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일하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많은 훼방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의가 취소되었으나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중대한 문제였던 주민참여 프로그램에 대한 지자체 평가 작업 역시 보류되었지만 봉쇄가 풀려도 이를 다시 묻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갑자기 하루치 업무랑을 단 두세 시간 만에 완수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모두 뭔가 하느라 늘 바빠보여야 했던 일터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방종, 예컨대 창문을 내다보며 생각을 가다듬는 행동을 해도 괜찮았다. 즉,가짜 노동에는 관중이 필요했던 것이다. 관중이 없을 때우리가 더 이상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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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남다른 기억력을 지니고 있다. 가끔 사소한 일을깜빡 잊는 것을 빼고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지식과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놀랍다. 만일을 대비해 그는 앞으로의 일정을 어딘가에 적어놓곤 하는데 과거의 일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과거에 연연해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도 않으며, 오늘을 충실히 보낸다‘라는 평범한 진리가 그의 수도 생활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가장 자신다운 사람이 되어라. (Esto Quod Es에스토 쿼드 에스.)’가장 자기다운 사람이 된다는 게 대체 뭘까? ‘가장 자신다운 고유한 사람‘이 되어야 삶이 단단해져 어떤 외부의 충격을 받아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걱정과 고민도 삶을 갉아먹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일과 삶의 균형도지혜롭게 지켜내고 삶 자체를 향유하게 될 것이다.

"많이 알지만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모르는 건 정말 어리석은 태도 같아."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가득하지만, 제대로 말을 하지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고 싶지 않아서 그의 한국어 공부는 오늘도 멈추지 않는다.

스페인어로 ‘만족하다‘라는 의미의 ‘사띠스파세르satisfacer‘는 이 단어의 어원인 라틴어 ‘사티스파체레 satisfacere‘
와 마지막 알파벳 e만 빼고는 같다. ‘충분한‘이라는 형용사 ‘사티스satis‘와 ‘하다, 만들다‘라는 뜻의 동사 ‘파체레Facere‘의 합성어가 바로 ‘사티스파체레‘이다. ‘무언가를 위해충분히 노력하면 저절로 만족감이 따라온다‘는 말이다.
빠드레가 "소피, 너는 왜 스페인어를 배우니?"라고 묻는다. 지금 당장 나에게 자격증이나 언어 실력에 대한 증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또 다른 세계의 언어로 새로운 나의 자아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을 뿐이다.
‘배움의 과정‘, 가끔은 결과를 지나치게 중시하고, 목표만 바라보며 주변의 풍경도 살피지 않은 채 전력 질주하는 사람들도 배움의 과정에서 순간순간 밀려오는 행복을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나이가 들면 으레 그래. ‘나이 든 사람의 잔병치레(achaque de viejos아차께 데 비에호스!야!"라고 한다.
잔병치레와 만성병이라는 뜻의 ‘achaque아차는 항상몸속 어딘가 숨어있다가 컨디션이 나빠지면 심해져 온몸을 괴롭힌다. 평소에 빠르게 걸으며 산책을 즐기면 몸이적당한 자극을 받아 활기를 느끼지만, 한순간 몸 어딘가가 아프기 시작하면 밖으로 나가는 것이 꺼려진다.
나이 드는 건 자연의 순리지만 기력이 약해져 방 안에만, 침대 위에만 누워있게 될 상황이 되도록 늦게 오기를바랄 뿐이다. 그 시기는 모두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그가 수수께끼 하나를 냈다. "세상의 것 대부분이 많을수록 좋지만 적을수록 좋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뭘까?" 그러더니 "적을수록 좋은 건(cuantos menos mejor꽌또스 메노스 메호르) 바로 병과 상처가 아닐까?" 하며 요즘 들어 아프다는 허리를 손가락으로 장난스럽게 짚어 보인다.

