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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 나는 가급적 이동을 삼간 채 꼼짝 않고 집에 틀어박혀 있거나 어쩌다 외출을 하더라도 가까운 산을 가볍게 오르거나 집 근처의 마트에서 장을 보는 정도의 지극히 제한적인 활동만 한다. 마치 동면을 하듯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귀찮아서일 뿐인데, 이 시기에 어쩌다 뉴스를 보게 되면 내가 마치 상당히 비정상적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바닷가까지 차를 몰고 가자면 대여섯 시간은 족히 걸리는 그 험난하고 무대책의 고속도로를 향해 사람들은 끊임 없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어떤 불편도 감수하겠다는 듯 용감하게 길을 나서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혹시 나는 어린왕자가 사는 B612 소행성에서 태어난 외계인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는 말이다. 나는 오늘도 뒹굴뒹굴 시간만 보내다가 볼 만한 책을 뒤적이고 있다. 뒤적뒤적~~

 

 

내가 황경신 작가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모두에게 해피엔딩' 을 읽은 후였다. 그때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도, 글이 이루어지는 신선한 문체도, 작품의 소재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전작 읽기를 시도한 적은 없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그럭저럭 읽다 보니 거지반 읽은 듯하다. 작가의 신작이 왠지 반갑다.

 

 

 

 

 

 

 

 

작가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아마도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을 통해서였겠지만 나는 그 책이 그닥 뛰어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책이 형편없다는 게 아니라 작가의 역량에 비해 작품이 떨어진다고 할까, 아니면 대중을 타깃으로 쓴 상업적 성격이 짙다고 할까 아무튼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나는 그녀가 쓴 '마음의 서재'나 '헤세로 가는 길'이 더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생텍쥐페리를 소재로 쓴 정여울 작가의 에세이인지라 은근 기대가 된다.

 

 

 

 

 

 

 

방송작가 김경희의 부탄 여행기를 고른 이유는 나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제목에서 딱 멈춰섰을 수도 있고, '김경희'라는 이름에 시선이 갔을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다. 이맘때면 움직이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나의 성향에 대한 반발심리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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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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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것은 어쩌면 '이해'라기보다 체념에 가까운 굴복이라고 하는 게 옳겠지만, 아무튼 세상에 산재하는 여러 부조리를 이해한다는 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혹은 온 지구상에서 파편화 된 개인으로서의 자신은 매우 보잘것없고 미미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거대한 벽으로서 존재하는 부조리, 개인의 힘만으로 바로잡는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을 때의 무기력, 그래도 정의로운 신은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 우리가 그럼에도의 삶보다는 그러므로의 순응적 삶을 선택하는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일지 모른다. 도덕적 의식과 실재하는 삶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미약한 존재로서의 우리는 영웅의 출현이나 신의 강림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폴 오스터의 <공중 곡예사>는 독자들에게 얼핏 황당한 이야기로 비칠 수 있지만 작가는 주인공 월트의 삶을 통해 아홉 살 소년이 어떻게 부조리한 삶을 헤쳐가고 있는지 상세히 그려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나약함과 부조리한 삶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1924년, 세인트 루이스의 한 거리에서 예후디 사부는 거리의 부랑아였던 월터 클레어본 로울리를 제자로 선택한다. 예후디 사부는 거리를 전전하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던 아홉 살의 월트에게 열세 번째 생일을 맞는 날까지 하늘을 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당시에 월트의 보호자였던 슬림 외삼촌에게서 월트를 빼내 캔자스의 어느 농가로 그를 데려간다. 그곳에는 사부가 돌보고 있던 이솝과 수 아주머니가 있었다. 이솝은 똑똑하지만 몸이 불구인 흑인 소년이었고, 수 아주머니는 두 번째 결혼한 남편으로부터 참혹한 폭력에 시달리다 사부에게 극적으로 구출된 마음씨 착한 인디언 여인이었다.

 

월트는 그곳에서 하늘을 날기 위한 33단계의 혹독한 훈련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아홉 살의 소년이 견디기에는 힘에 겨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근본적으로 예후디 사부를 비롯한 이솝과 수 아주머니를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월트는 몇 번이나 탈출을 시도한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의 탈출은 쉽지 않았고 그때마다 번번이 예후디 사부에게 붙잡히곤 했다. 또 다시 탈출을 시도하던 월트가 눈보라에 갇혀 죽을 고비를 겪게 되는데 살기 위해 무작정 들어갔던 곳이 위더스푼 아주머니의 집이었고 그녀는 예후디 사부의 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월트의 후원자이자 조력자 역할을 한다.

 

여러 사람의 돌봄과 극진한 간호 덕분에 다시 살아난 월트는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간다. 이솝이 예일 대학의 장학생으로 입학 허가를 받았을 무렵 월트는 드디어 하늘을 날게 되고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간다 싶었던 그 때 생각지도 못한 불행이 그들에게 닥친다. 마을의 3K 단원이 그들의 집에 불을 질러 이솝과 수 아주머니를 살해한 것이다. 위더스푼 아주머니의 집에 머물면서 한동안 슬픔에 잠겼던 그들은 하늘을 나는 묘기를 갈고 닦아 전국 순회 공연에 나선다.

 

"우리에게는 죽은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건 기본적인 법칙이야. 만일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될 거다." (p.155)

 

공연은 순조로웠고 그에 따라 월트는 점점 더 유명해지고 바빠졌다. 공연의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부도 함께 따라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슬림 외삼촌이 그들을 찾아 온다. 외삼촌은 예후디 사부에게 공연 수익금의 일정액을 요구하였고, 예후디 사부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외숙모를 잃고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았던 슬림 외삼촌은 예후디 사부의 냉대에 분개하였고 갖은 욕설과 함께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외삼촌의 교활함과 포기하지 않는 근성을 잘 알고 있었던 월트는 불안에 시달린다.

