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말할 필요 없는 권력자에 대한 우화다. 물론 엄석대 중심으로 읽으면 작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면면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겠고, 한병태 입장에서 읽으면 '어떻게 소시민은 폭력에 굴종하게 되는가?' 라는 명제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학교에서 일어나는 (한병태에 대한 엄석대의) 왕따, 그러니깐 집단따돌림의 수위가 실제 학교랑 비슷할.. 지도 모른다는 것은 덤. 혹은 실제 학교는 더 심할지도 모르겠다. 현실은 늘 소설보다 놀라운 법이라.. 이미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고, 대학 새내기때만 해도 괜스레 졸업했던 고등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보기도 하고 괜스레 수능컷[..]을 검색해보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거의 중고등학교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런 저런 일들이 많이 터져서.. 참으로 오랜만에 본 학생들에 관한 기사가 게임셧다운제였고, 그 다음으로 오랜만에 본 학생들의 기사가 집단따돌림에 대한 기사였으니.. 가해자들은 충분한 벌을 받았는가?

 

 

 

내가 봤던 글은 이런 표지가 아니었는데, 찾다보니깐 이 책이 제일 위에 있길래.. 황석영이 쓴 '아우를 위하여' 는 위의 책과 함께 많이 읽히는 책 중 하나다. 또한 마찬가지로 교과서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책이라고 짐작된다. 이 책의 줄거리는 누구나 다 알겠지만, 전체적으로 아우에 대한 편지글 형식을 이루고 있으며, 화자는 그와 그의 급우들이 병아리 선생, 그러니깐 교생 선생이 오면서 겪는 일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결말을 맺는다. '한 겨울에 걸인이 한 명 얼어죽어도 그것은 우리 탓이어야만 한다.' 라고. 사실 정말 끄적거리고 싶은 것은 내가 고등학교때 겪은 일이다. '아우를 위하여' 에서는 병아리 선생이 자기들 마음대로 휘둘러지지 않아서 영래패거리들이 병아리 선생이 잠깐 뒤돌아 본 사이에 욕을 하고 안보는 곳에서 음란한 글이나 낙서를 끄적거리는 모습이 나온다. 내가 고등학교때, 기간제 교사로 어린 여선생이 온 적이 있었는데 아이들에게는 그 여선생의 외모가 마음이 안들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그래도 젊은 여선생이니깐.. 잘 따르는 척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장난을 치고, 그게 선을 넘더니 칠판에 필기하려고 여선생이 뒤로 돈 틈을 타서 반에서 껄렁했던 학생이 일어나서 이상한 몸짓을 해보였던 적이 있다. 여선생도 여선생 나름대로 아이들이 자신을 잘 안따르는 것을 이윽고 알게 되었으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고, 나중에 학교를 떠나면서 그 여선생이 남긴 이메일 주소에 나는 그저 메일을 한 통 쓸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왜 나는 그때 그 아이를 말리지 못했던가? 지금이라면 주저없이 막아설테지만 그때는 변명같지만 나도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서 우리는 졸업해버렸고 아직도 나는 여전히 후회하고 있다.

 

 

 

이 책도 위의 두 책들과 함께 종종 언급이 되는 책이다. 내용도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만큼 유명한 책이고, 아마 위의 두 권을 보고 이 책이 따라나오리라는 것을 예상한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그런데 보통 이 책의 내용을 떠올려보라면 직접적인 폭력보다도 더 무서운 집단의 힘..과 관계된 내용으로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맞는 말이다. 저자도 그렇게 의도를 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에 '나는 무섭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물론 나는 집단의 광기에 대해서 항상 되새기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이런 경우에는 소설 첫머리에 폭력, 그리고 악으로 대변되는 '기표'와 그를 따르는 재수파가 정말 충분한 처벌을 받았는가, 에 솔직히 의문을 남기고 싶다. 그가 저지른 폭행과 도둑질, 심지어 윤간에 이르는 범죄들은 감옥에서 썩어야 정신을 차리지 않겠나, 싶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 그러나 변하였다면 그 변하기 전에 저지른 죄의 대가를 웃으면서 받아들여야만 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이런식으로 해석하면 권력층으로 그려지는 선생과 형우는 도리어 일종의 초법적 제재를 가한 셈이다. 재수파 나부랭이들에게 윤간당한 여학생으로는 통쾌할 따름이겠지만, 아니 통쾌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녀를 해꼬지한 나쁜 놈들이 도리어 매스컴을 타고 영웅시되니 말이다.

 

 

 

사랑하는 나의 연사들. 이 것이 옆의 No Image로 뜨는 책의 제목이다. 사실 정말 소개하고 싶은 책은 이 책인데 너무 오래된 책이라 절판이 된 듯 하다. 일종의 연작소설인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정인호라는 학생의 권력 투쟁기라고 할 수 있겠다. 학생인 이상 권력은 반장이 되는 것, 공부를 잘 하는 것, 싸움을 잘 하는 것. 특히나 반장이 되는 것이 일종의 권력의 상징인 모양이다. 저때는 그랬나요? 내가 학교를 다닐때에는 반장은.. 뭐, 물론 선생의 총애를 쫌 받을 수도 있었고, 받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여하튼 그렇다고 무슨 힘이 있지는 않았고... 솔직히 말하면 주먹질이 가장 큰 권력이었던 것 같다. 싸움 잘하는 거. 몰라, 특목고는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반학교는 평준화 지역이든 비평준화지역이든 사납고 싸움 잘하고 끼리끼리 잘 뭉치는 게[...] 최소한 따돌림은 안당하는 지름길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혹시나 이 글을 보는 고등학생이나 중학생들에게 싸움을 잘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ㅠ 그냥 그랬다는 이야기지만.. 아 슬프다. 이야기가 많이 샜는데 이전에 티비 프로그램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극진가라테를 익히는 고등학생을 인터뷰하는데, 아니 글쎄 그 고등학생이 한다는 이야기가, '싸움 잘하고 싶어서요' 일반인이라면 무도를 익혔을 경우 상해죄를 무도를 익히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배로 물게 되지만,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손 댈 방법이 없다. 소년원 2년이 최고 형벌이던가? 아니, 그 전에 너무 어릴때 무술같은거 심하게 익히면 뼈가 안자란다.

 

어, 그런데 권력 중 돈의 힘이 없네? 그렇다. 우리의 주인공 정인호는 가난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항상 절대 지면 안된다, 라는 사고를 강박적으로 주입했던 것이고.. 그래서 정인호는 가상의 토끼(아이들에게 줄 뇌물)와 비행기 조종사라고 주장하는 자신의 아버지(실제로는 거의 백수다)를 내세워 아이들에게 신망을 얻으려 하고, 반장선거에서 이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 결말은 비참하였으니, 아이들은 실제로 토끼를 보지 못하여 불만에 가득 차 있다가 결국 쿠데타를 일으켜 정인호를 나락으로 빠뜨린다. 그리고 나중에 정인호가 자라서 자신의 딸을 키우게 되는데, 아니 이 딸래미도 자신이랑 비슷하게 반장 선거, 아니 권력욕을 보이는 거 있지.

