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
마크 보일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먼 산모롱이에 스웨터 보풀처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조막만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절골을 지나 싸리덕에 올랐다.  첩첩산중인 그곳에도 해마다 어김없이 생명이 움트고, 식빵처럼 부풀어오른 활력을 주체할 길 없었던 아이들은 온 산을 누비며 나물을 뜯었다.  태백산맥을 힘겹게 넘은 높새바람이 키 큰 억새를 서걱이며 훑고 지나갈 때 아이들은 쏟아질듯 푸른 하늘을 보며 억새밭에 누워 스르르 눈을 감았다.  마른 갈잎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누군가 더덕 한 뿌리를 캐었는지 진한 더덕향이 바람을 타고 생명처럼 번졌다.  흐드러지는 봄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어릴 적 모습이다.  그 풍경과 마른내가 풀풀 나는 바람과 온 산으로 번져가던 봄의 생기는 지금도 어제 일처럼 또렷하기만 하다. 나 자신이 어릴 적 모습을 떠올리며 그 아름다움과 평화에 온전히 안길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지금도 그 시절을 그리워 하는 것처럼 인간의 감성은 언제나 아름다움을 향하는가 보다.  그것은 논리의 영역이 아니기에 옳고 그름의 영역과는 무관하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감동할 수 았는 아름다움은 손상되지 않은 자연을 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처럼 자연 속에서 누렸던 아름다움은 생명력이 길고 무한한 평화와 행복을 안겨준다.

 

평화와 행복, 그리고 아름다움은 금슬이 좋은 부부처럼 언제나 함께 온다.  나는 이제껏 평화로운데 아름답지 않거나, 아름답지만 평화롭지 않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아름다움 속에서 누렸던 삶은 언제나 행복했었다.  본론에서 조금 빗나간 애기지만 플라톤에서 시작된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적 사고는 칸트에 이르러 '개념 없이 보편적으로 만족을 주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렇기에 아름다움은 영원성을 부여받는다.  그것이 옳다면 영원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 달리 말하면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석유자원과 물질문명의 풍요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길들여지고 돈을 매개로 한 생산과 소비의 분리는 대대로 이어져 오던 생존의 기술을 모두 잃게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현대인에게 아름다운 삶은 한낱 꿈에 불과한, 그야말로 원시 외계의 삶이 되고 말았다.  자급자족의 삶은 이제 내 추억의 한 장면처럼 부질없는 것이 되었다고 여겨야 하리라.  최소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마크 보일이 쓴 <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는 나에게 새로운 희망과 꿈을 안겨주었다.  내가 그렇게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저자는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소비지상주의'에 젖어 정상적인(?) 삶을 살던 영국의 한 젊은이였다.  경제학과 경영학을 전공한 그가 돈 한푼 안 쓰고 1년을 살아보기로 작정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오히려 돈을 많이 벌어 봉사와 자선의 길로 나서겠노라고 선언하는 쪽이 훨씬 잘 어울림직한데 말이다.  아일랜드의 중류 가정에서 성장한 저자는 한때 프로 축구 선수가 되어 어마어마한 부를 일구는 것이 꿈이었다고 말한다.  아일랜드에서 4년 동안 경영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6년 동안 영국에서 유기농식품 회사들을 관리했던 그가 이런 모험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회사에 들어가서 가능한 한 빨리, 또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벌겠다던 당초의 계획을 접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간디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간디가 남긴 수많은 어록 중에서 나의 심금을 울린 것은 이 한 마디였다.  "이 세상이 변하기를 원하거든 당신 자신이 변화가 되도록 하여라.  당신 혼자만이라도 좋고 수백 만 명이라도 좋다."  문제는 나 자신이 그 변화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17쪽) 

 

사실 돈을 아껴 쓰는 것과 한푼도 쓰지 않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삶에 필요한 웬만한 것들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것들을 알뜰하게 쓰냐냐, 풍족하게 쓰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경제적 능력이나 가치관만으로도 말끔히 해결될 문제이다.  그러나 돈 한푼 안 쓰고 생활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생존에 필요한 여러 요소들, 이를테면 주거와 난방, 주방기구와 식재료, 심지어 걷는데 필요한 신발까지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저자가 원했던 실험은 주변의 사람들과 동떨어진 원시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변화로 이끄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한 삶에는 그가 정한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1. 만 1년 동안 어떠한 돈도 받을 수 없고 지출할 수도 없다는 '노 머니'에 관한 원칙

2. 만약 누군가 그를 초대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판단으로서 '정상'에 관한 원칙

3. 보답에 대한 기대는 전혀 하지 않는 다음 사람에게 베푸는 행위에 관한 원칙

4. 다른 사람의 생활방식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바탕에서 자신의 생활방식을 지켜나가는 타인에 대한 존경에 관한 원칙

5. 자전거로 불가능한 여행일 때만 차를 얻어 타고 그 외의 경우에는 거절하는 '화석연료 반대'에 대한 원칙

6. 평소 예상할 수 있는 청구서에 대해 미리 지급하지 않는 경비 선(先)지급 불가에 관한 원칙

 

이 책은 위에 적은 원칙을 바탕으로 1년 동안 돈 한푼 쓰지 않고 살았던 저자의 생활기록이다.  유통기한이 지난 쓰레기 음식들을 주워 모으고, 채소를 가꾸고, 난로에 불을 지피면서 살았던 1년 간의 삶의 기록은 나 자신에게도 많은 반성을 하게 했다.  석유자원과 돈이 주는 안락과 풍요는 어쩌면 우리 후손의 결핍을 담보로 빌려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삶, 평화와 행복이 넘치는 삶은 필연적으로 약간의 육체적 고통과 수고가 따른다.  진정 아름다운 사람은 그 수고와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존경을 표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화가 무슨 의미인지도 진정으로 알지 못하면서 평화를 바란다고 주장한다.  평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자이크와 같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나 이 지구와 일상적으로 하는 교류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평화라는 모자이크가 완성된다.  나 개인의 교류를 보면 평화의 진정한 의미와 동떨어져 있을 때가 자주 있다.  나는 너무 바쁘다고 투덜거리고, 다른 사람들이 불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한다고 불평하고, 또 나 자신이 혼자 꿈꿔왔던 것보다 덜 긍정적인 행동을 보였다.  돈을 쓰지 않는 삶도 보다 평화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한 수단으로 시작한 것인데, 이제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다."    (24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