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푸슬푸슬 눈이 내렸다. 숫제 무게가 나가지 않는 듯한 가벼운 눈이었다. 길 건너편의 중학교 운동장에는 하늘색 운동복 차림의 아이들이 칼바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축구나 농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유리창을 통하여 바라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들의 몸짓은 너울거리는 불꽃처럼 환하고 푸르렀다. 그것은 차라리 몸짓이라기보다 뜨거운 열기였다.

 

이맘때의 어른들은 저마다 한두 가지씩의 우울과 고민을 잿빛 이불처럼 덮어 쓰고 저물어가는 한 해의 쓸쓸한 뒷모습을 배웅한다. 1월이 오기 전의 풍경은 왠지 무겁고 어둡다. 예년에 비해 경기가 안 좋다거나 슬픈 일이 유독 많았던 한 해여서 그런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오래된 관습이라고 해야 옳으리라. 그러므로 어른들에게 있어 12월은 설사 축하해야 할 가볍고 밝은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시종 어두운 표정으로 짐짓 우울을 가장하는 어두운 달이 되곤 한다. 매년 12월이면 깔깔대고 웃는다거나 팔랑팔랑 가벼운 발걸음은 왠지 어색하게만 보인다.

 

주변의 사람들 표정만 보더라도 그렇게 우울할 수가 없다. 마치 내일이면 세상의 종말이 닥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걱정과 근심을 경쟁을 하듯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12월의 그들에게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오직 슬픔과 우울을 나에게 다오 하는 표정으로 작은 걱정과 근심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결기마저 엿보인다. 1월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 사라질 감정이지만 말이다.

 

낮게 가라앉은 하늘과 12월의 우울이 두터운 이불인 양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디. 이럴 때 축하할 일은 가급적 만들지 않는 게 좋다. 축하는커녕 괜히 분위기도 모르는 눈치 없는 사람으로 몰리거나 지금이 그럴 때냐? 하는 식으로 세간의 빈축을 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바보짓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바보처럼 살아야 할 때가 있다. 12월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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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린 시간도 내 삶이니까 - 다시 일어서려는 그대에게
김난도 지음 / 오우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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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을 넘긴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이런 사람이오' 자신있게 내세울 만한 분야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괜히 주눅이 들고 어깨가 움츠러들었던 적이 한 번쯤은 있었으리라 본다. 대학을 졸업하고, 헐레벌떡 취직을 하고, 그러다 또 어물쩡 결혼을 하고, 미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엄마, 아빠가 되고, 육아서 한 권 읽지 않았는데 학부형이 되었으니 살아온 날들에 대해 괜히 멋쩍고 면이 서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위안 아닌 위안이라면 남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지 못한 나와 같은 범인(凡人)들에게 나는 이렇게 위로하고 싶다. 그쯤 살았으면 좋든 싫든 '관계의 달인' 정도는 된 게 아니냐고 말이다.

 

김난도 교수의 신작 에세이<웅크린 시간도 내 삶이니까>에 대한 리뷰를 쓰려는 당초의 계획에서 조금 벗어난 말이지만 나는 이따금 '관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내게는 달리 내세울 만한 분야가 없어서일 수도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맺기에 신물이 난 탓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내가 정치인이나 연예인처럼 억지 웃음으로 사람을 살 정도의 넘치는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내 나이에 모자르지 않게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고 그 관계망 속에서 관계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따금 생각한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좋은 관계란 기본에 충실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부모는 아이의 보호자이자 인생 멘토로서의 역할, 친구는 즐겁게 어울릴 수 있는 상대로서의 역할, 부부는 종족 보존의 역할 등 관계에 있어서의 기본적 역할에 충실하면 관계는 절대 나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할 때 관계 악화의 가장 큰 요소는 '상대방을 미안하게 만드는 것'인 듯하다. 부모가 과도한 관심이나 애정을 쏟음으로써 아이가 미안함을 갖게 되는 것, 친구에게 경제적 편의나 이익을 주선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들게 하는 것 등은 관계 악화의 주범이라는 말이다. 어떤 관계라 할지라도 둘 중 어느 한 사람이 미안함을 느낀다면 그 관계는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끝없이 미안함을 주입하려 한다. 그것이 곧 상대방에 대한 권력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안함을 느끼는 '을'과 미안함을 느끼도록 하는 '갑'의 관계는 언제나 그 한계를 지니게 마련이다. 누군가가 안 돼 보여서 자선을 베풀었다고 할지라도 관계 유지가 우선이라고 생각되어지면 자신이 베푼 자선은 잊어야 한다. 상대방도 잊게 만들 수만 있다면 더더욱 좋겠지만 적어도 미안함을 느끼는 상대방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듯한 태도를 취해서는 절대 안 될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그 틈새로 미안함을 주사하려 한다.