 

그런데 여기서 지켜보아야 할 점은 저렇게 권력욕을 가지고 있는 정인호가 나쁘게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담임은 가난뱅이인 주인공을 별로 좋게 보지 않으며(주인공의 시점으로 쓰여지기에 어쩌면 편견일 수 있겠지만) 반 급우 중 하나인 식당집 아들래미와 뒷거래가 있었고(엄밀히 말하면 아들래미보다는 식당 주인과 커넥션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 그 결과 정인호를 다시금 좌절시킨다. 아무리 잘해도 성공할 수 없는 이 더러운 세상! 인맥과 돈이 정녕 짱인것인가?

 

결국 주인공은 방관자로 남게 된다. 그래, 세상은 이렇게 날뛰어봤자 되는 놈들만 되는 거야, 라는 냉소주의와 소시민적인 생각을 가지고 말이지. 그러나 그 소시민적 생각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일단 나는 살아야지, 라는 저 말이 정말로 '살고 싶어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이런 소시민적 무사안일주의를 조세희는 일갈한다. '여러분은 비겁자의 자식이다!' 최근 있었던 강연에서 한 이야기이다. 물론 나는 그 강연을 듣지 못했고 인터넷으로 기사를 찾아 읽었을 뿐이지만. 난쏘공은 그런 냉소에 찬 이들을 일깨우기 위해서 아직도 쇄를 거듭해 발행되고 있다. 나온지 정말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지금 여기' 에서 읽히고 있는 이 책의 힘이란. 처음 이 책을 내가 접했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고,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느낀 감정은.. 이거 은근히 야한데? 정도 였다, 젠장. 그렇다. 이 책은 은근히 야했다. 빨간 커튼이 처진 호텔로 데려간다거나 손을 뻗어 여학생의 가슴을 만진다거나 바스락거리는 원피스를 벗고 안아준다거나 등등..(어떻게 이런 것들은 토시 하나 안틀리고 다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넘어서고 나중에 다시 읽은 이 책은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교과서적인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두 개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소설의 마무리에서 결국 난장이네 삼형제 중 큰 형 영수는 은강그룹의 총수를 죽이려다가 총수의 동생을 죽인다. '짧은 시간의 즉사였기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못했'을 만큼 편안한 죽음을 선사한 영수는 '우발적 살의로 결행한 것이 아니라' 결국 사형장으로 끌려나가고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살인은 어느 때든 잘못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수가 형장으로 끌려나갔다는 점에 대해서는 더 덧붙일 말이 없으리라. 그러나 이런 개인적 영역의 살인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살인이 자행되고 있다면, 그런 죄는 어떻게 물어야 할 것인가? 영수의 총수의 동생에 대한 살인이 그 살인 행위 자체만 놓고 보았을 때 개인적 차원의 살인이라면, 영수가 이윽고 형장에서 당하는 죽음은 제도와 기업 그리고 사회 환경이 몰아넣은 사회적 영역의 살인일 것이다. 사실 위의 에피소드에서 사회와 개인은 깊게 얽매여있어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리고 사회적 영역의 살인이 영수에게만 일어난 것도 아닐터이고, 이윽고 생활비가 부족하여 거리로 쫓겨나 죽는 경우도 예로 들 수 있으리라. 여기서 우리는 '아우를 위하여' 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게 된다. '거리의 걸인이 얼어죽더라도 그것은 우리 탓이어야 한다' 우리는 사회적 살인죄를 단일한 대상에 묻기는 어렵다. 어쩌면 우리들 자신도 사회적 살인에 방조자로서 가담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묻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죄를 씻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그 죄의 사함은 우리가 '잊지 않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리라. 하지만 살아가기도 바쁜 우리인데 그런게 가능할까? 조세희는 최근 강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런 냉소는 버리라고, 그저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고.

 

 

 

p. s. 글 쓰고 있는 동안 위로가 되어준 버스커 버스커의 동경소녀에 심심한 감사를..

p. s. 2. 몇 권 더 있겠지만 너무 졸려서 여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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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7-27 23:00   좋아요 0 | URL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소설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모르겠네요 예전에 영화를 보기는 했어요 '우상의 눈물'도 제목은 아는데, 읽지는 않은 것 같군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읽어봤습니다(지금은 난쟁이가 맞죠 하지만 예전에 나왔고 그때는 이 말을 썼기 때문에 그대로 두는 게 낫겠죠) 오래전이라 생각나지 않지만... 이 책이 그랬던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그런데 가연 님 아주 일찍 이 책을 알았군요 저는 중, 고등학교 다닐 때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그때 책을 읽었다면 비어있던 마음을 채울 수 있었을지도... 하지만 지금 책을 읽어도 이것은 달라지지 않는군요 어쩌면 마음에 조금 빈 곳이 있는 게 나을지도... 그러고 보니 꽉 찬 느낌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군요


희선

가연 2013-07-31 18:05   좋아요 0 | URL
빨리 읽으면 좋은 점들이 조금은 있어요, 풋, 예전에 읽었던 감정과 지금 읽었던 감정을 다시금 비교할수가 있어서
 
불온한 신화 읽기 - 바가바드기타는 인도를 어떻게 신비화하였는가
박효엽 지음 / 글항아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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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신화 읽기.

 

 

 

 

 

[가연] 오늘 이렇게 나와 주신 크리슈나님과 아르주나씨, 반갑습니다. 무신론자나 다름없는 사람이 만나자고 하였으니 어려운 발걸음이셨을 텐데 개의치 않고 이렇게 대담장소에 나와 주시니 그 그릇의 크기를 짐작하겠습니다, 하하.

 

 

[아르주나] 그런데 저는 왜 ‘씨’ 입니까?

 

 

[가연] 하하, 크리슈나님은 아무래도 신이시니깐.. 아르주나씨도 아르주나님으로 부르는게 좋을까요?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르주나] (크리슈나를 힐끗 쳐다보다가) 아니 뭐.. 제가 감히 신과 같은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지요.

 

 

[크리슈나]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짓는다) 그나저나 이렇게 부른 이유가 뭔가요? 만약 오라고 해서 오고 가라고 해서 갈 거라고 생각해서 그냥 불러본 거라면 신을 만만히 여긴 죄를 물어야겠지만..

 

 

[가연] (당황해서) 아니, 그게 아니라, 바로 말씀드리면, 최근에 어느 책을 읽었는데, 그게, 음.. 그 책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딱히, 음.. 나눌 사람이 없어서...

 

 

[아르주나] 그 책이라 함은 혹시 ‘마하바라타’ 라는 이름이 붙은 것을 뜻하는 것인가요? 저도 그 글들을 봤는데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정말 기억력이 대단한 것 같던데. 어떻게 그 많은 대사들을 다 기억하고 썼는지..

 

 

[가연] 아하하.. 음, 그 마하바라타에서 가장 중심되는 부분이라고 일컫어지는 부분을 해설한 책인데 말입니다, 읽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느껴져서 말이지요. 그러니깐 크리슈나님께서 아르주나씨를 설득하는 장면말입니다.

 

 

[크리슈나] 아, 그거.. 그거 정말 힘들었었다네.

 

 

[아르주나]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을.. 그렇게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크리슈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르주나를 설득시키느라 정말 다른 신들도 보기 힘든 무장을 다 갖추고 패션쇼를 한 게 아닌가. 정말 내가 왜 그랬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네.

 

 

[가연] 패션쇼.. 크리슈나님께서는 현대 용어에도 익숙하시네요.