스페인어에 ‘상호적 관계(reciprocidad 레시쁘로시다드)‘라는 말이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다 해서 그에상응하는 대가를 받고자 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위하는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내면이 결국 상호주의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어린 물고기가 있었다. 그 어린 물고기는 어른 물고기에게다가가 "전 바다라고 불리는 곳을 찾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때 어른 물고기는 "네가 있는 곳이 바로 바다야!"라고 대답했고, 어린 물고기는 "여기는 그냥 물이에요. 내가원하는 건 바다라구요"라고 투덜거렸다.
많은 이들이 이 어린 물고기처럼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방황하지만, 사실 삶의 의미는 가장 평범한 일상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평범한일상도 다른 시각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추억과 일상은 ‘재해석‘의 순간들이다.
‘이유와 의미를 가진 사람에게 참을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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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혜은 2022-11-13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gaudium님 안녕하세요! <올라 빠드레>의 저자 소피아입니다. 책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봐주시고 마음에 드는 문구 남겨 주시는 소중한 독자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구절들이 gaudium님에게도 따뜻함을 전달해주었으면 좋겠네요!

gaudium 2022-11-14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글~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이태리에서 좀 오래 지냈던 시간도 떠오르고 신부님과 소피아씨의 수업에 저도 참여한것 같은 행복한 시간 이었어요
 

물 몇 방울로 세례성사가 의미하는 바를 다 드러낼 수 있는가? 평일에,
"사적(私的)" 세례를 위해 "특별히 몇몇 사람만 초대" 한 채 가족끼리 모여서 주일날의 신도들의 모임을 무시하면서도, 이 아이가 하느님과 그리고 교회와, 인류와, 온 세상과 근본적인 관계를 맺는 양 생각한다면 천만에, 결코 그렇지 않다!
...
주님의 첫 제자들은 강, 샘, 바다처럼 물이 많은 곳에서 세례를 주었다.

...

한편 고대 도시에서는 모든 중요한 집들은 전부 연못(수영장)을 갖추고 있었다. 종교 자유 이전엔 (313년에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 자유 얻음 역주)바로 이러한 집에서 주일에 신자들이 모였다. 4세기에는 대성당들이 기념비적인 영세당들을 갖고 있었고, 이 안에는 새로이 영세받을 이가 계단을 내려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깊은 물통이 있었다.
10세기경엔 이미 어른 입자가 더 이상 존재치 않게 됨에 따라 어린아이를 담그기에 충분한 정도의 큰 대야 모양의 그릇으로 바뀌었다. 이후 세례는 더욱더 간소하게 치러졌으니, 아기의 머리 위에서 물병으로 붓거나, 집단 세례의 경우에는 물을 뿌리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제 물로 씻는(= 목욕) 예식인 침례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침례는 이전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동방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침례는 서방교회의 예식서에도 언제나 가능한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3세기 말경에 후보자가 많아진 까닭에 주교 홀로 모두에게 세례를 베풀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주교는 후보자들이 침례할 물을 축성하기만 하였다. 이리하여 사제와 부제들이 주교의 이름으로(여인 후보자인 경우는 여부제가) 세례성사를 계속 진행하였다(동방교회들에는 여부제 제도가 존재했으나, 서방교회는 이 제도를 받아들인 적이 없다 - 역주). 곧이어 주교는 영세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성령의 선물을 청하는 "세례 후 예식"을 하였는데 이때 안수를 하거나(서방교회) 견진 기름을 바른 후(동방교회) 이마에십자 표시를 긋고 평화의 인사를 나누었다.

4세기에 들어서 교회가 자유를 얻게 되었고 이교도들은 차츰 사라졌으며유아세례의 수는 더욱더 늘어가기만 하였다. 주교좌가 있는 도시에서 멀리떨어진 시골에도 본당들이 많이 세워지게 되었다. 따라서 두 가지 해결책이있었으니, 하나는 신생아가 태어난 즉시 주교의 이름으로(사제가) 세례를주고, 견진은 주교가 그 지역을 지나갈 때까지 미루는 것이고, 둘째 방법은일반 사제에게 견진을 베풀 권한을 줌으로써 세례와 견진의 연관성을 살리는 방법이었다.

