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불빛의 서점 - 서점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이야기
루이스 버즈비 지음, 정신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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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서점 나들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왜? 라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다.  그러나 새책의 책장을 넘길 때 속살을 내보이는 것이 못내 부끄러운 숫처녀의 순결처럼 '빠닥' 소리를 내며 휘어졌다 펴지는 종이의 약한 탄력에도 야릇한 흥분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애서가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공통분모임을 나는 안다.  그리고 서점의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무언가 열심히 읽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또는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의 제목만이라도 알고 싶은 지나친 갈증이 하나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는 아마도 오랫동안 책을 사랑한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내가 본격적으로 책을 좋아하게 된 시기가 언제였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육남매의 다섯째였던 나는 도회지에 나가 학교를 다니거나 직장을 다녔던 형이나 누나들과는 달리 여동생과 나는 부모님과 함께 시골에서 살았다.  그때만 하더라도 늘 술에 취해 사셨던 아버지와 하숙을 쳐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셨던 어머니, 그리고 나이차가 많이 나는 여동생과 별 말씀이 없으셨던 할머니는 내가 속했던 반쪽의 가족 구성원이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한 날이면 언제나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처음에는 그 대상이 어머니였다가 다음으로 나와 여동생에게 급기야는 이를 제지하시는 할머니에게로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 발걸음이 늘 무거웠다.  나는 집에 들러 가방만 벗어놓고 밤이 늦을 때까지 친구네 집을 돌며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의 손찌검을 피해 밖으로 돌면서도 집에 남아 있는 여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잊고 지낼 수는 없었다.  나는 그 불안감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친구네 집에 있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우리집에는 책이라곤 거의 없었지만 내가 방문하여 시간을 보냈던 여러 친구들의 집에는 읽지 않은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우습게도 아버지의 폭력 덕분이었다.  나는 현실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책이 좋았다.  언젠가 한 번은 작은 서점 앞을 지나다가 나도 크면 서점 주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생계도 유지하면서 평생 책을 읽으며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중학교 때 도시로 나와 형과 함께 자취를 하면서도 책을 좋아하는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 보고 싶은 책을 구입할 수는 없었지만 도서관 근처에 살았던 까닭에 맘만 먹으면 언제든 책을 빌려 볼 수는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여 내 손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책은 이제 독서의 즐거움과 함께 소장의 기쁨이 되기도 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는 내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들르곤 했던 작은 서점이 있었다.  지하철역을 막 빠져나와 골목길로 접어드는 초입에 위치했던 그 서점은 유리 안쪽의 실내를 환하게 밝혀 놓은 채 나를 유혹하곤 했다.  지금도 나는 아들과 함께 하는 서점 나들이를 좋아한다.  매대에 쌓인 신간들을 둘러 보고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배가 고플 때까지 책을 읽는 재미와 책에 빠져 내게 눈길도 주지 않는 아들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럴 때마다 지금처럼 휴대폰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에 최적의 약속 장소였던 대형 서점의 나른한 시간들을 떠올리곤 한다.

 

이 책의 저자인 '루이스 버즈비'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책을 좋아하여 서점 직원으로 10년, 출판사 외판원으로 7년을 보냈고, 지금도 일주일에 다섯 번은 서점엘 간다고 한다.  캘리포니아 산호세의 작은 서점 ‘업스타트 크로 앤드 컴퍼니’에서 일한 것을 계기로 그곳에서 4년, '프린터스'에서 6년을 일하고 출판사 외판원으로 7년 등 삶의 대부분을 서점에서 보냈던 그는 이 책에서 탐서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책과 서점의 역사, 위대한 출판업자와 출판의 역사 및 서점만이 갖는 독특한 분위기 등 그가 경험하고 느꼈던 전반적인 것들을 흥미롭게 기록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은 디지털 세대를 살았던 요즘의 젊은이들에게는 그 느낌이 나와 다를지도 모른다.  그저 인터넷 클릭 몇 번으로 자신이 원하는 책을 언제든 주문할 수 있는 요즘, 굳이 시간을 따로 내어 서점을 방문하고, 번잡한 사람들 틈에서 몇 번이고 어깨를 부딪혀가며 책을 고를 까닭이 그들에게는 없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서점에서 보내는 느긋한 시간과 천천히 흐르는 일상과 서점에서 나왔을 때 느끼는 약간의 허기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겪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임에 틀림없다.