 

삶이 힘들다는 것은 인간 관계가 어렵다는 것과 진배없다. 내가 리뷰를 쓰기에 앞서 인간 관계에 대해 길게 늘어놓은 이유도 작가가 이 책에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관계의 차원에서 절망이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할 대상이 너무 많아 제 능력의 범위를 크게 벗어난 것이다. 그들 중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는 적어도 최악의 결심을 하지는 않는다. 만약 누군가 자살을 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모두가 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책에서 작가는 '1부 그럼에도, 눈부신 날들', '2부 좋은 방황, 비로소 내가 되는 시간', '3부 간절한 것들은 다 일어선다'를 통하여 누구나 절망에 빠질 수 있고, 그 절망을 안고 방황할 수 있으며, 가슴에 새긴 간절함을 통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지금 나를 괴롭히는 바로 그 걱정도 마지막 서랍에 담는다. 그다음엔 동시에 두 서랍이 열리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다. 일할 때는 일거리 서랍만 열고, 집안일을 생각할 때는 가족 서랍만 연다. 어느 순간에도 그 '고통의 서랍'이 동시에 열리지 않도록 집중하는 것이다. 잘 안 되지만, 자꾸 연습하고 노력하면,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고통의 서랍을 임시로 닫아둘 수 있게 된다. 이도저도 안 될 때 쓰는 최후의 방법은 '웅크리는' 것이다. 강력한 천적을 만나 보호색 아래서 잔뜩 웅크린 벌레처럼 마음을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인다." (p.49 ~ p.50)

 

그러나 이런 말도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너는 살 만하니까 그런 말이라도 할 수 있지' 하고 비웃을 때가 있는 것이다. 나와 관계를 맺었던 모든 사람들이 적으로 여겨지는데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의 말이 위로로 들릴 리 없다.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거기에 있다고 본다. 부모는 부모라고, 선생님은 선생님이라고, 형은 형이라고, 누나는 또 누나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사람과의 기본적인 역할 관계는 등한시 한 채 미안함만 주입하려고 열을 올린다는 점이다. 그리고 '미안함'에 기반한 그런 압박과 강요를 '너를 위해서'라는 그럴 듯한 말로 포장하곤 한다.

 

"작년에 아버지와 동년배인 존경하는 장인어른을 떠나 보내기도 했고, 나 자신이 병원에서 짧은 기간이나마 질병과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된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점은 어느덧 내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의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질풍노도 시기에 이르러 당시의 나 못지않게 방황하고 힘들어하는 아들을 보니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희미한 기억 속의 아버지가 선명하게 이해된다. 어쩌면 우리는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공감할 때 진짜 어른이 되는지도 모른다." (p.263)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그동안 과도하게 푸근했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바깥 기온이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마음도 덩달아 추워지는 걸 느낀다. 살 만하다는 사람보다 죽겠다는 사람이 더 많은 걸 보면 우리가 느끼는 세상은 일 년 내내 영하의 날씨에서 맴돌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에서 나도 어쩌면 '나만 위로해 줘' 바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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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배우다
전영애 지음, 황규백 그림 / 청림출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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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들여다 보면 들끓는 내 마음이 보인다. 나처럼 요동치며 들끓는 사람들이, 아니 마음들이 모여 펄떡이는 세상이 되고 파도 치는 세월을 만들었으리라. 얼마 전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던 끔찍한 테러 현장을 뉴스로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세상에 대한 분노는 다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을... 프랑스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또 무차별 공습을 진행중에 있다고 한다. 그것이 언젠가 또 다른 보복으로, 크나큰 분노로 되돌아 올 텐데도 말이다. 지금 당장 속 시원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 폭격으로 죽은 사람들은 뉴스에도 나오지 않고, 누구의 애도도 받지 못함을 안다. 다만 분노의 파도를 조금 더 펄떡이게 할 뿐이라는 것도.