 

 

[크리슈나] (머쓱한 표정으로) 일단은 나도 신이니깐 말이지. 화신이라고 해도 말야, 최고신 비슈누의 화신이잖나. 내가 8번째였나? 여하튼 여러 차원에 걸쳐서 존재하는 나를 그대의 좁은 식견으로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되지.

 

 

[가연] 아,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여쭤본다면 말이죠, 그.. 역사가들이 그러는데 최고신 비슈누신의 7번째 화신인 라마찬드라님과 생존기간이 겹친다고 하던데 말이죠.. 그럼 비슈누님은 7번째 화신 기간이 다 끝나기 전에 8번째 화신을 또 나투신 건가요?

 

 

[크리슈나] 틀렸네, 이 사람아. 6번째 화신이 아마도 파라슈라마라는 친구였을거야. 그 친구랑 라마찬드라랑 생존기간이 겹치지. 파라슈라마 그 친구가 성격도 참 대단하고 사는 것도 참 오래 살았지, 아마. 그리고 좀 더 부연하자면 말이지, 화신이 꼭 한 시대에 하나, 라는 말도 어이없는 거지. 누가 그렇게 정했나? 그대가 비슈누인가? 비슈누의 뜻을 그 누가 짐작하겠는가? 화신은 그 자체로 신이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인생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존재야. 그것과 궤를 달리할 화신은 앞으로 다가올 화신인 칼키외에는 없으니. 그러니 말이네, 나는 신이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이며 그리고 화살에 맞아 죽은 생명이라네. 그 점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기를 바라네.

 

 

[가연] 아,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사실 ‘불온한 신화 읽기’ 라는 책을 읽었는데 말입니다. 그 책에서 다루는 내용이 바로 크리슈나님과 아르주나씨의 대화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부분만 떼서 바가바드 기타, 라고 부른다던데 말입니다. (아르주나를 쳐다보면서) 혹시 읽어보셨을까요? 아무래도 본인들 이야기라서 흥미가 갈 듯도 한데..

 

 

[아르주나] 마하바라타를 읽을 때 그 부분도 같이 읽기는 했는데 뭐, 기억력이 참 대단하군, 누가 적었는지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세하게 적기는 했지만..

 

 

[가연] 했지만..?

 

 

[아르주나] 솔직히 말하면 내가 정말 이런 말들을 했는지 잘 기억도 안 나고, 왜 그 대화가 인기를 끄는가, 그 부분도 잘 모르겠네요. 인간이 신에게 가르침을 받는 게 이상한건가요?

 

 

[가연] 아니, 인간이 신에게 가르침을 받는 게 너무나 당연하니깐.. 그 지혜를 좀 나눠주십사, 하고 인간들이 달라붙는 거지요. 그 때 당시를 지금 회상해달라고 부탁드리면 어려운 부탁이겠습니까?

 

 

[아르주나]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지요. (신파조로) 당시 저는 참 힘든 상황에 빠져있었습니다. 대충 상황은 아시죠? 큰 형이 도박에 져서 패가망신하고 집날려먹고 나라날려먹고.. 여하튼 떠돌다가 13년이 지난 후 돌아와서 100명의 사촌들, 그러니깐 카우라바 형제들이랑 싸우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여튼 도박은 나쁜 거지요. 그런데 여기서 이제 카우라바 형제들이랑 싸울 상황이 되니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여기서 싸운다면 사촌들과 싸우는 거구, 싸우지 않겠다고 하면 이제 내 목숨을 가져다 바치는 꼴이니, 어떻게 해야 되는가..

 

 

[크리슈나] (말을 끊으며) 그래서 아르주나가 이제 궁상을 떠는 거지. 여기서 싸워서 사촌의 목을 베고 적을 싸그리 죽이면 이제 남자들이 별로 없으니 여자들 밖에 안 남을테니 그러면 결혼하려면 남자를 어디서 구하겠는가? 아래 계층 남자들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면 자연스럽게 베다의 가르침은 깨지고 카스트는 무너지고. 그야말로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가 무너지는 일을 겪게 될 거 아닌가. 그걸로 끙끙 앓고 있었다네. 그래서 내가 한 마디 해줬지.

 

 

[가연] 뭐라고 하셨나요?

 

 

[크리슈나] 내버려두라고.

 

 

[가연] 네?

 

 

[크리슈나] 너무 어렵게 말했나? 그냥 내버려두라고, 그런 문제는. 물론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도 물론 중요하지. 중요해. 그러나 그런 것은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그대에게는 그대가 가진 의무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네가 할 일은 자명한 거지. 지금 여기서 네가 하여야 하는 행위 그 자체에만 집중해라.

 

 

[가연] (불쑥 끼어들며) 세 가지 요가, 지혜의 요가와 사랑의 요가, 행위의 요가 중 행위의 요가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크리슈나] (불쾌한 기색 없이) 그렇지. 네가 본 책 ‘불온한 신화 읽기’ 에는 이렇게 나와 있을걸, 아마? 제어할 수 없는 것은 제어할 수 없는 것이고,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제어할 수 있는 거라고 말이네. 사실 무의미한 살인을 하지 말라, 라는 가르침은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말이야. 그런데 저기 저 뚱하게 있는 아르주나는 전사계급이잖는가. 전사계급이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적과 맞서 싸워 그들의 수급을 취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에 사촌이 아니라 그냥 적이었다면 그대로 가서 활로 다 공격하지 않았겠는가. 저기 등에 멘 간디바 들고 말이지. 이렇게 보편적인 가르침과 계급의 의무가 상충될 때 그대가 먼저 취해야 할 것은 계급의 의무이니, 나에 대한, 그러니깐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 스스로 행해야 할 바를 다 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의무이다, 라는 이야기를 했지. 그대는 다르마dharma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가연] 네.. 조금...

 

 

[크리슈나] 그래, 바로 그 다르마야. 모두가 자신에게 맞는 다르마가 있는 법이지.

 

 

[가연] 그러나 아르주나씨가 꼭 잘못했다고는 할 수 없지 않나요? 당돌한 제 말투를 용서해주세요, 허나 저는 개인적으로 판다바 형제들이 카우라바 형제들에 비해서 정말 도덕적으로 더 우월한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아르주나씨의 큰 형인 유디슈티라가 주사위 도박을 별로 안했으면 나라를 안 빼앗겼을거잖아요. (아르주나가 살짝 쏘아보지만 이내 시선을 거둔다) 카우라바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맏형인 두리오다나에게 별 별 나쁜 점들을 다 뒤집어 씌어놓았지만 정말 나쁘다, 라고 여겨질 만한 것은 주사위 도박에서 고귀한 왕비의 옷을 벗기려 들었다는 것 정도 외에는 특별히 없지 않을까요? 게다가 두리오다나 입장에서도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자신의 손아귀에 권력이 다 들어왔는데 그냥 놓아줘야 된다니. 물론 저 개인적으로는 권력욕이란 독버섯같은 거 아니겠는가, 생각해봅니다만. 무엇보다도 마하바라타 전체에서 상당히 이상한 점은 카르나의 존재이지요. 태어나자마자 버려지고 그 후 별의 별 저주를 다 받으면서도 저기 저 아르주나와 대등하게 싸웠다가 끝내 목숨을 잃었지만, 카르나가 고결한 인물이 아니라고 부정하기란 쉽지 않지요. 그런 인물도 아무렇지도 않게 죽는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요?

