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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린 시간도 내 삶이니까 - 다시 일어서려는 그대에게
김난도 지음 / 오우아 / 2015년 10월
평점 :
불혹을 넘긴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이런 사람이오' 자신있게 내세울 만한 분야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괜히 주눅이 들고 어깨가 움츠러들었던 적이
한 번쯤은 있었으리라 본다. 대학을 졸업하고, 헐레벌떡 취직을 하고, 그러다 또 어물쩡 결혼을 하고, 미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엄마, 아빠가
되고, 육아서 한 권 읽지 않았는데 학부형이 되었으니 살아온 날들에 대해 괜히 멋쩍고 면이 서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위안 아닌 위안이라면 남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지 못한 나와 같은 범인(凡人)들에게 나는 이렇게 위로하고 싶다. 그쯤 살았으면 좋든 싫든
'관계의 달인' 정도는 된 게 아니냐고 말이다.
김난도 교수의 신작 에세이<웅크린 시간도 내 삶이니까>에 대한 리뷰를 쓰려는 당초의 계획에서 조금 벗어난 말이지만 나는 이따금
'관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내게는 달리 내세울 만한 분야가 없어서일 수도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맺기에 신물이 난 탓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내가 정치인이나 연예인처럼 억지 웃음으로 사람을 살 정도의 넘치는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내 나이에
모자르지 않게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고 그 관계망 속에서 관계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따금 생각한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좋은 관계란 기본에 충실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부모는 아이의 보호자이자 인생 멘토로서의 역할, 친구는
즐겁게 어울릴 수 있는 상대로서의 역할, 부부는 종족 보존의 역할 등 관계에 있어서의 기본적 역할에 충실하면 관계는 절대 나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할 때 관계 악화의 가장 큰 요소는 '상대방을 미안하게 만드는 것'인 듯하다. 부모가 과도한 관심이나 애정을 쏟음으로써 아이가
미안함을 갖게 되는 것, 친구에게 경제적 편의나 이익을 주선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들게 하는 것 등은 관계 악화의 주범이라는
말이다. 어떤 관계라 할지라도 둘 중 어느 한 사람이 미안함을 느낀다면 그 관계는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끝없이
미안함을 주입하려 한다. 그것이 곧 상대방에 대한 권력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안함을 느끼는 '을'과 미안함을 느끼도록 하는 '갑'의
관계는 언제나 그 한계를 지니게 마련이다. 누군가가 안 돼 보여서 자선을 베풀었다고 할지라도 관계 유지가 우선이라고 생각되어지면 자신이 베푼
자선은 잊어야 한다. 상대방도 잊게 만들 수만 있다면 더더욱 좋겠지만 적어도 미안함을 느끼는 상대방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듯한 태도를 취해서는
절대 안 될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그 틈새로 미안함을 주사하려 한다.
삶이 힘들다는 것은 인간 관계가 어렵다는 것과 진배없다. 내가 리뷰를 쓰기에 앞서 인간 관계에 대해 길게 늘어놓은 이유도 작가가 이 책에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관계의 차원에서 절망이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할 대상이 너무 많아 제 능력의 범위를 크게 벗어난 것이다. 그들 중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는
적어도 최악의 결심을 하지는 않는다. 만약 누군가 자살을 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모두가 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책에서 작가는 '1부 그럼에도, 눈부신 날들', '2부 좋은 방황, 비로소 내가 되는 시간', '3부 간절한 것들은 다 일어선다'를
통하여 누구나 절망에 빠질 수 있고, 그 절망을 안고 방황할 수 있으며, 가슴에 새긴 간절함을 통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지금 나를 괴롭히는 바로 그 걱정도 마지막 서랍에 담는다. 그다음엔 동시에 두 서랍이 열리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다. 일할 때는 일거리 서랍만 열고, 집안일을 생각할 때는 가족 서랍만 연다. 어느 순간에도 그 '고통의 서랍'이
동시에 열리지 않도록 집중하는 것이다. 잘 안 되지만, 자꾸 연습하고 노력하면,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고통의 서랍을 임시로 닫아둘
수 있게 된다. 이도저도 안 될 때 쓰는 최후의 방법은 '웅크리는' 것이다. 강력한 천적을 만나 보호색 아래서 잔뜩 웅크린 벌레처럼 마음을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인다." (p.49 ~ p.50)
그러나 이런 말도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너는 살 만하니까 그런 말이라도 할 수 있지' 하고 비웃을 때가 있는 것이다. 나와 관계를
맺었던 모든 사람들이 적으로 여겨지는데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의 말이 위로로 들릴 리 없다.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거기에 있다고
본다. 부모는 부모라고, 선생님은 선생님이라고, 형은 형이라고, 누나는 또 누나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사람과의 기본적인 역할 관계는 등한시 한 채 미안함만 주입하려고 열을 올린다는 점이다. 그리고 '미안함'에 기반한 그런 압박과 강요를 '너를 위해서'라는 그럴 듯한 말로 포장하곤 한다.
"작년에 아버지와 동년배인 존경하는 장인어른을 떠나 보내기도 했고, 나 자신이 병원에서 짧은 기간이나마
질병과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된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점은 어느덧 내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의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질풍노도 시기에 이르러 당시의 나 못지않게 방황하고 힘들어하는 아들을 보니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희미한 기억 속의 아버지가
선명하게 이해된다. 어쩌면 우리는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공감할 때 진짜 어른이 되는지도 모른다." (p.263)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그동안 과도하게 푸근했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바깥 기온이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마음도 덩달아
추워지는 걸 느낀다. 살 만하다는 사람보다 죽겠다는 사람이 더 많은 걸 보면 우리가 느끼는 세상은 일 년 내내 영하의 날씨에서 맴돌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에서 나도 어쩌면 '나만 위로해 줘' 바랬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