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실시간 검색어를 볼 때가 있다. 내가 실시간 검색어를 신경써야 할 연예인도 아니고 일부러 주목하여 보는 건 아니지만 자동적으로 시선이 가는 경우가 많다. 오늘은 그 검색어 순위 안에 '허경영' 씨가 올라왔다. 그가 리스해서 타고 다니는 롤스로이스의 책임보험료가 미납되어 적발됐다는 기사와 함께. 여담이지만 그가 타는 롤스로이스의 한 달 리스비가 800만 원이라니 그 돈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능력이 좋은 사람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따금 특이한 행동과 허무맹랑한 대선 공약으로 웃을 일 없는 우리를 즐겁게 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제 연예인 다 되었군' 하고 생각했는데 그는 실제로 연예인 맞다. 그의 프로필에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가수이며 소속은 '본좌엔터테인먼트'로 되어 있다. 그는 아마도 19대 대선에도 출마할 모양인데 페이스북에 발표한 그의 대선 공약을 보면 이렇다.

1. 이명박 구속

   (사랑의 열매 1조 기부시 면책)

 

2. 박근혜 부정선거 수사

   (결혼 승락시 면책)

 

3. 새누리당 해체 및 지도부 구속

   (소록도 봉사 5년시 집행유예)

 

4.UN본부를 판문점으로 이전

 

5. 만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건국수당

   매월 70만 원씩 지급(어버이 연합 제외)

 

6. 결혼수당 남녀 각 5000만 원씩 지급

   (재혼시 1/2지급, 삼혼시 1/3)

 

7. 출산수당 출산시마다 3000만 원씩 지급

 

8. 국회의원 출마자격 고시제 실시 -

   국회의원 1/3로 감원

 

9. 정당정치 해산하고 국회의원들은

   무보수 명예직으로

 

10. 몽골과 국가 연합

 

11. 바이칼 호수물 서울시 공급

 

12. 만주땅 국고 환수

 

13.독도 간척사업으로 일본 근해

   500미터 앞까지 영토 확장

 

그의 공약이 이루어질지 어떨지 알 수 없지만 암튼 속은 시원하다. 그는 정말 대한민국에 없어서는 안 될 연예인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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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아이 - 울지 않는 아이가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울지 않는 아이가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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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이 심각하다. 나랏님이 기우제라도 지내야 할 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난 주에 찔끔거리며 내린 비도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그나마 날씨가 푸근하다고 좋아할 일도 아닌 것이 맑은 날이면 중국발 미세먼지로 나라 전체가 먼지에 덮여 시야는 온통 희끄무레 답답하기만 하다. 언제부터였지? 꽤 오래된 듯한데... 아무튼 나는 올 가을 들어 가을다운 가을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한 것만 같다.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불만도 이만저만하지 않다. 그렇다고 나의 불만을 누구에겐가 속 시원히 토로할 수도 없으니 애면글면 속만 끓이고 있다. 투명하게 맑은 가을 하늘을 보았던 게 마치 몇십 년은 지난 듯하다.

 

날씨에 대한 불만은 독서에도 영향을 미친다. 답답하고 끈적끈적한 내용의 소설이나 오랜 시간 몰입을 요하는 철학이나 경제학 서적은 일단 제외. 가볍고, 상쾌하고, 쉽게 이해되는, 그렇다고 너무 유치하지도 않은 그런 책에 눈길이 간다. 이 시기에 나의 이런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한 책으로는 에쿠니 가오리의 수필집이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책이 <울지 않는 아이>이다.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자평 속에 책은 막힘 없이 쭉쭉 읽혔다.

 

"내게도 당나귀가 한 마리 있다면 좋겠다. 당나귀와 뒤뜰과 무화과나무와, 산책을 위한 길과 쉴 수 있는 언덕, 그리고 자그마하고 시원한 샘. 그러면 소설 따위 쓰지 않고 '무한하고 평화로우며 덧없는' 해 질 녘의 세계에서 평온하게 살 수 있을 텐데. 나는 선한 것을 좋아한다." (p.30)

 