 

전영애 교수가 쓴 <인생을 배우다>를 읽었다. 어제, 오늘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가 이어졌다. 이런 날 한 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운이 좋은 경우다. 다들 밖으로 밖으로만 나돌아 마음이 싱숭생숭, 들쑥날쑥 춤을 추는데 글자인들 온전히 눈에 들어올 리 없다. 나는 책을 다 읽을 동안 과일을 두어 쪽 먹었고, 무심히 켜진 TV 채널을 돌려 보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다음에 읽을 페이지를 확인했다. 좋은 책은 독자를 붙잡아 두는 강한 힘이 있는 법이다. 좋은 벗을 두고 헤어지기가 몹시 서운한 것처럼.

 

"그녀는 마지막 문턱 앞에서 어찌 그리 아름다웠을까. 아름다운 글라디올러스 밭을 내게 보여주려고 힘을 다해 걸었다. 꽃을 지고 가는 내 모습을 사진까지 찍어 보내주었다. 무엇일까, 마지막 문턱 앞에서 사람에게 그런 초인적인 배려의 마음과 아름다움을 부여한 힘은? 주저 없이 고통 곁으로 달려갔던 것, 그냥 잠시 그 곁에 머물러 있었던 것. 그러니까 내가 한 번쯤 잘한 일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 사람이 떠난 빈 자리가 채워질 리는 없지만, 인생의 쓸쓸함이 아주 조금은 달래지는 것 같다." (p.74)

 

제목이 촌스러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책이 더러 있다. 이 책도 그런 책 중 하나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소박하다거나 촌스럽다기보다는 너무나 거창해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좋은 책은 결국 알음알음으로 널리 알려지게 마련이다. 괴테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이면서 서울대 독문학과 교수이기도 한 작가는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만난 소중한 사람들과의 인연, 카프카, 니체 등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야기, 가족과 아이들의 일화를 아주 담담하게 써 내려가고 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왠지 그의 삶에서 향기가 나는 것만 같다. 그것은 비단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자신에게 온 선물, 자신이 사서 간직했던 어떤 것, 부모에게서 받은 유품 등 남들에게는 하등 가치 없어 보이는 물건들에 얽힌 수많은 사연들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무리 사소한 일상이라도,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인연이라도 귀를 쫑긋 세우고 귀담아 들어야 할 것처럼 한눈을 팔기 어렵다. 이따금 가슴 뭉클한 사연에 눈물 한 방울 찔끔 흘려야만 할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남들이 사는 물건 사고, 또는 남들 따라 사고 싶어 안달만 낼 뿐, 참으로 많은 물건들을 내버리는 시대 - 저렇게 함부로 내다버리는 물건들처럼 사람마저도 가치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내버려지는 것이 아닐까 나는 두렵다. 청승맞게도 자꾸, 황량한 땅에서 살아갈 아이들의 메마른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p.63)

 

나태주 시인은 '풀꽃'에서 그렇게 노래하지 않았나. '자세히 보아야/예쁘다// 오래 보아야/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독문학자로 40년간 치열하게 연구하며 학생들을 가르쳐온 작가가 서울대에서 가르치는 '독일 명작의 이해'는 거장들의 작품을 읽고 감상문을 쓴 후, 여러 사람이 토론하고, 학기말에는 책 한 권을 만들어 제출해야 하는 부담이 큰 수업이지만 매번 수강 정원을 초과하는 인기 강의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괴테 연구에 온 열정을 바쳐온 작가의 삶에 감동하지 않을 학생들이 과연 있을까. 대문호 괴테를 오래 보고, 자세히 보아 온 작가의 두 눈에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은 학생들이 과연 있을까.

