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권력의 서열과 아내 멧돼지의 질투


진흙 목욕을 즐기는 우리 멧돼지들에게 있어 날씨는 꽤나 민감한 문제입니다. 웬만하면 참고 견디는 게 일상인 우리들입니다만 춥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씨는 멧돼지들에게도 견디기 힘든 조건이지요. 그런 날에는 가뜩이나 먹이를 구하기도 어려운데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는 몇 배의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며칠 따뜻했던 날씨 덕분에 2023년 새해를 기분 좋게 시작했습니다만 어제부터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지역마다 편차가 심해서 어떤 곳은 침수가 되기도 했고, 어떤 곳은 비가 눈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날씨는 여전히 푸근합니다. 비가 그치고 다음 주에는 다시 또 추워진다고 합니다만 나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아내 멧돼지와 함께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집에서건 밖에서건 아내 멧돼지가 무섭습니다. 이처럼 아내 멧돼지를 극도로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은 무척이나 오래된 일입니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나의 성격과는 다르게 아내 멧돼지는 앞뒤 가리지 않는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런 차이에서부터 나는 아내 멧돼지의 말을 무시할 수 없는 처지이긴 하지만 아내 멧돼지를 두려워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성격 차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뒷골목 시절 내가 저질렀던 온갖 비리를 아내 멧돼지가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인간 세계의 속담이 멧돼지 세계에서 통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내가 털끝만 한 흠이라도 잡혀 갈라서는 날에는 나의 비리가 만천하에 밝혀지는 걸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보다 두려운 것입니다. 이런 약점을 아내 멧돼지라고 모를 리 없습니다.


다른 멧돼지들은 모르는 사실입니다만 리더 멧돼지로서의 나의 권력은 한낱 허울뿐인 권력일 뿐 모든 권력은 아내 멧돼지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멧돼지의 속성 상 다산과 개체수 조절에 별 관심이 없는 관계로 나는 한때 나와 공부도 같이 했고, 뒷골목 생활도 했던 암컷 멧돼지 한 마리를 다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직에 임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나는 아내 멧돼지로부터 온갖 욕설과 비난을 들어야만 했고, 어떻게 하면 그 암컷 멧돼지를 자를 수 있을까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마침 사직서를 제출한다기에 나는 단칼에 해임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그 암컷 멧돼지에게 특별한 애정이나 관심이 없다는 걸 아내 멧돼지에게 간접적으로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그 암컷 멧돼지는 머리도 좋고, 얼굴도 예뻐서 젊은 시절 많은 수컷 멧돼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아내 멧돼지인지라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나는 사실 세계 최강이라는 날리면 멧돼지를 두려워하기는 하지만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날리면 멧돼지보다는 일본의 기시감 멧돼지에게 더 큰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정책이라면 뭐든 강력하게 지지하고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와 같은 의사는 아내 멧돼지와 나의 선대 멧돼지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나의 선대 멧돼지뿐만 아니라 나의 똘마니 멧돼지들의 조상들 역시 과거 일본 멧돼지들이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식민지 시절 당시 많은 보살핌과 지원을 받았으므로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게 멧돼지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많은 멧돼지들이 죽고 강제 노동에 끌려갔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일본의 기시감 멧돼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의 생각에 반하는 야당의 멧돼지들이나 일반 멧돼지들의 저항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력하게 막으라고 지시했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내가 알던 암컷 멧돼지를 부위원장직에 임명했던 나의 실수를 만회하고 아내 멧돼지로부터 신뢰와 애정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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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3-01-15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이 5년 동안 연재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꼼쥐 2023-01-15 14:2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전제는 대한민국의 존립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지 않는 것이 되겠지만 말입니다.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백은선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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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으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글을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를 체감하지 못하는 무중력의 공간에서, 영혼도 제압당한 상태로 글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그저 멀뚱히 지켜보는 일은 현실에서의 일반적인 느낌과는 상당히 다르다. 타자에 의한 수동적인 입장에 처하는 데서 오는 무력감이나 좌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전에는 맛볼 수 없었던 신선한 글맛 혹은 내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완성된 형태의 글의 영역을 체험하는 느낌은 특별하거나 다소 생경하다. 누군가가 글을 통하여 세태에 찌든 나의 영혼을 순간적으로 정화하는 느낌이랄까. 물론 그런 특별한 체험은 내가 원한다고 언제든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와 같은 글을 쓴 직후에는 정신적으로 고양된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백은선 시인의 산문집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는 글을 쓰는 데서 오는 기쁨보다는 책을 읽는 데서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인 교훈이나 감동은 물론 작가의 솔직한 고백이나 직설적인 화법으로 인해 신선한 충격이나 새로운 경험을 덤으로 체험하게 된다. ‘말’과 ‘시’와 ‘삶’과 ‘여성’이라는 각 부의 제목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작가는 결코 녹록지 않은 핵심 키워드를 부의 제목으로 선정하여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풀어간다. 독자들은 어쩌면 서문에서 밝힌 작가의 도발적인 문장에 움칫 놀라 본문을 읽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날지도 모르겠다.