 

 

[크리슈나] (신비로운 미소를 짓는다) 아르주나에게 물어보지. 아르주나,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아르주나] 크리슈나여,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저는 당신의 결정을 따를 것입니다. 그대를 경배하고 그대를 숭배할 것이니 그대에게 완전히 흡수됨으로서 궁극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크리슈나] 옳다, 아르주나여. 전쟁과 평화는 모두 나의 손에 달려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그대에게 찾아올 것이다. 그래서 그대에게 말하노니 행위의 결과를 받아들이나 그 행위에 집중할지어다. 그리고 해야 할 의무에 충실할 것이다.

 

 

[가연] 어.. 어리석은 저의 생각으로 말씀드리는데 여하튼 크리슈나님을 믿는 쪽이 선이고 믿지 않으면 악이라는 말인가요? 아니면 제가 잘 이해를 못한 건가요? 하긴 두리오다나는 끝까지 크리슈나님을 보통 인간으로 여겼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일종의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감히 말하건데 독선이 아닐까요?

 

 

[크리슈나] 그렇지 않다. 나는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네. 다시 말하자면 일종의 회색이지. 좀더 부연 설명이 필요하겠지? 회색이라는 색깔은 흰색과 검은색이 섞여서, 다시 말하자면 선과 악이 섞여서 탄생한 색깔이야. 물론 여기 있는 이 아르주나와 같은 판다바 형제들이 선으로 보이고 카우라바 형제들이 악으로 보일 수 있겠지, 그러나 선 속에서도 악이 있고 악 속에서도 선이 있다네. 또한 악 처럼 보이는데도 선인 경우가 있다네. 마찬가지로 선 처럼 보이는데도 악인 경우도 있고 말이네. 모두 주어진 본성이라는 것이 있어, 그 본성에 충실하라는 이야기네. 두리오다나의 예를 들었는가? 두리오다나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네. 그는 죽을 때까지 어리석었으나 올곧기까지 한 그 어리석음으로 인해 이윽고 신들에게 꽃을 선사받지 않았는가. 두리오다나가 죽을 때 어찌했던가? 그의 용맹을 당해내지 못했던 판다바 형제는 크샤트리아의 법도를 어기고 하체를 공격하지 않았나? 이는 선 속에 악이 있는 예이지. 그리고 선 속에서 악 처럼 보이는 경우를 들라고 한다면 바로 이 나, 크리슈나가 이런 저런 잔머리를 부린 것도 해당되겠지. 그러나 그것이 악인가? 그렇지 않다네. 누구에게나 의무가 있고 그 의무를 다해야 하는 법이라네. 

 

[가연] ... 어리석은 인간입니다만, 하나 꼭 질문하고 싶었던 것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중에 ‘머슴 예멜리안과 빈 북’ 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아르주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거기서 성당을 지으라고 왕이 예멜리안에게 시킵니다. 예멜리안의 예쁜 아내를 빼앗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도저히 왕이 정한 기한 내에는 성당을 완성시킬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실의에 빠진 예멜리안에게 그의 아내가 말합니다.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하지 말고 지금 하는 일만 생각하라’ 고 말입니다. 예멜리안은 아내의 말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결국에는 성당을 다 쌓고 말지요. 크리슈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이 단편에서 나오는 아내가 이야기하는 바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크리슈나] 진리는 어떠한 모습으로든 반복될 수 있는 법이지. 그리고 그 진리의 과실을 베어 물 수 있는 사람이 꼭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니 이상할 것 없다.

 

 

[가연] 그런데 이런 식의 사고는 일종의 임시방편이 아닐까요? 제가 읽은 책 ‘불온한 신화 읽기에서는 이층의 사유를 들어서 이야기하는데, 간단히 말하면 상대적으로 덜 고결한 목표인 ‘일층’에 해당되는 것은 고결한 ‘이층’에 의하여 억제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비유를 하기를 마치 이층의 링거를 버텨나가는 일층의 삶, 이라고 이야기하더군요. 모두에게 예멜리안의 아내와 같은 안사람이 존재할 수 없으며 모두에게 신이 존재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스스로 설파하셨다시피 크리슈나님은 이미 전쟁의 향방이 어디로 향할지 모두 알고 있으며, ‘그대가 승리할 것이다’ 라고 아르주나씨에게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 우리와 같은 일반 사람들은 설령 나쁜 결과가 예상될지라도 그저 그 길을 걸어나가야만, 행위에 집중을 해야 하는 것인가요?

 

 

[아르주나] 그 말은 그릅니다. 방금 예시로 든 단편에서는, 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예멜리안이라는 사람이 이윽고 성공한 까닭은 아내에 대한 믿음 때문이겠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자식이 부모를 대하듯, 애인이 애인을 대하듯 크리슈나님을 믿고 오롯히 따릅니다.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으면서 그저 구조만 빌린 채 크리슈나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그대는 비슈누신을 믿습니까? 아니겠지요. 그대가 믿는 존재는 어떠한 존재입니까? 믿는 존재가 있기는 있습니까? 그대가 아무 것도 믿지 않고 두 발로 대지를 딛는 오만함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대 나름의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행위의 요가의 중요성을 훼손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대가 믿든 믿지 않든 그대의 인식 저편에서는 위대한 신들이 있고 위대한 베다의 가르침이 있으며, 그대를 옳아매는 운명이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운명을 그대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그대의 진실된 자아는 알고 있을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육체에게 주어진 길은 그저 그대의 육체가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일 뿐이겠지요. 이것이 바로 행위를 하면서 체념을 하는 것입니다.

 

 

[가연] 중세의 칼뱅이나 할 법한 소리군요. 아르주나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페르시아 신화가 문득 떠오릅니다. 위대한 영웅 루스탐은 칠난도를 거쳐 영광을 쟁취했지만 이윽고 자신의 아들 소라브와 맞서 싸우고 끝내 칼로 소라브의 심장을 찌릅니다. 하지만 신들의 무심함이었는지, 혹은 축복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죽는 그 순간 소라브는 모든 것을 알게 되고 루스탐에게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루스탐은 비탄에 젖어서 소라브를 살리기 위해서 페르시아 곳곳을 떠돌아다녔지요. 그들 뿐만이 아니라 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모든 존재들, 그 용력과 지력이 하늘을 뒤덮던 영웅들과 신의 사자나 다름없던 신수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개인의 삶이라는 것은 그 위대한 섭리 앞에서 그저 발버둥 치는 것에 다름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의 말대로라면 당신과 크리슈나님이 나눈 대화는 신에게 순응하는 사람을 찍어내는 틀에 지나지 않지요. 게다가 크리슈나님도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처럼 들립니다. 방금 말씀하셨던 선과 악에 관한 이야기에서 크리슈나님은 본인이 계략을 쓴 이야기를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악이 아니니, 그 까닭은 모두가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의 화신이신 크리슈나님조차 의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의무는 일종의 운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대가 말하는 ‘행위를 하면서 체념한다’ 는 것이 저에게는 그렇게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 결과 지금의 인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카스트라는 틀에 묶여서 발전을 저해당하고 있지요. 죽을 때까지 그 카스트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은 후에도 속박되는 그 끔찍한 것에서 말입니다. 공덕을 다 하면 상위 카스트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합니다만, 정말 그런지 현실의 삶이 중요한 저 같은 세속적 인간으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이군요. 그럼에도 크리슈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교과서적인 이야기뿐이지 않습니까. 나를 믿어라. 그리고 적을 섬멸해라. 그대가 죽이는 것은 육체요, 불멸의 영혼은 해를 입지 아니하니. 이런 식의 구원은 저기 저 서양의 유일신 종교에서도 보이는 모습이지요.