 

"도서 문화 literary culture 는 우리 사회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역할은 막중하다.  사람들은 서점에서 그 문화를 만날 수 있으며 수천 년 동안 그치지 않고 흘러온 창조와 상상력의 강에 지류로 결합하기도 한다.  아직까지도 이런저런 생각과 견해를 자유롭고도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고, 또 그런 자리에 스스럼없이 끼어들 수 있는 곳이 바로 서점이다.  서점에서우리는 많은 타인 속에 홀로 서 있는 외톨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타인들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289~290쪽) 

 

작가가 지적하고 있듯 서점은 가상공간이 아닌 현실공간이라는 점에서 요즘의 젊은이들이 자주 찾아야 할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 속에 묻혀 사라져가는 인간 존재의 가치를 한탄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막 한글을 깨친 아이가 떠듬떠듬 책을 읽어내려가는 모습과 그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지켜보는 할아버지의 따스한 눈길 속에서 우리는 또 다시 희망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서점은 바로 그런 곳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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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걷고 싶은 길 - 길은 그리움으로 열린다
진동선 지음 / 예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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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까지 오느라 참 많이도 걸었다.

내가 걸었던 수많은 길.  산비탈을 올라 종국에는 숲으로 이어지던, 아침이면 학교로 이어지는 폭이 좁은 그 길에서 길섶의 아침 이슬에 바짓단이 함초롬히 젖던, 미루나무 길게 늘어선 신작로길에 뽀얀 먼지가 일고 한낮 찌울매미 서럽게 울던, 그리고 한겨울 눈보라에 손을 호호 불며 걷던 그 많은 길들이 이제는 내 마음속 상상의 길이 되고 말았다.  호기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길섶에 수더분히 놓인 생명 하나와도 인연을 맺고 싶었던 그 아이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저녁 습기로 풋풋한 그 길에서 문득 하늘을 보면 성깃성깃 별들이 돋아나고 있었는데...

 

진동선 작가의 <그대와 걷고 싶은 길>은 얇은 책이다.  대도시 뒷길이나 휑한 뒷골목을 20년 넘게 찍어오고 있다는 작가.  누구에게나 길은 인간으로서 갖는 숙명적인 고독과 미지에 대한 동경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뽀얗게 타는 햇살의 여백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고일 듯한 그리운 추억들을 마음껏 그려보는 장소이기도 하다.  어릴 적 아스라히 보이던 언덕 너머의 먼 미래를 꿈꾸던 장소이기도 했었지만 말이다.  작가가 길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런 보편적 그리움에 더하여 특별한 사연이 있는 듯했다.

 

"길을 통한 고독과 그리움의 풍경은 아무래도 누님과 관련이 깊다.  시집살이를 못 견뎌 친정으로 도망쳐온 누님이 신작로에서 울고 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길에 대한 강한 낙인이다.  자갈밭 신작로에 드문드문 전봇대가 휑하게 서 있던 그날의 길 풍경을 잊지 못한다.  이후로 신작로와 전봇대가 늘 눈에 들어오고 지금도 그런 풍경 앞에서 목이 메는 까닭은 누님이 안긴 유년의 상처이다."    (6쪽)

 

이 책에서 작가는 파리의 뒷골목, 이태리 볼테라의 시골길, 독일의 로맨틱가도 등 아름다운 길들을 찍은 사진과 그 길에서 건져올린 사색의 알갱이들을 독자들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짧은 글귀들이 전하는 울림을 생각하노라면 다음 장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한다.  그렇게 한참을 서성이다가 멍한 시선으로 창밖을 보면 아련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옛날의

 

인생에는

가고 싶지 않은 길도 있고,

돌아보고 싶지 않은 길도 있다.

그럼에도 다시 길을 가야 한다면

그것은 아픔이다.

 

아픔은 '어쩔 수 없음'에서 온다.