 

"젊은 날, 늘 눈앞이 캄캄했다. 세상이 온통 어둠이었다.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다림으로 괴로웠다. 그저 괴로웠을 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 내가 저 아득한 어둠을 헤쳐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이 소박한 꽃 앞에서 이런 생각이 든다. 젊은 날 그렇듯 세상이 캄캄했던 것은 내가 그 어둠을 헤쳐서 갈 곳이,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만큼 힘껏 살아온 것 아닐까." (P.284)

 

허형만 시인은 '겨울 들판을 거닐며'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 겨울 들판을 거닐며 /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어설픈 예측이, 쓸모없는 지레짐작이, 내가 가야할 길을 몇 번이나 잘못 들게 하거나, 그로 인하여 쭈뼛거리며 오래도록 서성이며 주저하게 만들었던 그 모든 시간들이 모여 결국에는 이르러야 할 하나의 지향점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젊은 날에는 알지 못한다. 세상살이에 영 어설펐다는 작가의 고백이 젊은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모범답안처럼 읽히는 건 왜일까? 얼마 전 프랑스에서 무고하게 죽은 많은 사람들을 애도하며, 그리고 그 보복 공격으로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갈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짧은 조사(弔辭 )를 한 줄 남긴다.

 

죽음

 

나 또한 뜨거워서

피해버렸네

 

내가 앉았던 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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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묻다 두 번째 이야기 - 지성과 감성을 동시에 깨우는 일상의 질문들 문득, 묻다 2
유선경 지음 / 지식너머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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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그려진 반투명의 기름종이 서너 장을 넘기면 비로소 책이 시작된다. "지성과 감성을 동시에 깨우는 일상의 질문들"이라는 표지글과 "문득, 묻다 두 번째 이야기" 라는 책의 제목, 다시 한 장을 넘기면 '여는 글'과 함께 깨알같은 목차가 이어지고 'Chapter 01 그 사람은 누구일까... 문득, 묻다'로 시작되는 본문. 방송 작가가 쓴 책은 어딘가 모르게 태가 난다. 섬세하다고 할까, 아니면 감성적이라고 할까. 아무튼 왠지 모르게 멋을 부린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용은 없고 겉만 번지르르하다는 부정적인 의미의 말을 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런 책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방송작가가 쓴 책을 그닥 선호하는 건 아니지만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바람처럼 스쳐간다는 걸 나는 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실컷 놀고 돌아온 아이가 제 딴에는 공부가 하고 싶어 책을 펼쳤는데, "너 공부 안 하니?" 엄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안방으로부터 건너오는 것이다. 그럴 때 아이의 가슴에는 불현듯 없던 오기가 불끈 솟아오르고 방금 전까지 온몸으로 퍼지던 공부에 대한 열의는 눈 녹듯 사라지고 만다. 그와 유사하게 방송작가의 글은 광고의 카피처럼 독자의 느낌을 강제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슬픈 내용의 글을 독자가 읽고 '슬프다' 느끼면 그만인데 글의 이곳저곳에 슬프게 느낄 만한 단어를 배치한다거나 직접적으로 말해버리면 괜히 한 번 뻗대보는 철부지 아이처럼 슬픈 글도 슬프지 않은 듯 읽게 된다는 것이다.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이런 선입견을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읽을까 말까 저울질하고 있었다.

 

그러나《문득, 묻다-두 번째 이야기》는 다행히(?) 그런 감상적인 내용의 책은 아니었다. 전편을 읽지 않은 나로서는 책에 대한 일말의 사전 정보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순간적으로 들었다 사라질 것 같은 여러 궁금증들, 알면 좋고 몰라도 불편할 것 없는 그런 질문들에 대해 답하고 있다. 책에는 'Chapter 01. 그 사람은 누구일까... 문득,묻다'에 38가지의 질문이 그리고 'Chapter 02 매일 하다가... 문득, 묻다'에 38가지의 질문이 수록되어 있다. 예컨대 '화투의 '비광' 속 우산 쓴 사람은 누구일까?' 나 '키스하다가 죽을 수도 있을까?'와 같은 일상에서 부딪히는 갖가지 궁금증들에 대해 저자는 상세히 답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묻다' 코너를 통해 질문을 조금 더 확장하기도 한다.

