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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불빛의 서점 - 서점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이야기
루이스 버즈비 지음, 정신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책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서점 나들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왜? 라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다. 그러나 새책의 책장을 넘길 때 속살을 내보이는 것이 못내 부끄러운 숫처녀의 순결처럼 '빠닥' 소리를 내며 휘어졌다 펴지는 종이의 약한 탄력에도 야릇한 흥분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애서가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공통분모임을 나는 안다. 그리고 서점의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무언가 열심히 읽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또는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의 제목만이라도 알고 싶은 지나친 갈증이 하나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는 아마도 오랫동안 책을 사랑한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내가 본격적으로 책을 좋아하게 된 시기가 언제였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육남매의 다섯째였던 나는 도회지에 나가 학교를 다니거나 직장을 다녔던 형이나 누나들과는 달리 여동생과 나는 부모님과 함께 시골에서 살았다. 그때만 하더라도 늘 술에 취해 사셨던 아버지와 하숙을 쳐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셨던 어머니, 그리고 나이차가 많이 나는 여동생과 별 말씀이 없으셨던 할머니는 내가 속했던 반쪽의 가족 구성원이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한 날이면 언제나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처음에는 그 대상이 어머니였다가 다음으로 나와 여동생에게 급기야는 이를 제지하시는 할머니에게로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 발걸음이 늘 무거웠다. 나는 집에 들러 가방만 벗어놓고 밤이 늦을 때까지 친구네 집을 돌며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의 손찌검을 피해 밖으로 돌면서도 집에 남아 있는 여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잊고 지낼 수는 없었다. 나는 그 불안감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친구네 집에 있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우리집에는 책이라곤 거의 없었지만 내가 방문하여 시간을 보냈던 여러 친구들의 집에는 읽지 않은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우습게도 아버지의 폭력 덕분이었다. 나는 현실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책이 좋았다. 언젠가 한 번은 작은 서점 앞을 지나다가 나도 크면 서점 주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생계도 유지하면서 평생 책을 읽으며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중학교 때 도시로 나와 형과 함께 자취를 하면서도 책을 좋아하는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 보고 싶은 책을 구입할 수는 없었지만 도서관 근처에 살았던 까닭에 맘만 먹으면 언제든 책을 빌려 볼 수는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여 내 손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책은 이제 독서의 즐거움과 함께 소장의 기쁨이 되기도 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는 내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들르곤 했던 작은 서점이 있었다. 지하철역을 막 빠져나와 골목길로 접어드는 초입에 위치했던 그 서점은 유리 안쪽의 실내를 환하게 밝혀 놓은 채 나를 유혹하곤 했다. 지금도 나는 아들과 함께 하는 서점 나들이를 좋아한다. 매대에 쌓인 신간들을 둘러 보고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배가 고플 때까지 책을 읽는 재미와 책에 빠져 내게 눈길도 주지 않는 아들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럴 때마다 지금처럼 휴대폰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에 최적의 약속 장소였던 대형 서점의 나른한 시간들을 떠올리곤 한다.
이 책의 저자인 '루이스 버즈비'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책을 좋아하여 서점 직원으로 10년, 출판사 외판원으로 7년을 보냈고, 지금도 일주일에 다섯 번은 서점엘 간다고 한다. 캘리포니아 산호세의 작은 서점 ‘업스타트 크로 앤드 컴퍼니’에서 일한 것을 계기로 그곳에서 4년, '프린터스'에서 6년을 일하고 출판사 외판원으로 7년 등 삶의 대부분을 서점에서 보냈던 그는 이 책에서 탐서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책과 서점의 역사, 위대한 출판업자와 출판의 역사 및 서점만이 갖는 독특한 분위기 등 그가 경험하고 느꼈던 전반적인 것들을 흥미롭게 기록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은 디지털 세대를 살았던 요즘의 젊은이들에게는 그 느낌이 나와 다를지도 모른다. 그저 인터넷 클릭 몇 번으로 자신이 원하는 책을 언제든 주문할 수 있는 요즘, 굳이 시간을 따로 내어 서점을 방문하고, 번잡한 사람들 틈에서 몇 번이고 어깨를 부딪혀가며 책을 고를 까닭이 그들에게는 없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서점에서 보내는 느긋한 시간과 천천히 흐르는 일상과 서점에서 나왔을 때 느끼는 약간의 허기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겪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임에 틀림없다.
"도서 문화 literary culture 는 우리 사회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역할은 막중하다. 사람들은 서점에서 그 문화를 만날 수 있으며 수천 년 동안 그치지 않고 흘러온 창조와 상상력의 강에 지류로 결합하기도 한다. 아직까지도 이런저런 생각과 견해를 자유롭고도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고, 또 그런 자리에 스스럼없이 끼어들 수 있는 곳이 바로 서점이다. 서점에서우리는 많은 타인 속에 홀로 서 있는 외톨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타인들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289~290쪽)
작가가 지적하고 있듯 서점은 가상공간이 아닌 현실공간이라는 점에서 요즘의 젊은이들이 자주 찾아야 할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 속에 묻혀 사라져가는 인간 존재의 가치를 한탄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막 한글을 깨친 아이가 떠듬떠듬 책을 읽어내려가는 모습과 그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지켜보는 할아버지의 따스한 눈길 속에서 우리는 또 다시 희망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서점은 바로 그런 곳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