사랑도 그렇고 삶도 그렇다.

그럼에도 다시 그 길을 가야 한다면

그것은 한때 모든 걸 걸었던

아름다웠고 사랑했던

그 옛날의 시작 때문이다.

    (31쪽)

 

 

 

바야흐로 봄이다.

아침에 내가 보았던 공원 벤치에는 봄햇살에 살포시 젖는 사람들과 그 앞에서 줄넘기를 하며 깔깔대는 아이들과 그 모습을 휘감아 도는 산책로와 물이 오른 나무들이 있었다.  사는 것이 아픔이라면 아픔 한 조각쯤 가슴에 품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아픔을 보듬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것이 끝을 알 수 없는 이 길을 걷는 이유가 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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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만드는 기계
김진송 지음 / 난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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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받아들고 책장을  펼쳤을 때,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녀석이 나보다 더 좋아하며 반겼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해맑던지...  아들이 이 책에 관심을 보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감동과 교훈, 혹은 멋진 표현이나 기발한 아이디어를 위주로 독서를 하는 나와는 달리 아들은 이 책에 실린 멋진 목공예 작품과 작가가 직접 그린 듯한 밑그림들에 홀딱 반한 듯했다.  어려서는 종이접기에, 그리고 몇 년 전부터는 레고에 중독되다시피 한 아들녀석의 취미를 생각할 때, 기계와 같이 정밀한 작가의 멋진 작품에 반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들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목공예 작품과 밑그림만 보고도 책의 내용을 충분히 짐작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책도 아니었다.  답답함을 참지 못하던 아들은 끝내 나보다 먼저 책을 다 읽고는 내가 어디까지 읽었는지 확인하며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내게 묻곤 했다.  사실 이 책을 쓴 작가의 의도는 명확해 보였다.  자신의 목공예 작품을 보면서 작가 자신이 상상했던 짧은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그 이야기와 작품에 저마다의 상상력을 더하여 책을 읽는 재미와 조각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를 함께 누리도록 하자는 취지인 듯했다.

 

"이야기의 시간을 이미지의 시간으로 바꾸는 일, 그게 '이야기를만드는 기계'를 만드는 일이다.  반복적이고 단순한 동작이라도 거기에는 미세한 시간들이 옴짝달싹도 못하도록 달라붙어 있다.  시간이 없다면 움직임은 사라지고 시간이 없다면 이야기는 흐르지 않는다.  도대체 시간이 없어진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야기가 흐르지 않는 세상은 살아 있는 세계가 아니다.  이야기가 길건 짧건 서사의 구조가 복잡하건 단순하건 이를 물리적으로 실현하는 일은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말을 엮어 이야기를 만드는 것과 톱니바퀴를 물려 기계를 만드는 것은 부분 혹은 부품들을 논리적인 절차와 구조를 통해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내는 동일한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보인다."    (11쪽)

 

잘 알려진 이야기처럼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 '잠자는 미녀'를 읽고 영감을 얻어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쓰게 됐다고 하지 않던가.  마르케스는 '이것이 내가 쓰고 싶은 바로 그 소설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좋은 책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책을 읽은 독자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책은 좋은 책의 범주에 속하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책을 읽는 동안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책이라면 그 또한 좋은 책이 아니겠는가.

 

언젠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상상력 사전'을 읽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베르베르가 열네 살 때부터 자신의 상상, 자신의 흥미를 끄는 새로운 사실들, 발상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역설적인 지식들을 기록한 노트가 바탕이 되었다는 이 책은 어떤 주제나 교훈을 기대하는 것 없이 자신이 읽고 싶은 부분만 가려서 읽을 수 있어서 좋았었다.  이 책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에 등장하는 작품의 갯수만 하더라도 70여 개에 달한다.  생명이 없는 나무조각을 깎고 다듬어 형체를 만들고 톱니를 맞물려 움직이는 인형으로 만들기까지 작가는 아마도 많은 시행착오와 함께 자신이 상상한 이야기들을 몇 번이고 수정하며 또 덧붙였을 것이다.