"선한 것을 믿고 싶지만 대체로 불신하기를 좋아하며 아름다움보다 추함에 끌리곤 한다. 가능태를 따져보는 것을 습관처럼 내재하고 있지만 쉽게 감동하기도 쉽게 차가워지기도 한다. 불안 때문에 수다스러워지고 수치심에 입을 다물곤 한다. 산문을 쓰기로 한 것이 큰 실수라는 것을 알지만 스스로를 시험에 들게 하고 후회하는 것이다. 과거를 곱씹지만 현재만 알고 싶다. 엉망진창이지만 꽤나 성실한 사람의 성실하고 엉망인 삶에 관한 글. 읽으면 좋고 안 읽으면 더 좋다. 보세요. 나의 우울을."  (P.5 '들어가며')


1부 '말'에서 작가는 N번방과 문단내 성폭력 문제를 짚고 있다. 며칠 전에도 성추행 당사자였던 고은 시인이 침묵을 깨고 다시 작품 활동을 개시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최영미 시인에 의해 밝혀진 그의 추악한 실체가 5년 전의 일이었다.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그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어떤 반성이나 사과도 없이 보란 듯 문단에 복귀한 것이다. 백은선 시인 역시 우리 문단에서 성희롱과 추문의 대상이 되는 여성 작가들에 대해 쓰고 있다.


2부 '시'에서 시인은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시가 어떻게 위안을 주는 존재였는지, 그럼에도 자신의 소망과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밝힌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안팎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소망을 쟁취해야 한다고 응원과 지지의 말을 건넨다. 3부 '삷'에서 시인은 코로나19 시대의 반복되는 일상과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온갖 공포와 억압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더 오래 살아야겠다'고 말한다. 사랑의 힘이 시를 쓰게 하고, 시를 쓰는 데서 사랑이 온다는 믿음.


"말과 글은 이만큼이나 멀고 아득하다.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 내면에서 정확히 어떠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지, 사람이 내밀한 것을 말할 수 있게 될 때와 그것을 마침내 글로 쓸 수 있게 될 때의 순간을 절대로 쉽게 예상하거나 알아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p.197)


4부 '여성'에서 시인은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들, 개인에게 분열증을 야기하는 한국 사회, 기후위기를 조장하며 아이들의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 어른들의 세계를 거론하며 이와 같은 문제적인 세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여성의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여성 서사에도 '성녀' 혹은 '악녀' 프레임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의 문제점이 존재하며 이를 벗어나기 위해 여성들 스스로 함께 실천하며 단결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아이를 재우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이니까 멋지게 굿바이를 날리며 퇴장하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아직 할말이 더 있는데 못한 것 같고 갑자기 너무 아쉽고 그렇다. 그렇지만 나는 진짜 궁핍해지지 않는 이상 절대 다시는 산문집을 내지 않을 것이라 다짐 또 다짐한다. 산문을 쓰는 건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는 느낌인 것 같다(내가 임금이란 소리는 아니고)."  (p.271~p.272)