그녀의 팬은 국내에도 많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는 왠지 에쿠니 가오리의 팬은 날씨에 따라 변동성이 크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예컨대 올 가을처럼 미세먼지가 전국을 뒤덮는 날이 한동안 지속된다거나 장맛비가 한 달 내내 그치지 않고 내린다면 사람들은 다들 '아, 에쿠니 가오리가 생각나는군' 하고 말할 것만 같다. 그런 다음 사무실에서건 집에서건 외출을 삼가한 채 한동안 틀어 박혀 그녀의 책만 읽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날씨마저 우울하여 마음이 평소보다 백 그램쯤 더  무거워지면 나도 모르게 에쿠니 가오리의 가볍고 생기발랄한 문체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에 대한 열렬한 팬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내가 문득 그녀를 생각해 내는 걸 보면 그녀에게는 나도 미처 알지 못하는 묘한 매력이 있구나, 생각하게 된다. 뭐랄까, 그녀의 글에는 복어맑은탕을 한 그릇 쭈욱 들이켰을 때의 개운함이 있다. 입 안에 감도는 텁텁한 느낌이라곤 도무지 찾아 볼 수 없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참을성이 영 없었다. 참을성이 없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기 편한 방향으로 흐른다. 책을 읽느니 마당에서 비눗방울 놀이나 하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어린애였다. 비눗방울 놀이 말고는 그림을 그리고 학종이 접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흐물흐물. 개어놓은 이불 위에 엎드려 그저 뭐라고 주절주절거리고,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잠들어버리는 놀이를 나와 동생은 그렇게 불렀다." (p.64)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과 에세이를 다 합쳐야 고작 서너 권일 뿐이다. 그런 내가 작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하는 것은 조금 건방지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리뷰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글에서는 좀 어떠랴 싶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그녀가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초창기에 썼던 8년 치의 에세이를 모았으니 만큼 이 책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쓴 글이 대부분이다.

 

"결혼이란 참 잔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을 한다는 것은, 가장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가장 되고 싶지 않은 여자가 되고 마는 일이다. 서글프다." (p.146)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멍하니 빨려들 듯 읽고 있노라면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모름지기 자신이 겪었던 특별한 경험을 아주 특별하게 쓸 수 있는 능력이라기보다 평범한 일을 평범하지 않게, 적어도 지루하지 않게 쓸 수 있는 능력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자면 우리가 경험하는 소소한 일상에서의 느낌을 잘 감지하고 그것을 흐트러지지 않도록 잘 갈무리하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책에서 읽는 타인의 감정은 곧잘 공감하면서도 평상시에 내가 느끼는 감정은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 맹추도 그런 맹추가 없다. 에쿠니 가오리의 책 한 권을 다 읽었더니 몸도 마음도 개운해졌다. 뿌옇던 대기도 조금 밝아진 느낌이다.

 

"제목이나 표지의 느낌, 책등이 각이 졌는지 둥그스름한지, 글자의 간격과 활자의 종류, 종이의 색감, 냄새, 감촉, 서점 책꽂이에 아무리 책이 많이 꽂혀 있어도 내 손에 딱 맞춘 것처럼 감기는 책은 당연히 한정되어 있고, 그런 책들은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책이 지닌 '기척' 같은 것." (p.212)

 

정말 그럴까?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다만 날씨와 독서는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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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2 1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13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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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그런 나이에서 저는 이제 한참이나 멀어진 듯합니다. 하기야 그 무렵에도 저는 앞뒤 가리지 않고 저지를 만한 용기도 없었고, 섣부른 판단으로 누군가로부터의 꾸지람을 자초할 만큼 단순하지도 않았지만 말입니다.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던 순간 저는 거쳐야 할 단계를 뛰어 넘어 아이에서 갑자기 애어른으로 돌변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남보다 일찍 철이 든다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인생에서 단계를 거치지 않고 월반을 한다는 것은 언제나 그에 합당한 고통이 따르를 뿐 아니라 훗날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지난 주말 아침에 산을 오르는데 가늘게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여느 아침보다 조금 더 어두웠고, 나뭇잎에 듣는 빗소리가 경쾌하다 못해 날아갈 듯 부풀었습니다. 빗속에서도 도토리를 모으느라 분주한 청설모 가족과 왠지 쇳소리가 섞인 듯한 까치의 울음 소리가 조용한 숲을 깨우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반가운 단비였던지요! 말못하는 짐승들도 제 고향을 떠나지 않고 저리도 분주한데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떠난 난민들은 다가올 겨울을 어찌 날런지 조금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는 어제 시리아 난민 돕기 성금 모금에 작은 정성을 보탰습니다. 터키 해안에서 익사한 채 발견돼 전 세계 사람들을 큰 충격에 빠뜨렸던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어린이의 시신을 뉴스에서 본 후 그 모습이 내내 제 머릿속을 맴돌았고, 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된 자로서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물론 그보다 더 끔찍한 일도 있었지요. 사우디아라비아 연합군의 결혼식장 공습으로 인해 예멘의 무고한 시민들이 백 명 넘게 죽기도 했으니까요.