 

 

[크리슈나] (다시 신비로운 미소를 짓는다) 아마 더 이야기를 해도 팽팽히 대립각만 세울 것 같구먼. 헛수고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왕 이렇게 대화에 참여한 김에 그대의 이해를 위해서 몇 가지 개념을 설명하도록 하지. 사람에게는 영원한 자아, 즉 푸루샤Purusa가 있고 또한 물질인 프라크르티Prakrti가 있다네. 그런데 여기서 프라크르티는 특이한 것이야. 푸루샤를 제외한 세계의 모든 일체가 그 안에 내재되 있음이니. 이는 모든 가능성을 내포한 것으로 일컫어지네. 이 말은 그로부터 모든 것이 발전되어 나오는 것을 말하며, 이윽고 결과가 원인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이야기이지. 모든 질료적인 것의 원인이라고 들 수 있겠지. 방금 전 아르주나가 이야기하면서 특별히 진실된 자아와 육체를 구별하면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행위를 하면서 체념한다’ 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네. 그대의 모든 물질적 행위는 그대의 물질적 자아가 하는 일이고, 그대의 진실된 자아는 행위에 개입하지 않으며 관조자로 남아야 된다는 이야기라네. 그렇다면 이런 물질적 자아와 진실된 자아는 어떻게 구별가능한가? 앞서 말한 저 두 가지 개념 푸루샤와 프라크르티에 대한 흔들림 없는 지식으로 가능한 것이지. 이것이 앞서 그대가 말했던 세 가지 요가 중 지혜의 요가이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사랑의 요가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이미 아까부터 계속 말해왔지만 그대가 귀를 막아버린 다른 한 방법으로 가능하네. 신을 믿고 경배하는 것, 그대의 모든 행위가 신에게 바치는 헌신이 되는 것이며, 이로서 그대는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불멸의 영혼이 해를 입지 않는 까닭은 다르마를 따라 사는 이의 진실된 자아가 신에게 헌신하는 까닭이요, 행위를 관조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대가 카스트 제도의 실상을 말했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체념적 행위를 통하여 위로는 브라만부터 아래로는 수드라까지 모두가 나에게 이르는 길이 열린 것이라네.

 

 

[가연] (멍하니 크리슈나를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리며) 아무래도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겠습니다. 생각보다 말씀들이 너무 어려워져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현대 인도에 관한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요즘 인도를 보면 꼭 영적인 편의점 같습니다. 제가 사는 나라의 어느 학자가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 라는 책을 펴내면서 이야기한 내용인데요, 우리가 보통 인도를 생각하면 신비로움과 이국적인 느낌을 먼저 받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이국적인 느낌은 여러 창작물들을 통해서, 혹은 입소문을 통해서 재생산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인물들이 인도에 고생고생하며 찾아가서 구루들의 아쉬람에다가 돈을 바치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말이지요. 지금 제가 들고 있는 이 책 ‘불온한 신화 읽기’ 에서도 마찬가지 지적을 합니다. 그들의 삶의 품격이 오를 것처럼 이야기를 하면서 이득을 뒤에서 챙기는 모습은 본래의 목적과는 상당히 멀어 보입니다만. 마하바라타와 같은 경전도 이렇게 쓰이는 경우도 종종 있을 수 있을 터인데, 사실 이럴 때 가장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잘못이다, 라는 것이겠지만 혹시 이 외에 고견들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크리슈나] 사실 바가바드 기타가 쓰여 진지 오래되었고, 그래서 현대와 안 맞는 부분이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겠지. 게다가 신성시되다보니깐 그 내용에서 조금만 어긋나도 이상하게 여기며 바라보게 되니 안 맞는 부분을 그대로 고집하게 될 테고 말이니.

 

[아르주나] 아까 말했지요, 정말 제가 이런 말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이죠. 사실 이 마하바라타가 일종의 짜깁기일지도 모르지요. 그동안 전해 내려오던 저나 크리슈나님과 같은 분들의 자료를 모아서 말입니다. 당연히 일관성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겠고.

 

 

[가연] 고견 감사합니다. 대화 도중 무례하게 말씀드린 게 있다면 용서해주시길, 하하. 많이 부족한 저를 인내를 가지고 상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p. s. 톨스토이 단편선 '머슴 예멜리안과 빈 북' , '페르시아 신화',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이옥순), '지구별 여행자(류시화)', '인도철학사(길희성) : 특히 크리슈나가 말하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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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님하의 선택이라고 해봤자 제목 짓기기 힘들어서.. 아무 말이나 가져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

뭔가 체계적인 이름이 있으면 앞으로 페이퍼 끄적거릴 때 훨씬 마음에 들텐데.. 그런게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별 별 이상한 이름들을 다 끄적이게 될 것만 같다.

 

그러고보니 꼭 가연's choice라고 하니깐 댓글에 임요환! 이라고 달릴 것 같지만..

 

죄송해요, 전 남자에요...

뭐, 내가 서재 활동이 활발했다면, 그리고 저 농담을 이해할 분이 있다면, 의 가정이겠지만...

 

또 제멋대로 책들을 나열해본다.

 

 

 

책을 읽으면서 배고프다는 것을 느낀 적을 꼽아보라면, 무라키미 하루키의 수필을 읽으면서, 라고 말하겠다. 수필 중에 즐겨 찾는 근처 식당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식당에서는 고로케를 주력으로 판매한단다. 그런데 그 고로케의 맛에 대한, 그러니깐 고로케의 외양에서부터 시작해서 (고로케의 황금빛 튀김옷부터) 그 향미는 어떻고 (코로 느껴지는 어쩌고~) 한 입 베어물었을때 그 식감은 어땠으며 이윽고 목으로 넘어가는 감촉까지 (술이냐!) 게다가 고로케 뿐만 아니라 가끔 재료가 떨어져서 주인이 자신이 먹는 것 처럼 된장국 이런 것으로 대접한다는데 그게 또 별미라던가. 고로케를 좋아하는 나로써는 저 수필을 읽는데 정말 환장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사실 이 책 '부드러운 양상추' 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저 절륜한 음식 묘사솜씨에 비하면 뭐랄까 약간 방향이 다른 편이다. 그녀의 일상과 소개하는 음식은 관계가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입맛을 다실 수 있다거나 하는 기회는 사실 적을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별로 입맛을 다시지 못했으니깐. 혹은 내가 너무 요리왕 비룡식의 아니, 한 입 베어물었더니 (이때 좋을 호(好)가 배경을 수놓으며 징소리가 들린다, 띵호야!) 천국이 보이네 등과 같은 묘사에 익숙해져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야. 하지만 방향이 다르다는 것이 그녀의 푸드 에세이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마치 요리로 비교하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고로케 이야기는 말 그대로 맛있고 뒷맛도 끝까지 남는 그런 튀김 요리를 먹는 것 같다면 이 에쿠니 가오리의 책은 샐러드에 그저 오리엔탈 드레싱을 뿌린 뒤, (사실 그냥 간장을 뿌린 뒤) 그 식감을 맛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뒷맛은 개운하고 더 땡기지 않는다.