세상에는 내가 미처 읽지 못한 무수히 많은 책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존재조차 모르는 책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책을 읽고, 이따금 취미 삼아 글을 쓰고, 그러는 과정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곤 한다. 이전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백은선 시인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내내 피하고 외면했던 것이 하나 있다. 성장 과정에서 시인도 나만큼 힘들었구나 하는 점. 그럼에도 일부러 피했던 까닭은 성장과정이 적당히 힘들었던 사람은 그걸 자랑할 수 있겠지만 죽을 만큼 힘들었던 사람은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으로부터 동질감이나 동료 의식을 느끼기보다 먼저 외면하게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무의식에 가까운 본능이리라.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장 피폐했던 경험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방어기제, 그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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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떠난 운동장은 휑한 쓸쓸함이 가득합니다. 운동장 가장자리를 따라 눈석임물이 얕은 물길을 내어 흐르고, 빈 운동장을 독차지하듯 길냥이 두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산책에 나섰습니다. 푸석푸석한 오후의 겨울 햇살이 운동장 한가득 퍼져갑니다.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서는 먹이를 찾는 듯 포릉포릉 가볍게 날고 있습니다.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고 생각한 길냥이들이 까치 주변으로 몰려듭니다. 위험을 감지한 까치가 밭은 울음소리를 내며 경고성 엄포를 놓아 보지만 길냥이들은 전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길냥이들의 짓궂은 태도에 까치는 그만 포기하고 저만치 날아가버렸습니다. 운동장은 다시 길냥이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겨울 햇살이 약간의 온기를 뿌려주는 동안 눈석임물이 졸졸 소리를 내어 흐르고 있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 사무실 근처의  초등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 돌고, 아무도 없는 벤치에 앉아 햇빛을 쪼이다 들어왔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크게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하루하루의 일상은 언제나 평화롭고 푸근합니다. 어제 도서관에 잠시 들렀다가 팟빵의 오디오 매거진 <월말 김어준>이 책으로 출간된 것을 보고 조금 놀랐습니다. 반갑기도 했고 말이죠. 검은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월말 김어준 part 1'이라고 쓰인 책등을 발견하였을 때 뭐랄까, 오래된 친구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입니다. 서가 옆에 서서 책을 잠시 펼쳐보고 다시 꽂아 놓을 생각이었는데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쟁쟁하게 들리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책을 대출하고 말았습니다.


동장군의 기세가 절정을 이루어야 할 시기에 예년보다 따뜻한 나날이 이어지다 보니 봄이 멀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듭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백은선의 산문집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한 가지 면만 가진 사람도 없고 한 가지 성격만 가진 인간도 없고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슬프고 이상하고 안도하고 그런 반복을 계속해서 들락날락거리는 게 내게 남은 삶을 탕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것은 나뿐이야."


두서없는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삶이 두서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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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23-01-10 1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어준 책 어려워보여요.tbs서 내쳐지더니 유튜브에서 첫방으로 슈퍼챗 세계 1위찍었다고. 왠지 유튜브도 불안하긴하지만요ㅋ .
5세후니 일 잘 하네요;;ㅡㅡ

꼼쥐 2023-01-12 15:55   좋아요 0 | URL
팟빵에서 가끔 들었던 내용인지라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다 아는 내용이라고 생각해서인지(건방지게) 집중할 수가 없었어요. 유튜브 방송은 동접자가 여전히 20만에 육박하고 슈퍼챗도 많더군요.
 
