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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만드는 기계
김진송 지음 / 난다 / 2012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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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받아들고 책장을  펼쳤을 때,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녀석이 나보다 더 좋아하며 반겼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해맑던지...  아들이 이 책에 관심을 보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감동과 교훈, 혹은 멋진 표현이나 기발한 아이디어를 위주로 독서를 하는 나와는 달리 아들은 이 책에 실린 멋진 목공예 작품과 작가가 직접 그린 듯한 밑그림들에 홀딱 반한 듯했다.  어려서는 종이접기에, 그리고 몇 년 전부터는 레고에 중독되다시피 한 아들녀석의 취미를 생각할 때, 기계와 같이 정밀한 작가의 멋진 작품에 반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들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목공예 작품과 밑그림만 보고도 책의 내용을 충분히 짐작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책도 아니었다.  답답함을 참지 못하던 아들은 끝내 나보다 먼저 책을 다 읽고는 내가 어디까지 읽었는지 확인하며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내게 묻곤 했다.  사실 이 책을 쓴 작가의 의도는 명확해 보였다.  자신의 목공예 작품을 보면서 작가 자신이 상상했던 짧은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그 이야기와 작품에 저마다의 상상력을 더하여 책을 읽는 재미와 조각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를 함께 누리도록 하자는 취지인 듯했다.

 

"이야기의 시간을 이미지의 시간으로 바꾸는 일, 그게 '이야기를만드는 기계'를 만드는 일이다.  반복적이고 단순한 동작이라도 거기에는 미세한 시간들이 옴짝달싹도 못하도록 달라붙어 있다.  시간이 없다면 움직임은 사라지고 시간이 없다면 이야기는 흐르지 않는다.  도대체 시간이 없어진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야기가 흐르지 않는 세상은 살아 있는 세계가 아니다.  이야기가 길건 짧건 서사의 구조가 복잡하건 단순하건 이를 물리적으로 실현하는 일은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말을 엮어 이야기를 만드는 것과 톱니바퀴를 물려 기계를 만드는 것은 부분 혹은 부품들을 논리적인 절차와 구조를 통해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내는 동일한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보인다."    (11쪽)

 

잘 알려진 이야기처럼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 '잠자는 미녀'를 읽고 영감을 얻어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쓰게 됐다고 하지 않던가.  마르케스는 '이것이 내가 쓰고 싶은 바로 그 소설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좋은 책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책을 읽은 독자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책은 좋은 책의 범주에 속하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책을 읽는 동안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책이라면 그 또한 좋은 책이 아니겠는가.

 

언젠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상상력 사전'을 읽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베르베르가 열네 살 때부터 자신의 상상, 자신의 흥미를 끄는 새로운 사실들, 발상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역설적인 지식들을 기록한 노트가 바탕이 되었다는 이 책은 어떤 주제나 교훈을 기대하는 것 없이 자신이 읽고 싶은 부분만 가려서 읽을 수 있어서 좋았었다.  이 책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에 등장하는 작품의 갯수만 하더라도 70여 개에 달한다.  생명이 없는 나무조각을 깎고 다듬어 형체를 만들고 톱니를 맞물려 움직이는 인형으로 만들기까지 작가는 아마도 많은 시행착오와 함께 자신이 상상한 이야기들을 몇 번이고 수정하며 또 덧붙였을 것이다.

 

기계치에 가까운 나는 작가처럼 나무를 깎아 형태를 만들고 움직임을 창조하는 일은 할 수 없다.  아니 엄두도 낼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만든 작품을 보며 몇 번이고 감탄할 수는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와는 다르게 제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아들녀석의 상상력도 이 책을 같이 읽은 덕분에 이전보다 한 뼘쯤 더 자라나지 않았을까? 

 

"나무의 물리에 쏠려 있는 목수가 도달하지 못하는 수많은 영역들이 있다.  모든 직업과 마찬가지로 한 가지 직업이 쌓은 세월은 깊이가 아니라 협소함으로 드러난다.  목수의 시간은 상상의 영역을 저만치 밀어버렸고 기능과 쓰임에 충실한 나머지 그밖의 모든 쓰임들은 장식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시켰다.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절차, 이를테면 치밀한 계산과 구조에 대한 기계적 이해, 원리에 대한 과학적 접근 역시 몸에 밴 경험의 범주에 가두어버렸다.  기능의 쓸모를 버리고 유희의 쓸모 혹은 미학적 쓸모를 찾는 동안 여기저기 뚫린 구멍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203쪽)

 

우리나라의 교육에 있어서도 상상이나 유희의 영역은 이제 아주 먼 옛날 이야기처럼 쓸모가 없는 것쯤으로 치부되고 있다.  아들과 이 책을 읽으며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는데 말이다.  우리 각자는 좋아하고 맘에 들어하는 작품도 달랐고, 좋아하는 이야기도 달랐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을 가졌었다.  그 짧았던 시간이 우리에게 주었던 행복한 느낌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경쟁을 위한 공부의 세계로 아들을 내몰아야 한다는 현실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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