이로서 좋다.

 

 

 

우리 나라 작가가 쓴 푸드 에세이, 아니 음식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고보면 이 책이 신간평가단 추천 도서였던가? 우스꽝스러운 그림과 함께 하는 이 에세이는 성석제의 필력에 더해져 맛깔나는 음식 이야기를 전해준다.. 고 쓰고 싶은데 한 편으로는 꼭 만화 식객을 글로 옮겼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해서 좀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뭐, 사실 성석제의 창의력은 대장이라고 생각한다. 단편 중에 웃음소리와 비명소리만으로 소설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조금, 그러니깐 쪼끔 많이 감탄했다. 그런데 에세이라는 것이 대단히 뛰어난 창의성이 필요한 거라고는 나는 생각하기가 어렵다. 그러니깐 아무래도 이 장르에서는 그의 장기가 잘 드러나보이지는 않는다. 아 물론 필력은 좋으니깐 읽기야 좋지만, 이런 류의 에세이는 위의 일상에서나 마트에서나 음식을 구입하는(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위의 '부드러운 양상추'와는 달라서 이왕 우리 나라 방방 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이야기할거라면 아무래도 소개를 하고 그 음식의 연원을 따져서 주루루루루룩 이야기를 늘어놓는게 좋을테니깐.. 그런 의미에서 음식 이야기는 황구라 황석영이 쓰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본다. 어쨌든 하나는 기억에 남는다. '우리 집은 절대로 조미료 안써요', 조미료 쓴다고 주장하는 맛집이 어디있겠는가!

 

 

 

아직 저녁을 안먹고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나로서는 어쩌다보니 스스로 고문아닌 고문을 자청하게 되었다. 왜 음식 책들만 이렇게 끄적거리고 있는거지? 어쨌든 음식관련 도서의 최고봉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식객을 들겠다. 만화라서 더 마음에 들.. 지도 모르겠지만, 에이잇, 원래 내용은 전달되는게 중요한거다. 식객은 사실 인터넷에 연재될때부터 상당한 팬이었고 영화도 봤었는데(영화는 좀...) 그래서 그런지 상당히 주관적으로 끄적거리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아직 안 본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 손에 꼭 쥐어주고 싶은 책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옻순에 관련된 것이었는데, 자라나는 옻순을 따다가 참기름에 섞어서 입에 살짝 넣을때 나도 같이 침을 삼켰다. 사실 후반에 가면 진수와 성찬 두 주인공의 러브 스토리에 더 초점을 맞추어 보게 되었지만.. 정말 징글징글하게 결혼 안하더라, 그쵸?

 

 

 

 

 

이 책도 빼놓을 수 없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그 책! 심야식당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사실 드라마 심야식당을 먼저 접해서 보아왔는데, 정말.. 보고 감동과 배고픔의 도가니에 빠져서 참 곤란해했던 적이 있다. 감동적인데 배가 고프다니.. 얼핏 보면 양가적인 감정같은데 참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보면 드라마판의 인물들은 정말 인물들의 개성이 딱 맞는 배역이 정해진 것 같다. 맨날 밤에 문을 여는 식당의 주인 '마스터' (코바야시 카오루)에서부터 식당 한 구석에 틀어박혀서 콩을 이상한 모양으로 늘어놓는다던가 하면서 '인생 얕보지 말라구!' 라고 툭 던지는 '카타기리' (오다기리 죠) 까지. 어쩌다보니 책 이야기가 아니라 드라마 이야기가 길어지게 되었지만.. 뭐, 그래도 좋다. 아, 저 카타기리는 만화책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나저나 저 마스터는 너무 음식을 잘 만든다. 재료만 있다면 샥스핀도 만들겠는데. 저런 마스터가 하는 식당이 있다면 살찔 위험을 각오하고서라도 아무래도 매일 밤마다 들르지 않을까, 나는 술은 안마시니깐 그저 사이다로 대신 건배하면서. 개인적으로 심야식당 드라마와 만화 통틀어 가장 맛있게 보였던 음식은 가츠동, 그러니깐 돈까스 덮밥. 저 에피소드를 보고 그 다음날 바로 뛰어가서 한X 도시락의 돈까스 덮밥을 주문했다는 것은 비밀, 그런데 젠장, 의외로 맛있잖아! 라는 건 더 비밀.

 

아, 한마디만 더 하자면, 이 책의 저자 아베 야로는 43세에 이 심야식당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데뷔했다. 그 전까지는 무슨 대리점에서 일하면서 부정기적으로 만화를 그렸다는데, 그 만화들이 모조리 퇴짜맞다가, 요리만화같은게 땜빵용으로 필요하다는 이야기에 그리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심야식당.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일화다.

 

 

 

아무래도 음식 이야기들을 적어놓으니 다른 책을 더 쓰지를 못하겠다.

그러니까 언젠가 이 시간에 또 만나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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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으아.. 약간 뻘줌하네요, 풋. 저는 하루 이틀 더 걸릴 줄 알고..

아래에 책들을 대충 끄적거렸는데.. 오늘 포스팅을 또하려니깐...

이건 잡담인데..

임재범의 고해 Live영상을 듣는데 와.. 정말 대단하더군요.

솔직히 박완규가 부른 고해는 약간.. 제 취향은 아니었답니다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입니다. 더 말을 붙이기조차 어색할 정도로 유명한 고전이라서 더 이야기할만한 것이 없겠습니다만.. 고전이란 사실 누구나 이름을 대면 알만한 책이지만 정작 그 내용은 읽어보지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인 책을 가리키지요. 저 또한 이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고, 그저 2차 저작으로 인용된 부분들만을 읽어보았습니다만, 그렇게 짧게 인용된 부분만으로도 저자의 통찰력이 잘 드러나보였습니다. 단순히 환경 오염에 관한 생각이 아니라 환경 오염에서 보여주는 과학의 발전에 대한 인간의 믿음에 대한 통찰은 아무나 쉽게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아니지요. 그러고보면 누구나 새해가 시작되면서 한 가지씩 올해는 무엇을 해야겠다, 라고 다짐을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개인적 차원 뿐만이 아니라 국가적, 아니 전세계적 차원에서 새해에 대한 어떤 다짐이 있을 수 있다면, 감히 제언하건데 이 책과 더불어 환경 오염에 신경을 쓰는 것은 어떠할까요.

 

 

리처드 도킨스의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그는 종교를 매우 싫어합니다. 그는 종교는 일종의 기생 밈이며, 종교는 그 신자에게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를 바탕으로 딛고 일어서 크기를 불려간다고 주장하며, 더 나아가서 일종의 바이러스에 지나지 않는다고까지 말을 하지요. 사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거의) 무신론자에 가까운 저조차 질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도킨스의 논의가 아예 무의미하냐면 그것은 또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사실 그의 말대로 착한 사람은 어차피 착한 일을 하겠지만, 착한 사람이 나쁜 일을 하게 되는 것에는 거의 종교가 관여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입니다. 여기 도킨스의 주장을 인문학적으로 지원사격해주는 저서가 있습니다. 이전에 발간되었던 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책인데, 이번에 새롭게 개정되어서 나온 듯 합니다. 그래도 신은 없다, 라고 제목을 붙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걸까요?