 

오늘 아침부터 저는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을 읽었습니다. 예전에 읽고 한동안 잊고 지내던 소설이지요. 이 소설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은 '드레스덴 폭격'입니다. 작가는 스물 한 살의 나이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합리적인 어떤 이유도 없이, 단지 잦은 런던 공격에 대한 보복성의 상징적 의미만 있었던 '드레스덴 폭격'에서 '우연히'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연합군에 의해 자행된 1944년의 잔인한 사건이었죠. 3,900여 톤에 해당하는 폭탄이 떨어졌고 이로 인해 13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들 중 다수는 민간인이었다고 합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인한 희생자 수가 7만을 조금 상회하였을 뿐이니 '드레스덴 폭격'의 참혹함은 말로 다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작가의 체험을 메타픽션의 기법으로 소설화한 <제5도살장>에서 주인공인 빌리 필그림의 참전 내용은 보네거트의 경험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설 속의 검안사 빌리 필그램은 작가의 분신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그는 스무살에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고, 커트 보네커트와 마찬가지로,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 포로가 되어 드레스덴으로 후송됩니다. 이야기는 빌리 필그램이 트라팔마도어 우주인에게 배운 순간이동기술법에 의해 자유자재로 시간 이동을 하면서 진행되는 까닭에 시간적 혹은 공간적으로 순차적 진행의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은 몹시 혼란스럽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순간이동기술법이라는 건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빌리 필그램의 착각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이 소설에는 대단한 인물이 거의 없으며, 극적인 갈등도 거의 없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심하게 병들고 심히 무력한, 거대한 힘의 노리개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전쟁의 중요한 영향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대단한 인물이 될 마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p.191)

 

이와 같은 해체적 배열이 갖는 특징은 정신 분열증입니다. 작가는 빌리의 의식 속에 끼여드는 무의식적 상흔들을 환기시키기 위해 이와 같은 방식을 의도적으로 도입한 듯 보입니다. 끔찍했던 전쟁의 기억 때문에 작가도 어쩌면 빌리처럼 정신 분열증을 겪었었는지도 모르지만 분열증과 같은 파편적 글쓰기는 참상을 그대로 전달하기 보다는 이미 병들어버린 현실에 대한 잔혹한 냉소, 선량한 사람들의 비극적 운명, 그를 통한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 또한 작가의 생각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테구요.

 

"하느님, 저에게 허락하소서.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늘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p.77)

 

이 책에 등장하는 위의 시는 많이 들어보셨을 줄 압니다. 커트 보네거트가 누구인지, <제5도살장>이 어떤 종류의 책인지 일체 알지 못했던 독자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작금의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런지요.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심'을 기원하기보다는 저는 '내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염원하고 싶습니다.

 

"뒷날, 트랄파마도어인들은 빌리에게 생의 행복한 순간들에 관심을 집중하고 불행한 순간들은 무시해 버리라고 충고한다. 영원이란 놈이 그냥 지나치지 못한 아름다운 것들만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빌리에게 이와 같은 선택적 집중이 가능했더라면, 그는 마차 뒤꽁무니에서 햇볕을 듬뿍 받으며 꾸벅꾸벅 졸던 그 순간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택했을 것이다." (p.228)

 

오늘은 가을 햇살이 유난히 좋군요. 내일은 고3 수험생들의 수학능력시험이 있는 날이구요. 이 책을 읽는 사람은 혹 인생의 그 모든 과정이 허무하다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는 소설에서 세상을 하직하는 모든 이들에게 후렴구처럼 말합니다. "그렇게 가는거지."(So it goes.) 이 말을 들으면 이 세상을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전쟁에 대한 회의감도 함께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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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5-11-11 13:18   좋아요 0 | URL
우앗 며칠전에 구하려 했는데 없어 중고 알아보고 있었어요.
무척 반갑네요 :)

꼼쥐 2015-11-12 15:34   좋아요 1 | URL
아,그러셨군요. 지금 이 책은 대부분 출판사에서 품절인 것 같더라구요.

다락방 2015-11-11 16:13   좋아요 1 | URL
이 책이 몇 년째 책장에 꽂혀있는데 이제 읽어봐야겠네요.

꼼쥐 2015-11-12 15:38   좋아요 0 | URL
언젠가 도서관에서 다락방 님이 쓴 책 한 권을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어요. 저는 책을 출판한 사람이면 무조건 존경하고 보는 습관이 있어서 `우와, 대단한 분이시구나!` 생각하면서 다락방 님의 블로그에 방문하면서도 댓글은 달지 못하고 늘 눈팅만 했었죠. 이렇게 제 블로그에 다락방 님이 직접 댓글을 남겨주시다니 정말 놀랐어요. 더없이 반갑구요. 고맙습니다. ^^
 

또 다른 내일처럼 오늘을 맞는다.