 

기계치에 가까운 나는 작가처럼 나무를 깎아 형태를 만들고 움직임을 창조하는 일은 할 수 없다.  아니 엄두도 낼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만든 작품을 보며 몇 번이고 감탄할 수는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와는 다르게 제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아들녀석의 상상력도 이 책을 같이 읽은 덕분에 이전보다 한 뼘쯤 더 자라나지 않았을까? 

 

"나무의 물리에 쏠려 있는 목수가 도달하지 못하는 수많은 영역들이 있다.  모든 직업과 마찬가지로 한 가지 직업이 쌓은 세월은 깊이가 아니라 협소함으로 드러난다.  목수의 시간은 상상의 영역을 저만치 밀어버렸고 기능과 쓰임에 충실한 나머지 그밖의 모든 쓰임들은 장식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시켰다.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절차, 이를테면 치밀한 계산과 구조에 대한 기계적 이해, 원리에 대한 과학적 접근 역시 몸에 밴 경험의 범주에 가두어버렸다.  기능의 쓸모를 버리고 유희의 쓸모 혹은 미학적 쓸모를 찾는 동안 여기저기 뚫린 구멍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203쪽)

 

우리나라의 교육에 있어서도 상상이나 유희의 영역은 이제 아주 먼 옛날 이야기처럼 쓸모가 없는 것쯤으로 치부되고 있다.  아들과 이 책을 읽으며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는데 말이다.  우리 각자는 좋아하고 맘에 들어하는 작품도 달랐고, 좋아하는 이야기도 달랐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을 가졌었다.  그 짧았던 시간이 우리에게 주었던 행복한 느낌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경쟁을 위한 공부의 세계로 아들을 내몰아야 한다는 현실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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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
마크 보일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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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모롱이에 스웨터 보풀처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조막만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절골을 지나 싸리덕에 올랐다.  첩첩산중인 그곳에도 해마다 어김없이 생명이 움트고, 식빵처럼 부풀어오른 활력을 주체할 길 없었던 아이들은 온 산을 누비며 나물을 뜯었다.  태백산맥을 힘겹게 넘은 높새바람이 키 큰 억새를 서걱이며 훑고 지나갈 때 아이들은 쏟아질듯 푸른 하늘을 보며 억새밭에 누워 스르르 눈을 감았다.  마른 갈잎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누군가 더덕 한 뿌리를 캐었는지 진한 더덕향이 바람을 타고 생명처럼 번졌다.  흐드러지는 봄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어릴 적 모습이다.  그 풍경과 마른내가 풀풀 나는 바람과 온 산으로 번져가던 봄의 생기는 지금도 어제 일처럼 또렷하기만 하다. 나 자신이 어릴 적 모습을 떠올리며 그 아름다움과 평화에 온전히 안길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지금도 그 시절을 그리워 하는 것처럼 인간의 감성은 언제나 아름다움을 향하는가 보다.  그것은 논리의 영역이 아니기에 옳고 그름의 영역과는 무관하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감동할 수 았는 아름다움은 손상되지 않은 자연을 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처럼 자연 속에서 누렸던 아름다움은 생명력이 길고 무한한 평화와 행복을 안겨준다.

 