 

"마흔넷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오로지 평화를 향한 열망으로 공군에 자원했다가 세상을 떠난 생텍쥐페리였습니다. 이런 그의 죽음도 안타깝지만, 65년이 지나서야 자신이 생텍쥐페리가 탄 정찰기를 격추시켰다고 고백한 리페르트의 사연도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던 작가의 생명을 본인이 전혀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앗아갔으니까요." (p.18) '누가 생텍쥐페리를 격추시켰을까?' 중에서

 

책을 읽다 보면 '아아,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구나!' 감탄하기도 하고, '아, 이건 그동안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내용이네.' 하고 바로잡게도 된다. 그러나 입사시험의 상식 시험문제로 나올 것도 아니고, 이런 걸 모른다고 누구한테 '그것도 모르느냐?' 퉁박을 맞을 일도 아닌데 굳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 묻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모임이 잦은 연말연시에 아무런 대화도 없이 스마트폰만 들여다 보는 침묵의 모임을 갖느니 차라리 이 책 속의 한 꼭지 에피소드를 들려줌으로써 '와하하' 한바탕 웃을 수 있다면, 그리고 모임에 나온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런 건 어디서 알았느냐' 관심을 끌 수만 있다면 이 책은 얼마나 유용한가. 책값을 하고도 남지 않겠는가.

 

"게다가 코르티솔 수치가 조금만 올라가도 밤새 말똥말똥해질 수 있다고 하지요. 20대 때는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뱃살이나 불면이 따라붙지 않았는데 중년에는 별다른 스트레스가 없는데도 불면과 뱃살이 느는 이유, 이런 생물학적 근거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불면은 앞서 말했듯 상대의 감정을 정확히 이해하는 능력을 저하시켜서 더 부정적으로 느끼게 만들고 갈등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하니 문득, '늙으면 노여움이 많아진다'는 말 역시 영 근거가 없는 말로 들리지 않습니다." (p.332) '나이가 들면 왜 잠이 없어질까?' 중에서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오후가 되어서도 그치지 않고 내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날씨 아니면 술 얘기다. '이러다 우울증에 걸리겠다'는 둥 '일주일 내내 술을 먹었더니 속에서 신물이 넘어온다'는 둥 그렇고 그런 얘기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날씨 탓인지 나도 모르게 우울해지는 건 있지만 요즘 나를 괴롭히는 건 술이나 날씨가 아니라 밤에 문득 잠에서 깨는 일이 잦아졌다는 것이다. 한밤중에 그렇게 깨고나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오곤 한다. '내일 일을 하려면 조금이라도 더 자야지' 생각하면서도 마음뿐이지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게 된다. 나도 나이가 들었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책에서 말하기를 나이가 들면 코르티솔 수치가 조금 높아져 밤새 말똥말똥해진다는 것이다. 한 시간이 아쉬운 취준생이나 고등학교 학생들에게는 부러운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나이가 들면 궁금한 것도 적어진다는데 그런 속설은 나에게 맞지 않는지 나는 여전히 궁금한 게 많다. 문득 저자에게 묻고 싶어진다. 왜 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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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가리키는 나뭇잎 화살표를 따라 이십여 분쯤 올라가면 내가 매일 아침 몸을 푸는 체육공원이 나온다. 말하자면 나는 매일 아침 바람을 등지고 산을 오르는 셈인데, 그럴 때마다 바람은 마치 가기 싫어 하며 뻗대는 아이의 등을 강제로 떠밀며 재촉하는 어른인 양 여겨진다. 나는 앞발을 딛고 뻗대는 세살배기 아이인 양 여겨지고 말이다. 기온이 영하로 곤두박질 친 날은 바람이 더러 싫을 때도 있지만 슬슬 꾀가 나는 겨울철에는 바람이 등을 밀어줄 때가 더 좋다. 심심하지도 않고, 힘도 덜 드는 것처럼 느껴지고...