생의 실루엣
미야모토 테루 지음, 이지수 옮김 / 봄날의책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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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것을 암묵적인 슬픔이라고 부르자. 슬픔에도 모든 것을 있는 대로 내보이는 적극적인 슬픔과 꺽꺽 울음을 안으로만 삼키는 소극적인 슬픔이 있는 것처럼 슬픔이란 이런 것이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슬픔,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주변의 분위기와 주변을 맴도는 어떤 느낌으로 인해 금방이라도 주르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슬픔, 우리는 그것을 암묵적인 슬픔이라고 하자. 미야모토 테루의 에세이 <생의 실루엣>을 읽고 있노라면 과거의 어떤 슬픈 기억을 통과한 현재의 암묵적인 슬픔이 마치 창호지에 물감이 번지듯 밑바닥부터 축축하게 젖어온다. 그럴 때 한 권의 책은 내 기억 속에서 슬픔을 걸러내는 체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고, 온갖 슬픈 기억 속에서 암묵적인 슬픔만 쏙쏙 뽑아내는 필터의 역할을 하는 듯도 하다.


"그나저나 내가 공황장애라는 병으로 얻은 수많은 보물에 대해 말하자면, 이제는 그것을 하나하나 궤적으로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타인의 아픔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 거산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하나 더, 마음의 힘이라는 것의 대단함을 몸소 깨달았다는 점도 덧붙여둔다."  (p.87)


스물다섯 살 때 발작이 덮쳐온 뒤 9년이 지나서야 진단을 받고, 신경안정제가 자신의 상비약이 된 지 30년이나 되었다는 작가는 1년에 두 번씩 10년에 걸쳐 발행해 온 <소유>라는 잡지에 글을 연재하였고, '소설로 쓰면 지나치게 소설 같아지는' 추억이나 경험 등을 소재로 이 이상 쓰면 창작이다 싶은 아슬아슬한 분수령 언저리를 서성이며 에세이라는 장르를 뛰어넘겠다는 계획을 관철할 수 있었다고 후기에 적고 있다. 책에는 평생 안 보고 살던 이복형을 만나기 위해 충동적으로 찾아갔다가 그냥 돌아온 이야기, 어릴 적 입양되었던 동네 어린아이가 청년으로 장성한 후 지진으로 죽었다는 소식, 공황장애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는 일이 몹시도 힘들던 시절 서점의 어느 문예지를 보고 지하철을 타지 않으려면 작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기억, 불가리아 여행에서 아무 대책도 없이 자신들을 국경 밖으로 태워다 줄 차를 무작정 기다렸던 일, 어린 시절 터널 연립주택에서 시체를 발견했던 사건 등 작가는 자기 안에 있던 작은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그 터널 연립주택 시절로부터 60년 가까이 흘렀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충고를 지키지 않고 어슬렁거리던 때가 있어서 확실히 변변한 일은 없었지, 하며 부끄러운 생각에 잠긴다. 세상에는 70억 명의 인간이 있다는데, 그렇다면 타인은 알 수 없는 '각자의 사정'이 70억 개 있다는 뜻이다. 터널 연립주택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왠지 숙연한 기분이 든다."  (p.178)


책을 번역한 이수지 번역가는 '담백한 문체로 일상의 파문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그의 작품에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다.'고 썼다. '인간도 식물도 곤충도 모두 생명이며, 돌멩이 하나조차 생명으로 보일 수 있다.'고 믿는 작가는 '바람에서도 대기에서도 비에서도 구름에서도 생명의 모습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고 '생명보다 더 이상한 것은 없다.'고 결론짓는다. 나는 사실 미야모토 테루의 <생의 실루엣>을 적게 잡아도 두어 번은 읽은 듯하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 주변을 감싸는 모든 사물의 물성과 그것들이 맞물려 굴러가는 세상의 원리들이 무엇 하나 허투루 이루어지지 않았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선량한 사람들의 연대, 이것이 지금만큼 요구되는 시대는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 방향을 향해 구체적으로 움직이려고는 하지 않는다. 인종이나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 따위와는 상관없이 인간 하나하나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p.107)


