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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걷고 싶은 길 - 길은 그리움으로 열린다
진동선 지음 / 예담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예까지 오느라 참 많이도 걸었다.
내가 걸었던 수많은 길. 산비탈을 올라 종국에는 숲으로 이어지던, 아침이면 학교로 이어지는 폭이 좁은 그 길에서 길섶의 아침 이슬에 바짓단이 함초롬히 젖던, 미루나무 길게 늘어선 신작로길에 뽀얀 먼지가 일고 한낮 찌울매미 서럽게 울던, 그리고 한겨울 눈보라에 손을 호호 불며 걷던 그 많은 길들이 이제는 내 마음속 상상의 길이 되고 말았다. 호기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길섶에 수더분히 놓인 생명 하나와도 인연을 맺고 싶었던 그 아이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저녁 습기로 풋풋한 그 길에서 문득 하늘을 보면 성깃성깃 별들이 돋아나고 있었는데...
진동선 작가의 <그대와 걷고 싶은 길>은 얇은 책이다. 대도시 뒷길이나 휑한 뒷골목을 20년 넘게 찍어오고 있다는 작가. 누구에게나 길은 인간으로서 갖는 숙명적인 고독과 미지에 대한 동경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뽀얗게 타는 햇살의 여백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고일 듯한 그리운 추억들을 마음껏 그려보는 장소이기도 하다. 어릴 적 아스라히 보이던 언덕 너머의 먼 미래를 꿈꾸던 장소이기도 했었지만 말이다. 작가가 길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런 보편적 그리움에 더하여 특별한 사연이 있는 듯했다.
"길을 통한 고독과 그리움의 풍경은 아무래도 누님과 관련이 깊다. 시집살이를 못 견뎌 친정으로 도망쳐온 누님이 신작로에서 울고 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길에 대한 강한 낙인이다. 자갈밭 신작로에 드문드문 전봇대가 휑하게 서 있던 그날의 길 풍경을 잊지 못한다. 이후로 신작로와 전봇대가 늘 눈에 들어오고 지금도 그런 풍경 앞에서 목이 메는 까닭은 누님이 안긴 유년의 상처이다." (6쪽)
이 책에서 작가는 파리의 뒷골목, 이태리 볼테라의 시골길, 독일의 로맨틱가도 등 아름다운 길들을 찍은 사진과 그 길에서 건져올린 사색의 알갱이들을 독자들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짧은 글귀들이 전하는 울림을 생각하노라면 다음 장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한다. 그렇게 한참을 서성이다가 멍한 시선으로 창밖을 보면 아련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그
옛날의
시
작
인생에는
가고 싶지 않은 길도 있고,
돌아보고 싶지 않은 길도 있다.
그럼에도 다시 길을 가야 한다면
그것은 아픔이다.
아픔은 '어쩔 수 없음'에서 온다.
사랑도 그렇고 삶도 그렇다.
그럼에도 다시 그 길을 가야 한다면
그것은 한때 모든 걸 걸었던
아름다웠고 사랑했던
그 옛날의 시작 때문이다.
(31쪽)
바야흐로 봄이다.
아침에 내가 보았던 공원 벤치에는 봄햇살에 살포시 젖는 사람들과 그 앞에서 줄넘기를 하며 깔깔대는 아이들과 그 모습을 휘감아 도는 산책로와 물이 오른 나무들이 있었다. 사는 것이 아픔이라면 아픔 한 조각쯤 가슴에 품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아픔을 보듬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것이 끝을 알 수 없는 이 길을 걷는 이유가 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