오늘 아침에는 등에 와닿는 바람의 기운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의 약한 바람이 불었다. 나무에 붙은 메마른 나뭇잎이 그저 서걱거리며 흔들리는 모습에서 '아, 바람이 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이따금 내 발자국 소리에 놀란 산꿩이 푸드덕 날아올랐고, 나도 덩달아 놀라 하늘을 보면 손톱 모양의 그믐달이 둥실 솟아 있었다. 걸음은 다시 새벽의 어둠과 고요 속으로 향한다.

시의 예산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우선순위에서 한참이나 밀린 탓인지 오래된 운동기구는 새로 교체하기보다는 숫제 톱으로 잘라버렸다. 밑동이 심하게 흔들리던 철봉과 평행봉은 베어진 채 스산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 내가 운동을 하는 새벽 시간에 마주치는 사람은 고작 두서너 명. 겨울에는 다들 게으름을 피우는 건지, 운동을 아예 접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사람도 없는 어둠 속에서 홀로 운동을 하고 있는 나를 볼 때면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토록 열성인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 자신이 극성스럽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어차피 때가 되면 죽을 몸, 남들처럼 좀 더 편안히 있다가 가도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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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2-09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ㅡ참 ...아예 철거한 것도 아니고 ..잘라서 간다고요?
민원이라도 ...극성이 아닌 스스로 돌봄이죠.
그게 멋지고요..
잘 ㅡ건강하게 죽는 법 ㅡ^^

꼼쥐 2015-12-10 18:20   좋아요 1 | URL
철봉과 평행봉은 나무 밑동이 썩어서 위험했었는데 교체할 생각은 없는지 그냥 잘라놓기만 했더라구요.
새벽 어둠 속에서 혼자 운동을 하고 있노라면 문득 `이게 뭐하는 짓인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어요. 나도 모르게.

[그장소] 2015-12-10 20:00   좋아요 0 | URL
뭐 ㅡ타인을 위해 하는것이 아니고 스스로를 위해 하는건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드셨담 ㅡ체크를 좀 해보세요 ㅡ어째서 메너리즘에 빠지는가..고?!
자기 만족도가 높아야한다고 보거든요.저는..
누가 봐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꼼쥐님은 그 건강하고 맑은 정신으로 스스로를 잘
컨트롤하는 노후를 원하세요..제가 보기에는..
그래서 존경스럽고..멋지다고 여겨요.
잘사는건 잘 죽는것과 같다는 걸 얼마나 알까요..
그걸 하고 계신거죠..^^
그냥 그렇단 생각입니다.

아 ㅡ철봉과 평행봉이 철근아닌 나무 ㅡ자연 썩기를...흠..그래도 누가 걸려 넘어지기라도 함
어쩌려고..심을때 박아둔 콘크리트 파내는게
아까운모양이죠...그 예산 들이기가..ㅎㅎㅎ

꼼쥐 2015-12-13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명이란 건 제가 어찌할 수 없는 거라는 걸 잘 알기에 운동을 하여 건강을 지킨다 한들 불의의 사고로 죽지 말라는 법이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이따금 드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다 부질없어 보이기도 하구요. 학창시절부터 매일 아침 해온 운동인데 이제는 지겨운 생각도 들고 그렇습니다.

보통은 나무기둥의 밑동이 썩지 않도록 쇠로 만들어진 캡을 씌우던데 그것을 안 씌운 기둥을 땅에 박아 놓아서 이제는 다 썩어버린 것이죠. 그것을 보고 저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어요. 캡을 씌운 기둥은 가격은 높지만 오래 갈 테니 업자들 먹고 살으라고 일부러 담당 공무원이 그렇게 한 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아니면 뇌물을 먹고 그렇게 하는 걸 눈감아 줬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