평화와 행복, 그리고 아름다움은 금슬이 좋은 부부처럼 언제나 함께 온다.  나는 이제껏 평화로운데 아름답지 않거나, 아름답지만 평화롭지 않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아름다움 속에서 누렸던 삶은 언제나 행복했었다.  본론에서 조금 빗나간 애기지만 플라톤에서 시작된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적 사고는 칸트에 이르러 '개념 없이 보편적으로 만족을 주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렇기에 아름다움은 영원성을 부여받는다.  그것이 옳다면 영원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 달리 말하면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석유자원과 물질문명의 풍요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길들여지고 돈을 매개로 한 생산과 소비의 분리는 대대로 이어져 오던 생존의 기술을 모두 잃게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현대인에게 아름다운 삶은 한낱 꿈에 불과한, 그야말로 원시 외계의 삶이 되고 말았다.  자급자족의 삶은 이제 내 추억의 한 장면처럼 부질없는 것이 되었다고 여겨야 하리라.  최소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마크 보일이 쓴 <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는 나에게 새로운 희망과 꿈을 안겨주었다.  내가 그렇게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저자는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소비지상주의'에 젖어 정상적인(?) 삶을 살던 영국의 한 젊은이였다.  경제학과 경영학을 전공한 그가 돈 한푼 안 쓰고 1년을 살아보기로 작정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오히려 돈을 많이 벌어 봉사와 자선의 길로 나서겠노라고 선언하는 쪽이 훨씬 잘 어울림직한데 말이다.  아일랜드의 중류 가정에서 성장한 저자는 한때 프로 축구 선수가 되어 어마어마한 부를 일구는 것이 꿈이었다고 말한다.  아일랜드에서 4년 동안 경영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6년 동안 영국에서 유기농식품 회사들을 관리했던 그가 이런 모험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회사에 들어가서 가능한 한 빨리, 또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벌겠다던 당초의 계획을 접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간디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간디가 남긴 수많은 어록 중에서 나의 심금을 울린 것은 이 한 마디였다.  "이 세상이 변하기를 원하거든 당신 자신이 변화가 되도록 하여라.  당신 혼자만이라도 좋고 수백 만 명이라도 좋다."  문제는 나 자신이 그 변화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17쪽) 

 

사실 돈을 아껴 쓰는 것과 한푼도 쓰지 않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삶에 필요한 웬만한 것들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것들을 알뜰하게 쓰냐냐, 풍족하게 쓰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경제적 능력이나 가치관만으로도 말끔히 해결될 문제이다.  그러나 돈 한푼 안 쓰고 생활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생존에 필요한 여러 요소들, 이를테면 주거와 난방, 주방기구와 식재료, 심지어 걷는데 필요한 신발까지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저자가 원했던 실험은 주변의 사람들과 동떨어진 원시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변화로 이끄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한 삶에는 그가 정한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1. 만 1년 동안 어떠한 돈도 받을 수 없고 지출할 수도 없다는 '노 머니'에 관한 원칙

2. 만약 누군가 그를 초대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판단으로서 '정상'에 관한 원칙

3. 보답에 대한 기대는 전혀 하지 않는 다음 사람에게 베푸는 행위에 관한 원칙

4. 다른 사람의 생활방식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바탕에서 자신의 생활방식을 지켜나가는 타인에 대한 존경에 관한 원칙

5. 자전거로 불가능한 여행일 때만 차를 얻어 타고 그 외의 경우에는 거절하는 '화석연료 반대'에 대한 원칙

6. 평소 예상할 수 있는 청구서에 대해 미리 지급하지 않는 경비 선(先)지급 불가에 관한 원칙

 

이 책은 위에 적은 원칙을 바탕으로 1년 동안 돈 한푼 쓰지 않고 살았던 저자의 생활기록이다.  유통기한이 지난 쓰레기 음식들을 주워 모으고, 채소를 가꾸고, 난로에 불을 지피면서 살았던 1년 간의 삶의 기록은 나 자신에게도 많은 반성을 하게 했다.  석유자원과 돈이 주는 안락과 풍요는 어쩌면 우리 후손의 결핍을 담보로 빌려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삶, 평화와 행복이 넘치는 삶은 필연적으로 약간의 육체적 고통과 수고가 따른다.  진정 아름다운 사람은 그 수고와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존경을 표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화가 무슨 의미인지도 진정으로 알지 못하면서 평화를 바란다고 주장한다.  평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자이크와 같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나 이 지구와 일상적으로 하는 교류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평화라는 모자이크가 완성된다.  나 개인의 교류를 보면 평화의 진정한 의미와 동떨어져 있을 때가 자주 있다.  나는 너무 바쁘다고 투덜거리고, 다른 사람들이 불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한다고 불평하고, 또 나 자신이 혼자 꿈꿔왔던 것보다 덜 긍정적인 행동을 보였다.  돈을 쓰지 않는 삶도 보다 평화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한 수단으로 시작한 것인데, 이제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다."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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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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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의 <대설주의보>를 읽었다.  3월에 내리는 눈처럼 깊은 슬픔이 갈비뼈까지 차오르는 소설이었다.  그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인생은 마치 실컷 놀고 한쪽으로 내팽겨쳐진 장난감처럼 내 손길이 닿지 않는 아득함으로 다가오곤 했다.  아니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문득 생각해보면 인생은 언제나 똘망한 눈으로 응시하는 세살배기 아이처럼 내 곁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마치 한 권의 장편소설인 양 7편의 단편이 묶인 이 소설집은 그 주제가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사람의 의지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인연.  어차피 만나야 할 인연이라면 끝내 만나지고야 만다는 게 그것이었다.  그러나 남자들이 인식하는 관계란 그리 복잡하거나 세밀하지 않다.  경험상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대개의 사내들은 둘 중 하나일 확률이 크다.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앞뒤 가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부류와 남의 일인 듯 멀찍이 서서 바라만 보다가 관계가 끊어진 이후에나 결과에 집착하는 부류.

