= 견진, 성체성사)을 하러 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세례 후)예식은 "전수(傳受), "안수", "크리스마", "인호" 등으로불리었다. 5세기 이후 견진(확정, 확인의 뜻)이라 불리었으니, 그것은 주교가 세례를 확인 한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서방교회는 안수를 견진의 본질적 의식으로) 여겼으며, 1972년까지(현재와는 다른) 기도문을 사용하였다. 동방교회에서는 도유를 견진의 본질적 의식으로 여겼다. 5세기 이래로 서방교회 안에서도 도유를 견진의 주요 예식으로 채택하였다. 현재 서방교회는 12세기 때 만들어진 기도문을 버리고 4~5세기 이래 사용되어 온 동방교회의 기도문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각 성사의 은총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더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자유를 주신 예를 명백히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손가락 우리는 하느님의 업적에 둘러싸여 있다. 하느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삼위는 완전한 일치를 이루신 가운데 일하신다. 하지만 신경(信經)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듯이, 삼위의 공동 행위는 결코 뒤섞이지 않는다. 즉, 성부께서 모든 것을 "시작하시고", 성부께로부터 파견된 성자가 "실현하며",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파견된 성령이 "완성한다". 이처럼 성부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말씀이신 아들을 통해서 하시며, 성령은 생명이 솟아나오게 하기 위해서 "물 위를 날아다니신다". 모든 것이 이처럼 이루어질 것이다. 전통적인 비유에 따르면, 성부는 힘과 운동이 나오는 팔이고, 성자는 행동으로 옮기는 손이며, 성령은 일을 완성시키는 손가락이다. 이처럼 3위는 한 분 하느님을 이루고, 항상 같이 움직이시며 같은일을 동등하게 하시되 다른 임무를 갖고 계시다. 즉, 성부는 계획하고, 성자는 실현하며 성령은 완성시킨다. 따라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행위를 "마무리짓는" 예술가이자 "손가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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