 

 

플라톤에 대해서 생각나는 것을 이야기해보라면 아틀란티스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는 '향연'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못지않게 플라톤은 여러 저서들을 많이 남겼지요. 이 고르기아스도 그런 저서들 중 하나입니다. 플라톤의 저술 방식을 보면 상당히 특이한데, 마치 한편의 연극 대본을 보듯이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사실 이는 '대화' 편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전집으로 묶여있는 책들이긴 합니다만) 그런데 이런 식의 저술이 결코 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어려운 개념을 설명할때는 마치 그 인물의 육성을 듣듯이 이런 식으로 저술되어있는 것이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지요. 다른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상대방을 몰아붙이는 방식을 가만히 보면 그리스 철학의 자명한 공리에서, 자명하지 않은 정리로 발전해나가는 모습이 보이지요. 한편으로는 통쾌한 느낌마저 들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정곡을 찌르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한때 꺼내기 조심스러웠던 때가 있었더랬지요.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르크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아직도 사회의 일각에서는 마르크스에 대해 대화를 하는 것은 꺼리고 있는 모습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사회의 어느 일부분에서는 마르크스가 뭐하던 사람이더라? 라는 호기심어린 반응을 보여주기도 하구요. 사실 이런 태도들은 마르크스에 대한 막연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이 책은 마르크스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마르크스가 제시한 개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유효하다면 어떤 의미에서 유효한가를 제시해주는 책입니다. 중간 중간에 함께 삽입된(표지에도 삽입된) 코믹스러운 그림이 더 이해를 돕지요.

 

 

 

 

 

아마도 이 책은 저자 리처드 윌킨스가 그동안 내놓은 책들의 내용과 궤를 같이 하리라 여겨집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평등해야 건강하다고 말이지요. 혹은 이렇게 줄일 수도 있겠습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라고 말입니다. 의료민영화 등과 같은 이야기가 돌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이 책은 한 번 되짚어 볼만한 책으로 여겨집니다. 사실 '다윈의 대답' 시리즈 전 권은 모두 한 번쯤 읽어볼만한 주제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진화이론을 바탕으로 선사시대에서부터 인간이 어떻게 발전해왔나를 고찰해보는 시리즈이지요. 그 많은 시리즈 중에서 왜 이 책을 골랐냐면, 시리즈 중 어느 책을 추천해도 괜찮았으리라고 여겨집니다만 그래도 요즘은 우리 나라의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런 책을 통해서 건강이 단순히 위생이나 면역 상태와 같은 물리적 요소에만 영향 받는 다는 것이 아니라 평등과 같은 사회적인 요소에도 충분히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환기시킬 필요성이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빈자도, 부자도, 모두 말입니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 라는 책은 솔직히 정말 주저하다가 추천하는 중.. 아무래도 다시 서점에 가서 내용을 확인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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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02 22:42   좋아요 0 | URL
후아, 저는 박완규의 고해도 괜찮았었는데 역시 임재범의 노래는 임재범이 최고예요.
저는 노래방에서 너를 위해를 불러봤는데 도저히 하이라이트 부분이 안올라가서
두키를 낮췃는데도... 쩝

오 저도 침묵의 봄이라는 책에 관심이 조금 가는걸요.
개인적으로 인문관련은 전혀전혀전혀 읽지않는데... 말입니다 ㅜ,ㅜ

가연 2012-01-02 23:45   좋아요 0 | URL
ㅋㅋ임재범은 대단한 사람같아요.. 너를 위해는 저도 자주 부르는 편인데, 저같은 경우에는 하이라이트 부분을 자꾸 진성으로 올려서ㅠ 진성과 가성을 섞은 그 목소리를 따라할 수가 없더라구요, 그렇다고 쌩가성으로 하니깐 이건 뭐.. 귀곡성도 아니구ㅋㅋㅋ
책이야 뭐, 보고 싶을 때 읽으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관심이 생기면 천천히 읽어도 나쁘지 않지요... 제가 소이진님 나이때에는 수많은 판타지와 무협을 섭렵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글을 쓸까, 안 쓸까 고민하다가.. 평가단 일정이 많이 늦어져서

그냥 멋대로 잡문 몇 자 끄적거려본다.

사실 개인적인 이야기는 다른 곳에다가 끄적거리거나 아예 안적는 편이라..

아마 여기서 쓰게 될 글은 모두 책에 관한 이야기들만 적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사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기두 하고..

 

엊그제 신년을 맞아서 서점에[..] 갔는데 눈길을 끄는 책 몇 권과 읽고 있는 책 몇 권.

 

 

 

 

다윈의 식탁.

나온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좋은 책이다.

인기를 제법 끌고 있는 '나꼼수' 식으로 이 책을 평하자면

굴드의 깔때기와 도킨스의 이빨까기[...] 그리고 서로를 향한 디스질.

서로에게 그레이트 빅엿을 먹이기 위한 이빨은 계속된다

...랄까..

책의 구성은 사실 심플하다. 해밀튼이라는 학자의 장례식에 모인 수많은 다윈의 후예들이 굴드의 편과 도킨스의 편으로 나뉘어서 이왕 모인김에 우리 한번 토론(을 빙자한 디스질)을 해봅시다, 라는 거다.

장대익은 저 토론장에서 서기 역할을 맡아서 기록을 남겼구..

다만 머릿말 부분, 장대익의 다른 석학들에 대한 칭찬은 나처럼 배배꼬인 사람에게는 역효과.. 나는 손발이 오그라들뻔했다구...

그러니깐 배배꼬인사람은 머릿말은 보지말구 바로 식탁에 앉기를.

 

 

 

통섭의 식탁.

 

앞에는 다윈의 식탁, 뒤에는 통섭의 식탁.. 장대익과 최재천이 사제관계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참 묘한 제목이다... 너무 먹는 것 밝히는 것 아닌가? 이건 반농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 농담은 아니다. 최재천은 야심차게 통섭이라는 이름으로 인문과 자연과학을 섞어서 요리해서 독자들에게 보이겠다고 이 책에서 밝히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자연과학자가 인문학 책을 권하면 그것이 통섭인가? 최재천 교수는 여기에 대해서 답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독서일기를 생각한다면 읽을만 하다. 가끔씩 최재천 자신의 책을 추천도서로 넣어주는 센스는 애교. 너무 많이 먹으면 체한다.

 

 

 

난설헌.

추천하는 책이다.

옛날에 초등학교때 곤봉체조를 하는데 그 가사가 꼭 '허~ 난설헌' 이라고 하는 것 처럼 들린 적이 있었다. 아니 뭐, 그렇다구. 사실 내가 초등학교때 허난설헌이라는 이름을 알았다고 자랑하는 거다. 이런, 죄송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초등학교때 알고 있던 허난설헌에 대한 지식이나 거의 지금까지 알고 있던 허난설헌에 대한 지식이나 크게 차이가 없었다. 허균의 누이이자 여성으로서는 뛰어난 문재를 지니고 있었다, 라는 것 정도가 내가 알던 것의 전부. 그러나 이 책은 그런 허난설헌의 일생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다. 말하자면 정말 교과서적인 작법을 그대로 따라한 소설이랄까. 뒤의 다른 소설가들의 추천사가 전혀 무색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놀란 것은 이 책의 저자의 나이.. 나이는 직접 찾아보시라...

 

 

 

신의 궤도.