우리는 그것을 암묵적인 슬픔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어떤 순간에도 눈물은 흘리지 않을 것이며, 타인은 알 수 없는 '각자의 사정'이 70억 개나 존재한다는 걸 믿기로 하자. 삶의 연대는, 선량한 사람들의 연대는 우리가 믿는 암묵적인 슬픔에서 비롯된다는 걸 잊지 않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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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존댓말과 상민 멧돼지


도시는 며칠째 미세먼지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1995년에 있었던 도쿄 지하철 차량 내에서 발생한 무차별적인 사린 가스의 살포를 잊지 말라는 경고처럼 보이기도 하고,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의 무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소한 추위는 꿔다가도 한다'는데 올해는 그마저도 비껴가려는지 쌀쌀하던 날씨가 풀려 미세먼지만 가득합니다. 그나저나 뒷골목 시절부터 늘 반말에 익숙했던 내가 리더 멧돼지가 된 지도 한참이나 지난 오늘 이렇게 존댓말로 일기를 쓸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게다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존댓말로 지극히 사적인 일기장을 메운다는 게 저로서도 믿기지 않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에게 하는 말일지라도 뒷골목 세계에서는 언제나 반말이 일상어처럼 쓰였던지라 다 늦은 나이의 내가 이제 와서 존댓말을 배운다는 게 말이 되지 않을뿐더러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똘마니들에게 누차 설명했는데 이번 존댓말 건에 대해서는 도무지 고집을 꺾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내가 지고 만 것입니다. 나에게 존댓말을 쓰도록 건의한 비서 멧돼지 왈, 반말 짓거리를 찍찍하는 내 모습이 과히 보기 좋지는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꼴값을 떠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지요. 여론도 좋지 않고 말입니다. 결국 나는 외국어를 배우듯 존댓말을 배우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거번먼트 인게이지먼트가 레귤레이션인 것처럼 말입니다.


멧돼지들에게 이름이나 별명이 붙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내가 리더 멧돼지가 된 후 상민 계급의 멧돼지인 나의 충복에게 '어이, 상민(常民) 왔는가?' 하고 물었던 게 인연이 되어 상민 멧돼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도 쓴 바 있습니다. 상민 멧돼지로 하여금 정부의 주요 직책을 맡겼던 것은 나에 대한 그의 충성심도 충성심이지만 '두꺼비'라는 그의 별명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사회성이 부족하여 타인에 대한 배려나 공감 능력이 전무하고, 말을 가려서 할 줄 모르며, 미래에 처할 자신의 운명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데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내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뿐만 아니라 내가 리더에서 물러나는 순간 내가 저질렀던 대부분의 죄를 나 대신 그가 옴팡 뒤집어쓸 수도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는 뒷골목 시절 그가 심판을 보았다는 경력 때문에 후임 심판으로부터 죄를 추궁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조금쯤 알고 있습니다.  내가 리더에서 물러나는 순간, 나의 부름을 받았던 많은 수하들이 감옥에 갈 것이며 사면이나 복권을 기대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내가 리더 멧돼지가 된 후 많은 멧돼지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정부의 잘못이었습니다. 나라고 왜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럼에도 상민 멧돼지를 보직에서 해임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앞으로 저지르게 될 많은 죄들을 그가 대신 뒤집어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나의 방패막이인 셈이지요. 그는 그 일을 성실히 수행할 것입니다. 비록 눈치가 없고, 공감 능력도 부족하지만 나처럼 매사에 두려움과 공포가 큰 멧돼지에게는 상민 멧돼지만큼 배포가 크고 우직한 멧돼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법이지요. 내가 리더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듯합니다. 내가 그를 신임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도시는 여전히 미세먼지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당 대표에 출마하는 여러 똘마니들이 나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연일 굽실대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마음을 정한 지 오래되었지만 그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나에게 충성을 다짐하며 나를 알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정치권도 여전히 안갯속입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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