 

그것은 곧 삶을 대하는 태도와도 연결된다.  여자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막 시작되는 시점에서부터 마지막까지 꼼꼼이 되짚고 그 인과관계를 살피는 반면 남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그것은 어쩌면 여러 개의 직함을 갖고 살아가는 남자의 운명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두 부류로 나뉘어진 사내들이라 할지라도 관계를 그닥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서로 같다.  과정을 즐기는 부류는 관계가 끝나는 시점에서 치매에 걸린 사람처럼 자신의 과거를 까맣게 잊는다.  그에게 있어 자신이 지나온 과정이 결과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문제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반면 결과에 집착하는 부류는 성긴 눈처럼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멀뚱멀뚱 바라만 보며 시간의 표면에 뻥뻥 구멍을 뚫어놓고는 인연이 다 끝난 시점에서야 비로소 이미 과거로 바뀐 관계를 되돌아 본다.

 

대체로 일관적이고도 논리적인 여자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남자는 참으로 이해불가의 동물이 아닐 수 없다.  관계를 살피는 일이 직업인 철학자나 사회학자라면 얘기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여러 개의 직함을 들고 그때마다 낯을 바꾸어야 하는 남자의 속성상 어떤 관계를 끝까지 면밀하게 살피는 일은 애시당초 불가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작가는 남자의 이런 속성을 여성의 눈으로 그리고 있다.  때로는 그것이 비열하게 보일 수도 있고, 안타까운 심정이 들 수도 있겠으나 다만 그것은 삶의 모순으로 이해할 문제이지 분석하거나 잘잘못을 따져서 해결될 문제는 아닌 듯하다. 

      

책의 첫머리에 놓인 ‘보리’라는 단편에서는 주인공 수경이 등장한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수경은 남자에게 몸을 준다.  그리고 수경은 유부남인 그 남자가 원할 때마다 1년에 몇 번 만나는데, 청명(淸明) 때만은 반드시 온천에 내려가서 정기적으로 만나는 일을 7년째 수행했다.  남자는 수경을 '보리'라고 불렀다.  그러나 수경은 유방암에 걸린 자신이 남자와 더이상 관계를 지속할 수 없음을 인식하면서 그와 만나던 온천에서 그를 기다린다.  수경은 남자의 연락을 기다리며 청명(淸明)의 풍경을 아프게 그리고 있다.

 

'풀밭 위의 점심'에 나오는 나는 대학시절 연우, 수연과 함께 연인처럼 붙어다녔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사에 취직한 나는 수연에게 청혼하지만 수연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연우에게로 간다.  그러나 둘은 결국 이혼하고 연우는 자신의 딸과 함께 귀국한다.  나의 결혼기념일이었던 날 나는 연우의 전시회에 아내와 함께 참석한다.  그 자리에서 나는 딸을 데리러 왔던 수연과 조우한다.  독일인과 결혼하여 독일에 사는 수연은 나에게 한번만 안아달라고 부탁한다.  작별을 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는 수연, 연우와 찍었던 풀밭 위의 사진을 보았었다고 말한다.

