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배우다
전영애 지음, 황규백 그림 / 청림출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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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들여다 보면 들끓는 내 마음이 보인다. 나처럼 요동치며 들끓는 사람들이, 아니 마음들이 모여 펄떡이는 세상이 되고 파도 치는 세월을 만들었으리라. 얼마 전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던 끔찍한 테러 현장을 뉴스로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세상에 대한 분노는 다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을... 프랑스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또 무차별 공습을 진행중에 있다고 한다. 그것이 언젠가 또 다른 보복으로, 크나큰 분노로 되돌아 올 텐데도 말이다. 지금 당장 속 시원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 폭격으로 죽은 사람들은 뉴스에도 나오지 않고, 누구의 애도도 받지 못함을 안다. 다만 분노의 파도를 조금 더 펄떡이게 할 뿐이라는 것도.

 

전영애 교수가 쓴 <인생을 배우다>를 읽었다. 어제, 오늘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가 이어졌다. 이런 날 한 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운이 좋은 경우다. 다들 밖으로 밖으로만 나돌아 마음이 싱숭생숭, 들쑥날쑥 춤을 추는데 글자인들 온전히 눈에 들어올 리 없다. 나는 책을 다 읽을 동안 과일을 두어 쪽 먹었고, 무심히 켜진 TV 채널을 돌려 보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다음에 읽을 페이지를 확인했다. 좋은 책은 독자를 붙잡아 두는 강한 힘이 있는 법이다. 좋은 벗을 두고 헤어지기가 몹시 서운한 것처럼.

 

"그녀는 마지막 문턱 앞에서 어찌 그리 아름다웠을까. 아름다운 글라디올러스 밭을 내게 보여주려고 힘을 다해 걸었다. 꽃을 지고 가는 내 모습을 사진까지 찍어 보내주었다. 무엇일까, 마지막 문턱 앞에서 사람에게 그런 초인적인 배려의 마음과 아름다움을 부여한 힘은? 주저 없이 고통 곁으로 달려갔던 것, 그냥 잠시 그 곁에 머물러 있었던 것. 그러니까 내가 한 번쯤 잘한 일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 사람이 떠난 빈 자리가 채워질 리는 없지만, 인생의 쓸쓸함이 아주 조금은 달래지는 것 같다." (p.74)

 

제목이 촌스러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책이 더러 있다. 이 책도 그런 책 중 하나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소박하다거나 촌스럽다기보다는 너무나 거창해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좋은 책은 결국 알음알음으로 널리 알려지게 마련이다. 괴테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이면서 서울대 독문학과 교수이기도 한 작가는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만난 소중한 사람들과의 인연, 카프카, 니체 등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야기, 가족과 아이들의 일화를 아주 담담하게 써 내려가고 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왠지 그의 삶에서 향기가 나는 것만 같다. 그것은 비단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자신에게 온 선물, 자신이 사서 간직했던 어떤 것, 부모에게서 받은 유품 등 남들에게는 하등 가치 없어 보이는 물건들에 얽힌 수많은 사연들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무리 사소한 일상이라도,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인연이라도 귀를 쫑긋 세우고 귀담아 들어야 할 것처럼 한눈을 팔기 어렵다. 이따금 가슴 뭉클한 사연에 눈물 한 방울 찔끔 흘려야만 할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남들이 사는 물건 사고, 또는 남들 따라 사고 싶어 안달만 낼 뿐, 참으로 많은 물건들을 내버리는 시대 - 저렇게 함부로 내다버리는 물건들처럼 사람마저도 가치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내버려지는 것이 아닐까 나는 두렵다. 청승맞게도 자꾸, 황량한 땅에서 살아갈 아이들의 메마른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p.63)

 

나태주 시인은 '풀꽃'에서 그렇게 노래하지 않았나. '자세히 보아야/예쁘다// 오래 보아야/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독문학자로 40년간 치열하게 연구하며 학생들을 가르쳐온 작가가 서울대에서 가르치는 '독일 명작의 이해'는 거장들의 작품을 읽고 감상문을 쓴 후, 여러 사람이 토론하고, 학기말에는 책 한 권을 만들어 제출해야 하는 부담이 큰 수업이지만 매번 수강 정원을 초과하는 인기 강의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괴테 연구에 온 열정을 바쳐온 작가의 삶에 감동하지 않을 학생들이 과연 있을까. 대문호 괴테를 오래 보고, 자세히 보아 온 작가의 두 눈에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은 학생들이 과연 있을까.

 

"젊은 날, 늘 눈앞이 캄캄했다. 세상이 온통 어둠이었다.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다림으로 괴로웠다. 그저 괴로웠을 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 내가 저 아득한 어둠을 헤쳐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이 소박한 꽃 앞에서 이런 생각이 든다. 젊은 날 그렇듯 세상이 캄캄했던 것은 내가 그 어둠을 헤쳐서 갈 곳이,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만큼 힘껏 살아온 것 아닐까." (P.284)

 

허형만 시인은 '겨울 들판을 거닐며'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 겨울 들판을 거닐며 /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어설픈 예측이, 쓸모없는 지레짐작이, 내가 가야할 길을 몇 번이나 잘못 들게 하거나, 그로 인하여 쭈뼛거리며 오래도록 서성이며 주저하게 만들었던 그 모든 시간들이 모여 결국에는 이르러야 할 하나의 지향점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젊은 날에는 알지 못한다. 세상살이에 영 어설펐다는 작가의 고백이 젊은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모범답안처럼 읽히는 건 왜일까? 얼마 전 프랑스에서 무고하게 죽은 많은 사람들을 애도하며, 그리고 그 보복 공격으로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갈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짧은 조사(弔辭 )를 한 줄 남긴다.

 

죽음

 

나 또한 뜨거워서

피해버렸네

 

내가 앉았던 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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