새벽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숲은 어둑신했고, 한 발 들여놓기도 꺼려질 정도로 음산하고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밤이 길어진 요즘 새벽 등산길은 언제나 힘이 든다. 어디서 불이라도 난 것인지 소방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저쪽 끝으로 내달렸다. 늘 잠에 목마른 회사원들의 아침잠을 방해하면서. 등산로는 낙엽으로 가득하다. 나와 같은 등산객을 놀래킬 생각이 영 없었던지 영민한 청설모가 기척을 했다.

 

낮에 점심을 먹고 근처 공원을 잠시 걸었다. 소화도 시킬겸 겸사겸사 나선 길이었다. 공원 한 귀퉁이에서 할머니 한 분이 단감을 팔고 있었다. 잘 익은 담감을 비닐 봉지에 가득씩 담아 산책로를 따라 주욱 늘어놓고는 벤치에 앉은 또 다른 할머니 몇 분과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곳을 천천히 지나치는데 행색이 초라한 할아버지 대여섯 분이 우루루 몰려와서는 다짜고짜 단감이 얼마냐고 물었다. 한 봉지에 만 원이라는 말에 할아버지 한 분 왈 "하나 사서 안주 삼아 술이나 한잔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같이 온 할아버지들이 너도 나도 "하나 사 봐." 하면서 부추겼다. 할 일은 없고, 주머니 사정은 어렵고, 그러면서도 뭔가 재미있는 일을 찾던 그들에게 '술'이라는 말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었나 보다.

 

노란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낮게 드리운 하늘.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만 같은 우울한 날씨가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국정화 교과서를 밀어부치는 정부 여당은 마치 이것이 마치 국민과의 한판 전쟁이라도 벌이는 것인 양 연일 떠벌리고만 있다. "이거 지면 우리나라 망한다." 고 하는 놈이나 서울시 교육청의 친일인명사전 배포 계획에 대해 "서울시교육청은 반대한민국적, 반교육적인 이런 결정을 철회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놈이나 다 그놈이 그놈이겠지만 이런 미친 놈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니 대한민국의 꼬라지가 이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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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상 - 비밀 노트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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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3부작으로 된 이 책은 작가의 경험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1935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작가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성장하였고, 14세 때 기숙학교에 입학하는 바람에 가족과 떨어져 생활했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여파를 피해 21세의 나이로 조국을 떠나 스위스에 정착한다. 역사교사인 남편과 갓난아이의 단촐한 가족 구성원이었지만 지독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5년 동안 시계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시계공장도 그만두고 남편과도 헤어진다. 소설을 쓰기 위해 불어를 공부했고, 시와 희곡으로 출발했던 그녀의 작가 생활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1986년 내놓은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중 첫번째 작품인 <비밀노트>로 그녀는 유러피안 프라이즈 불문학 부분(the European prize for French literature)을 수상했고, 책은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상) - 비밀 노트>는 작가와 그녀의 오빠를 모델로 쓴 소설이며 전쟁 상황에서의 인간성 파괴를 그리고 있다. 대도시의 전쟁을 피해 소도시에 있는 외할머니 댁으로 보내진 쌍둥이 형제를 주인공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할머니 댁에 도착한 순간부터 쌍둥이 중 한 명이 국경을 넘을 때까지 그들이 보고, 듣고, 경험했던 모든 이야기들이 일기 형식으로 기록된다. 그야말로 비밀 노트인 셈이다. 글은 일체의 감정을 배제한 듯한 삭막하고 건조한 문체로 진행된다. 우스운 얘기를 무표정한 얼굴로 말할 때 더 배꼽을 잡게 되는 것처럼 전쟁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인간성과 도덕이 상실된 인간 군상의 적나라한 모습이 그저 담담하게 그려진다. 순수해야 할 열 살 전후의 아이들에게 비친 생존의 현장은 참혹하다기보다 끔찍하다. 그런 현장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더 잔인한 모습으로 성장한다.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할머니의 집은 소도시의 외딴 마을에서도 5분쯤 더 걸어들어 간 곳에 있다. 그 다음에는 흙먼지만 이는 길이 이어지다가 그나마 울타리로 막혀 있다. 더 이상은 갈 수 없는 곳으로, 거기에는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다. 그는 기관총과 쌍안경을 가지고 있으며, 비가 올 때는 초소에 들어가 있다. 우리는 나무들로 가려져 있는 그 울타리 너머에, 비밀 군사기지가 있고, 그 기지 뒤에는 국경선과 다른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안다." (p.5)