동방 전례의 교회들은 둘째 해결책을 선택했다. 사제가 세례 후 즉시 견진을 베풀었는데, 이때에도 언제나 주교가 축성한 기름을 사용했고, 어린아이의 경우에는 성찬식 때 축성한 성혈 몇 방울이라도 주었다. 우리 서방교회에서는 첫째 해결책을 골랐으니, 사제는 신생아에게 세례를 주었고 주교가 세례 후 예식(= 견진, 성체성사)을 하러 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세례 후)예식은 "전수(傳受), "안수", "크리스마", "인호" 등으로불리었다. 5세기 이후 견진(확정, 확인의 뜻)이라 불리었으니, 그것은 주교가 세례를 확인 한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서방교회는 안수를 견진의 본질적 의식으로) 여겼으며, 1972년까지(현재와는 다른) 기도문을 사용하였다. 동방교회에서는 도유를 견진의 본질적 의식으로 여겼다. 5세기 이래로 서방교회 안에서도 도유를 견진의 주요 예식으로 채택하였다. 현재 서방교회는 12세기 때 만들어진 기도문을 버리고 4~5세기 이래 사용되어 온 동방교회의 기도문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각 성사의 은총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더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자유를 주신 예를 명백히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손가락
우리는 하느님의 업적에 둘러싸여 있다. 하느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삼위는 완전한 일치를 이루신 가운데 일하신다. 하지만 신경(信經)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듯이, 삼위의 공동 행위는 결코 뒤섞이지 않는다. 즉, 성부께서 모든 것을 "시작하시고", 성부께로부터 파견된 성자가 "실현하며",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파견된 성령이 "완성한다".
이처럼 성부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말씀이신 아들을 통해서 하시며, 성령은 생명이 솟아나오게 하기 위해서 "물 위를 날아다니신다". 모든 것이 이처럼 이루어질 것이다. 전통적인 비유에 따르면, 성부는 힘과 운동이 나오는 팔이고, 성자는 행동으로 옮기는 손이며, 성령은 일을 완성시키는 손가락이다. 이처럼 3위는 한 분 하느님을 이루고, 항상 같이 움직이시며 같은일을 동등하게 하시되 다른 임무를 갖고 계시다. 즉, 성부는 계획하고, 성자는 실현하며 성령은 완성시킨다. 따라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행위를 "마무리짓는" 예술가이자 "손가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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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어린아이라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과 어른이라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이 있다.
_야마모토 사호, 정은서 옮김, [오카자키에게 바친다11 (미우, 201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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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다가온 잠잠한 마음은 오늘의 단어가 될 것이다. 그 단어들을 모아보면 그제서야 펼쳐지는 지난 이야기들이 있지 않을까. 그 이야기들을 책을대하듯이 어루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 또한아는 단어, 아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가 문득 멈추게 만드는 단어 하나가 있다면 읽기를 멈춰도 좋다. 대신 읽게 될 내 이야기가 내안에서 펼쳐질 때, 나는 나에게 숙인다. 책을 읽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순간 책은 그저 고마운 존재가 된다.

어떤 시작은 이야기의 한가운데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는 그 순간을만나기 위해 몰랐던 세계로 고개를 숙인다. 어쩌면 이야기는 내가 실제로겪은 일보다도 내 안에 선명하게 남을지도 모른다. 그 자국이 언젠가의 나를 만들기도 하면서, 우리의 어떤 면은 느지막이 자라나지 않을까. 그렇기에 오래오래 읽으며 지내고 싶다.

계속된다는 말은 반복된다는 말과 달라서, 계속되는 동안에 찾아오는 봄은 매번 다른 봄이다. 그렇지만 아름답다는 점에서는또 같고, 이런 아름다움에는 면역이 되지 않으므로 어김없이 감탄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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