음.. 내가 SF문학에는 사실 별로 조예가 깊지 않다...

다른 것에는 조예가 깊냐면 그저 머리를 긁적거릴수밖에 없지만

뭐 예전엔 과학기술 창작문예에 당선된 글과 그림을 읽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사라졌으니.. 게다가 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SF라면 역시나 아이작 아시모프[..] 정도 밖에 몰랐고(물론 이건 과장법이다. 난 아서 클라크도 안다) 우리나라의 SF작가로는 복거일과 듀나 정도만 알고 있었지. 그런데 이번에 배명훈이라는 작가를 추가해야겠다.

 

그리고 거기까지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하루키횽의 책은 거의 다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극성 하루키빠인 나에게는, 이 책이 나오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갔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그런데 높이 나는 새는 추락할 때 큰 소리를 낸댔던가, 아이쿠야!! 아이쿠야 내 어깨야!!!!!

 

뭐, 나처럼 극렬 극성 하루키빠라면 중간의 수상소감따위 근성으로 읽어줄 수 있다. 뭐, 나처럼 극렬 극성 하루키빠라면 뒤의 짤막한 단편소설들도 애정을 가지고 눈에 하트를 그리며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일본 소설가 중에는 하루키가 좋다.

하지만 하루키빠가 아닌 사람들을 위하여, 제 점수는요, 3.5점/5점.

 

 

 

 

Sixty nine.

사실 여기다가 이렇게 끄적거리는 최근에 읽은 책들과 옛날에 읽은 책들이 섞여있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끄적거리는 거다.

그러니깐 내맘대로지.

그러니깐 내맘대로 Sixty nine을 넣겠다.

여기서 이 육십구는 1969년을 가리킨다. 절대 남사스러운 69가 아니다.. 하지만 무라카미 류라면 그 남사스러운 69를 노리고 제목을 지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남자다.

 

1969년의 고등학생의 이야기이다.
이 책을 여기다가 끄적거리는 이유는.. 재미있기 때문이다.

정말 재미있다.. 삶에 지치고 힘들면 한 번 읽어보시라.

 

 

 

 

2천년 식물 탐구의 역사.

이건 그냥 강추.

사실 나도 아직 덜읽었지만, 저자의 종횡무진하는 지적 탐구의 여정에 같이 따라가는 게 정말 쏠쏠하고 재미있다. 안의 삽화는 특히 아련한 기분을 낼 때 매우 좋다. 꼭 역사 여행을 하는 느낌을 준다, 아니 역사 여행이 맞구나.. 제목부터가 역사일테니... 다만 등장인물들이 많이 나와서 약간 헷갈릴 수도 있지만 뭐, 어떤가, 그럴때는 눈 한쪽을 감고 읽으면 된다. 아니면 사실 삽화만 봐도 좋지 않을까..

그러고보면 내가 대학교를 다닐때 생물학과 교수가 중요한 것은 그림이라고, 글을 읽는 것보다 그림을 서너개 눈에 바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읽으면서 자꾸 그 생각이 나서 킥킥거렸다. 다만 한가지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 옛날 사람들 중에도 그림을 못그리는 사람이 있었구나, 동지여, 만세! (예전에 꽃을 찍기 위해서 사진기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내가 본 꽃과는 너무나 다른 그림이 있어서 놀랐다)

 

 

슬픈 열대.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 읽기는 다 읽었는데, 뭐랄까, 레비 스트로스는 글을 정말 잘 쓰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글은 참 잘 쓴다.

 

...

 

하지만 앞의 원주민들의 사진과 뒤의 여행기를 맞춰가면서 읽는다면 시간 때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려는 사람에게 한 마디.

 

'카두베오, 므바야 족의 신화 부분은 꼭 읽어볼 것'

 

 

 

 러셀의 서양철학사.

이 책도 매우 비싸지만 위의 2천년 식물탐구의 역사, 와 마찬가지로 있으면 매우 괜찮은 책이다. 나는 추천한다. 연말 선물로 도서상품권이나 문화상품권을 받아서 사면 좋을 책이다.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때는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명상하듯이[..] 읽어가면 괜찮다. 그런데 이 책이 이런 류의 책과 차별되는 점이 있다면 저자가 '버트런드 러셀' 이라는 거겠지. 러셀은 위의 레비 스트로스와 다른 의미로 정말 글을 잘 쓴다. 그냥 읽기만 하면 머릿속에 쏙쏙 들어온다. 왜 러셀이 만든 학교가 망했는지 잘 이해가 안갈 정도다.(뭐, 사실 러셀의 비콘힐 학교는 실험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요즘 종종 읽고 있는 책들 중 하나.

 

 

 

 

 

 

 

으아... 너무 길다...

또 새해가 밝았다... 그런데 사실 이번 새해는 특히나 별로 감흥이 없다.

집에서 만화와 게임을 열심히 해서 그런가...

이번 주는 그래도 여유가 있는 편이라서 웬만하면 평가단 책이 이번에 배송되면 좋겠는데

다들 바쁜 모양이다.

 

다음에 또 이런 걸 쓴다면 판타지와 무협같은 장르 소설에 대해서 끄적거려볼까...

나는 거의 전방위 도서가[...독서가가 아니다]라서 판타지면 판타지, 무협이면 무협,

라이트 노벨이면 라이트 노벨, 잡지, 소설, 인문, 과학.. 등 잡히면 다 읽는 편이라...

특히 초기 장르 문학에 대해서는 매우 조예가 깊다, 푸하하.

저렇게 써두니깐 뭔가 있어보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가즈나이트, 드래곤 라자를 많이 읽었다는 말이다.

생각없이 읽기에는 판타지 소설이 괜찮다.

진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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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9-27 01:49   좋아요 0 | URL
이것보다 앞에 있는 글에 '2천년 식물 탐구의 역사'가 있어서 읽어봤습니다 처음에는 재미있었는데 갈수록 사람들이 늘어나서... 얼마 전에는 다른 책을 보다가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을 떠올렸습니다 그 책에 실린 글 가운데 잡문집에 실린 것도 있는 것 같더군요

무라카미 류의 Sixty nine은 예전에 사두고 오랫동안 그냥 두었다가 어느 날 읽었는데 재미있더군요(지금은 거의 잊어버렸습니다) 무라카미 류의 다른 책은 별로였지만... 다른 것도 조금 읽어봤는데,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못 읽어봤습니다 지금은 아주 멀어졌군요 본래 친하지도 않았군요 어쩌면 지금은 다를지도...

난설헌은 읽어봤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는데... 지나간 역사가 바뀌지 않는 것처럼 소설도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그래도 소설은 역사보다는 자유로운 편이죠 하지만 이런 소설은 역사를 바꿀 수 없는 게 아쉽습니다 그래도 아주 다르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겠군요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명상하듯이 읽으면 좋군요 관심이 조금 가는데 이 책은 제가 다니는 도서관이 아닌 곳에 있어서... 그리고 2천년 식물 탐구의 역사와는 다르게 책장이 넘어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올지 안 올지...


희선

가연 2013-10-03 21:08   좋아요 0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정말 좋은 책이었습니다. 저도 무라카미 하루키랑은 정말 친한데 무라카미 류와는 그다지 친하지 않네요.

지나간 역사는 바뀌지 않지만, 해석은 시대가 지나며 매순간 바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