 

할아버지와 사별하고 혼자가 된 할머니는 마을에서 '마녀'로 불린다. 할아버지를 독살했다는 소문과 억척스러운 생존 본능 때문이다. 할머니는 닭과 염소 등 동물들을 돌보고 농사를 지으며 돈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시장에 내다 팔든가 지하창고에 숨긴다. 남는 방 하나를 외국군 장교에게 세를 주었으므로 쌍둥이는 부엌에서 생활한다. 할머니 방과 장교가 머무는 방은 늘 잠겨 있다. 조금씩 적응이 된 아이들은 만능 열쇠를 만들고, 폭력에 길들여지기위해 서로에게 매질을 가하는가 하면 어떤 욕설이나 모욕적인 말에도 감정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서로에게 욕을 하며, 성경을 보며 읽고 쓰는 공부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악기와 마술까지 배운다. 전쟁은 아이들로 하여금 독종을 지나 괴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할머니집 인근에는 언청이 딸과 아주머니가 산다. 토끼주둥이로 불리는 언청이 딸은 시내에서 구걸을 하거나 이따금 신부님에게 자신의 아랫도리를 보여주고 돈을 받는다. 쌍둥이는 물을 긷기 위해 샘으로 갔던 토끼주둥이를 괴롭히는 불량배들로부터 그녀를 구해주기도 하고, 신부님을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기도 하고, 도둑질도 서슴지 않는다. 외국군 장교로부터 외국어를 배우기도 하고 귀머거리나 벙어리인 양 행동하기도 한다. 살기 위해서라면 그들이 못할 짓은 아무것도 없다.

 

"전능하신 하느님, 이 아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든지, 용서하여주십시오. 이 추악한 세상에서 길 잃은 어린 양들입니다. 이 타락한 시대의 제물이 된 이 어린 것들은 스스로 저지른 짓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고 있사옵니다. 바라옵건대, 이 더럽혀진 어린 영혼을 구해주시고 당신의 무한한 자비와 축복 속에서 정화시켜주시옵소서. 아멘." (p.168)

 

전쟁이 끝나고 쌍둥이의 엄마가 아빠가 아닌 다른 남자와 함께 갓난아이 하나를 안고 나타난다. 쌍둥이는 같이 가자는 엄마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는 사이, 갑자기 날아온 폭발물에 의해 엄마와 아기가 맞아 죽는다. 남자는 이내 떠난다. 얼마 후 종군기자로 참전했던 아버지가 쌍둥이를 찾아 온다.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아내가 어디 있는지 추궁한다. 죽어서 집 앞에 묻었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결국 묻었던 자리를 파내자 뼈만 남은 엄마와 아기가 나온다. 아이들은 그 뼈를 자신의 다락방에 걸어둔다. 뇌출혈로 한번 쓰러졌던 할머니는 자신이 모은 재산을 쌍둥이에게 물려주고 죽는다. 사상범으로 의심받는 아버지는 해외도피를 결심하고 국경을 넘으려 한다.

 

"- 가세요, 아빠. 다음 번 순찰은 20분 후에 있어요.

아빠는 팔 아래 판자 두 개를 끼고 앞으로 나아가서 판자 하나를 바리케이드에 기대놓고 기어올라간다. 우리는 큰 나무 뒤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손으로 귀를 막고 입을 벌린다. 폭발음이 들린다. 우리는 미리 준비했던 다른 판자 두 개와 보석이 든 마대를 들고 철조망까지 달린다. 아빠는 두번째 철조망 직전에 쓰러져 있다. 그렇다, 국경을 넘어가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누군가를 앞서 가게 하는 것이다. 마대를 쥐고, 앞서간 발자국을 따라간 다음, 아빠의 축 늘어진 몸뚱이를 밟고, 우리 가운데 하나만 국경을 넘어갔다. 남은 하나는 할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p.219)

 

자신의 아버지를 이용하여 쌍둥이 중 한 명이 국경을 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그들에게 죄의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군인 여러 명에게 강간을 당하고 죽은 토끼주둥이를 보았을 때도, 신부님을 돌보며 자신들의 옷을 세탁해주고 목욕도 시켜주던 여자가 죽었을 때도 쌍둥이는 그저 덤덤할 뿐이다.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한 이 소설은 전쟁의 광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더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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