 

표제작인 '대설주의보'의 해란은 오해 때문에 윤수와 헤어진 뒤 직업 군인의 다른 남자와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채 사실혼 관계로 살고 있다.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는 해란은 시간을 두고 한 번씩 윤수를 만난다.  해란을 만나기 위해 백담사로 가던 윤수는 백담사 인근 소읍에서 폭설에 발이 묶이고 해란과는 목소리로만 교류하는 상황. 끝내 윤수는 하룻밤을 더 기다릴 수 없어 그 지역의 지리에 밝은 대리기사를 불러 폭설을 뚫고 백담사로 향한다.  윤수가 백담사 인근에 어렵사리 도착했을 무렵, 해란도 절집에서 무모하게 눈을 뚫고 나오고 있었다.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에 등장하는 은주는 내가 다니는 대학교 앞에서 딸 하나 데리고 카페를 운영하며 술을 파는 여인이다.  나보다 6년이나 연상이었던 그녀를 좋아하게 된 나는 파괴적으로 자신을 괴롭히며 살던 삼촌에게 그녀를 소개한다.  술집을 하며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살던 삼촌은 어려운 형편의 은주에게 동업을 제의하고 급기야는 그녀를 가져가버렸다. 젊은 시절 ‘꿈은 사라지고’를 열창하던 삼촌,  삼촌때문에 '꿈은 사라지고'를 흥얼거렸던 나.  삼촌은 후일 자신의 여자가 조카의 애인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방황하다가 죽는다.  삼촌과 결별하여 딸과 함께 캐나다에서 살던 은주는 삼촌의 죽음으로 인해 나와 다시 만난다.   

‘오대산 하늘 구경’ 에서는 연미가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도 작가는 “사람을 만나다보면 변하지 않는 관계가 있고 또한 변할 수 없는 관계가 있다”(169쪽)고 되뇌인다. 아내를 포함하여 처가집 식구 모두가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 후 때맞춰 연미에게서 연락이 온다.  상원사 동종을 취재할 일이 있었던 나는 연미와 동행한다.  삼촌과 조카 사이처럼 뜨뜨미지근한 사이였던 나와 연미.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유령처럼 부유하는 연미는 오대산 월정사 암자에서 밤새 통곡하다 새벽에 석탄 같은 눈빛을 띠고 내 곁을 지나 떠나간다.

'도비도에서 생긴 일'에서의 혜경은 ‘미쓰강’으로 불리던 여자였다. 가난한 시나리오 작가였던 그녀는 친구 유석의 도움으로 소설 집필 차 서해 도비도로 내려간다.  시를 포기하고 현실에 맞추어 살고 있던 나와 유석은 도비도에서 그녀와 어울린다.  소설을 완성했지만 출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혜경은 도비도에서 사고사로 발견된다.  그녀가 죽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녀의 신원을 알게 된 유석과 나.  상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무심하게 만났다 헤어지는 관계의 설정을 기반으로 하는 이 작품은 “사는 게 모두 어리석고 잔인한 속임수”라는 지문처럼 현대인의 표면적인 만남을 질타하고 있다.

 

남자의 속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자가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위의 작품에서는 모두 여자 주인공에게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나 마직막 작품인 '여행, 여름'에서는 남자와 남자의 만남을 쓰고 있다.  남자의 속성과 관계의 문제를 다루고자 했던 작가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화장품가게 여인이 잠깐 등장하지만 그것은 단지 이야기 구조에 필요한 장치였을 뿐 Y라는 극작가와 나의 여행담을 주로 쓰고 있다.

 

작가의 말을 빌자면 '식탁 위에 엎질러진 물처럼 봄이 오고 있다.'  생명이 갈맷빛으로 부풀어오르는 계절.  그 속에서 우리는 습관처럼 사랑을 하고, 관계를 맺고, 잊혀져가는 사람을 또 그리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영속하는 한 무질서한 삶의 계율을 우리는 그저 묵묵히 바라볼 것이다.  윤대녕의 소설은 마치 시처럼, 또는 오래 전의 노래처럼 그렇게 읽힌다.

 

"늘 그리워하지는 않아도 언젠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되고 그때마다 헤어지는 것조차 무의미한 그런 관계가 있다."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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