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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상 - 비밀 노트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3부작으로 된 이 책은 작가의 경험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1935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작가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성장하였고, 14세 때 기숙학교에 입학하는 바람에 가족과 떨어져 생활했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여파를 피해 21세의
나이로 조국을 떠나 스위스에 정착한다. 역사교사인 남편과 갓난아이의 단촐한 가족 구성원이었지만 지독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5년 동안
시계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시계공장도 그만두고 남편과도 헤어진다. 소설을 쓰기 위해 불어를 공부했고, 시와 희곡으로 출발했던
그녀의 작가 생활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1986년 내놓은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중 첫번째 작품인 <비밀노트>로 그녀는 유러피안
프라이즈 불문학 부분(the European prize for French literature)을 수상했고, 책은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상) - 비밀 노트>는 작가와 그녀의 오빠를 모델로 쓴 소설이며 전쟁 상황에서의 인간성 파괴를 그리고
있다. 대도시의 전쟁을 피해 소도시에 있는 외할머니 댁으로 보내진 쌍둥이 형제를 주인공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할머니 댁에 도착한 순간부터 쌍둥이
중 한 명이 국경을 넘을 때까지 그들이 보고, 듣고, 경험했던 모든 이야기들이 일기 형식으로 기록된다. 그야말로 비밀 노트인 셈이다. 글은
일체의 감정을 배제한 듯한 삭막하고 건조한 문체로 진행된다. 우스운 얘기를 무표정한 얼굴로 말할 때 더 배꼽을 잡게 되는 것처럼 전쟁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인간성과 도덕이 상실된 인간 군상의 적나라한 모습이 그저 담담하게 그려진다. 순수해야 할 열 살 전후의 아이들에게 비친 생존의
현장은 참혹하다기보다 끔찍하다. 그런 현장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더 잔인한 모습으로 성장한다.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할머니의 집은 소도시의 외딴 마을에서도 5분쯤 더 걸어들어 간 곳에 있다. 그 다음에는 흙먼지만 이는
길이 이어지다가 그나마 울타리로 막혀 있다. 더 이상은 갈 수 없는 곳으로, 거기에는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다. 그는 기관총과 쌍안경을 가지고
있으며, 비가 올 때는 초소에 들어가 있다. 우리는 나무들로 가려져 있는 그 울타리 너머에, 비밀 군사기지가 있고, 그 기지 뒤에는 국경선과
다른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안다." (p.5)
할아버지와 사별하고 혼자가 된 할머니는 마을에서 '마녀'로 불린다. 할아버지를 독살했다는 소문과 억척스러운 생존 본능 때문이다.
할머니는 닭과 염소 등 동물들을 돌보고 농사를 지으며 돈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시장에 내다 팔든가 지하창고에 숨긴다. 남는 방 하나를 외국군
장교에게 세를 주었으므로 쌍둥이는 부엌에서 생활한다. 할머니 방과 장교가 머무는 방은 늘 잠겨 있다. 조금씩 적응이 된 아이들은 만능 열쇠를
만들고, 폭력에 길들여지기위해 서로에게 매질을 가하는가 하면 어떤 욕설이나 모욕적인 말에도 감정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서로에게 욕을 하며,
성경을 보며 읽고 쓰는 공부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악기와 마술까지 배운다. 전쟁은 아이들로 하여금 독종을 지나 괴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할머니집 인근에는 언청이 딸과 아주머니가 산다. 토끼주둥이로 불리는 언청이 딸은 시내에서 구걸을 하거나 이따금 신부님에게 자신의 아랫도리를
보여주고 돈을 받는다. 쌍둥이는 물을 긷기 위해 샘으로 갔던 토끼주둥이를 괴롭히는 불량배들로부터 그녀를 구해주기도 하고, 신부님을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기도 하고, 도둑질도 서슴지 않는다. 외국군 장교로부터 외국어를 배우기도 하고 귀머거리나 벙어리인 양 행동하기도 한다. 살기 위해서라면 그들이
못할 짓은 아무것도 없다.
"전능하신 하느님, 이 아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든지, 용서하여주십시오. 이
추악한 세상에서 길 잃은 어린 양들입니다. 이 타락한 시대의 제물이 된 이 어린 것들은 스스로 저지른 짓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고 있사옵니다.
바라옵건대, 이 더럽혀진 어린 영혼을 구해주시고 당신의 무한한 자비와 축복 속에서 정화시켜주시옵소서. 아멘."
(p.168)
전쟁이 끝나고 쌍둥이의 엄마가 아빠가 아닌 다른 남자와 함께 갓난아이 하나를 안고 나타난다. 쌍둥이는 같이 가자는 엄마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는 사이, 갑자기 날아온 폭발물에 의해 엄마와 아기가 맞아 죽는다. 남자는 이내 떠난다. 얼마 후 종군기자로 참전했던 아버지가 쌍둥이를
찾아 온다.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아내가 어디 있는지 추궁한다. 죽어서 집 앞에 묻었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결국 묻었던 자리를 파내자
뼈만 남은 엄마와 아기가 나온다. 아이들은 그 뼈를 자신의 다락방에 걸어둔다. 뇌출혈로 한번 쓰러졌던 할머니는 자신이 모은 재산을 쌍둥이에게
물려주고 죽는다. 사상범으로 의심받는 아버지는 해외도피를 결심하고 국경을 넘으려 한다.
"- 가세요, 아빠. 다음 번 순찰은 20분 후에 있어요.
아빠는 팔 아래 판자 두 개를 끼고 앞으로 나아가서 판자 하나를 바리케이드에 기대놓고 기어올라간다.
우리는 큰 나무 뒤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손으로 귀를 막고 입을 벌린다. 폭발음이 들린다. 우리는 미리 준비했던 다른 판자 두 개와 보석이 든
마대를 들고 철조망까지 달린다. 아빠는 두번째 철조망 직전에 쓰러져 있다. 그렇다, 국경을 넘어가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누군가를 앞서 가게
하는 것이다. 마대를 쥐고, 앞서간 발자국을 따라간 다음, 아빠의 축 늘어진 몸뚱이를 밟고, 우리 가운데 하나만 국경을 넘어갔다. 남은 하나는
할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p.219)
자신의 아버지를 이용하여 쌍둥이 중 한 명이 국경을 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그들에게 죄의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군인 여러 명에게
강간을 당하고 죽은 토끼주둥이를 보았을 때도, 신부님을 돌보며 자신들의 옷을 세탁해주고 목욕도 시켜주던 여자가 죽었을 때도 쌍둥이는 그저 덤덤할
뿐이다.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한 이 소설은 전쟁의 광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더 섬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