 

"그 나머지 시간에 나를 계속 따라다니던 온갖 불안감을 생각한다면, 공연은 일종의 정신적 휴식, 내 마음을 괴롭히는 두려움으로부터의 진정제가 되어 주었다. 나는 전에 없이 일에 몰두하면서 그것이 내게 주는 자유와 보호를 만끽했다. 그러는 동안 내 정신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하루에 한 시간씩 원더보이 월트로 바뀌는 아이 월터 롤리가 아니라 공중에 떠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인 철두철미한 원더보이 월트로 바뀌어 갔다. 땅은 일종의 환상, 음모와 망령들이 깔린 위험 지대였을 뿐 아니라,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 또한 모두 거짓이었다." (p.195~p.196)

 

월트의 예상대로 다시 나타난 슬림 외삼촌에게 그는 납치 감금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월트의 공연은 매번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위기는 다른 곳에 있었다. 사춘기가 된 월트는 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거기에 집착하면서 심한 두통과 현기증에 시달리게 되자 더 이상 하늘을 날 수 없게 된다. 그러자 사부는 월트에게 '공중 곡예사(Vertigo)'라는 별명을 붙여 준다. (Vertigo에는 현기증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슬림과 그의 패거리들에게 습격을 받은 사부는 심한 총상을 입고 자살을 하고, 월트는 외삼촌을 죽이고 암흑가로 스며든다. 조직에서 그는 승승장구하여 클럽을 운영하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고 군에 입대한다. 제대를 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그는 제빵 회사에 취직하여 그곳에서 일하던 몰리와 결혼한다. 그것이 어쩌면 하늘을 나는 원더보이 월트가 온전히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법을 익히는 첫번째 단계였는지도 모른다. 월트는 그렇게 몰리와 23년을 살았고 암으로 그녀를 잃었다. 원더보이 월트의 노년은 결국 위더스푼 부인으로 이어지는데...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단 두 번의 쓸 만한 결정을 내렸는데, 그 첫번째는 아홉 살이었을 때 예후디 사부를 따라 기차에 올라 탄 것이고, 두 번째는 몰리 피츠시먼즈와 결혼을 한 것이었다. 몰리는 나를 다시 완전한 인간으로 되돌려 주었다. 내가 뉴어크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어떤 처지였는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하찮은 일이 아니었다." (p.380~p.381)

 

폴 오스터의 이 소설은 1920년대 미국인의 성공과 좌절을 원더보이 월트의 삶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은 다소 황당하고 어이없는 이야기는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성공의 이미지였을 테고, 월트가 성공했던 그 짧은 순간 역시 성공의 덧없음을 말하고 있을 터였다. 월트는 결국 지면에 발을 딛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법을 익히기 위해 그가 어렸을 때 예후디 사부로부터 받았던 혹독한 훈련보다 몇 배나 더 길고 처절한 삶을 경험해야만 했다. 예후디 사부는 죽으면서 그에게 말했었다. '좋았던 시절들을 기억하라'고. 세월의 위대함은 개별적인 인간의 삶을 결국에는 보편적인 어떤 것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모습으로 늙어갈 뿐이다. 결국 우리는 절망을 통해 하늘을 나는 법을 익히고 하늘을 날았던 기억으로 자신에게 다시 찾아온 절망의 순간을 견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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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중 - 타인의 증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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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기분이라는 게 언제든 뜯었다 붙일 수 있는 싸구려 벽지처럼 마음을 먹는다고 쉽게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평소에 하지 않던 싱거운 농담 몇 마디를 던지고 나면 그럭저럭 나아질 때가 있습니다. 되지도 않는 농담 몇 마디에 우울했던 기분이 갑자기 좋아지는 것 같지는 않고 조금 가벼워진다고나 할까, 아무튼 우울하거나 심각했던 일들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버거워만 보이던 세상 일들이 '까짓것' 하면서 한껏 허세를 부리게도 되죠. 한일 위안부 협상 발표가 있었던 엊그제, 기분도 꿀꿀해서 괜한 농담을 몇 마디 던졌더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무슨 좋은 일 있느냐'며 되묻더군요. 평소 위트와 농담에는 재능이 없는 사람이란 걸 잘 아는지라 '더 이상의 썰렁개그는 참아주세요' 하는 의사표시였는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다 보면 작가의 모국인 헝가리도 '지랄 같은 역사를 가진 나라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클라우스가 헝가리의 역사가 부끄러워 국경을 넘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상) - 비밀 노트>의 마지막 부분에서 쌍둥이 중 한 명인 클라우스는 국경을 넘어 떠나고 다른 한 명의 쌍둥이인 루카스는 할머니 집에 홀로 남게 됩니다. 소설의 구성을 복잡하게 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중) - 타인의 증거>에서 클라우스와 루카스의 삶을 교차하며 보여주는 것도 그럴 듯해 보입니다만, 작가는 전적으로 할머니 집에 남은 루카스를 위주로 소설을 전개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클라우스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클라우스는 떠났고 루카스는 남았습니다. 혼자가 된 루카스는 자신의 삶을 추스르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합니다. 가축을 돌보고, 농사일을 하며, 늙어 거동조차 어려운 신부님의 끼니를 챙기고 소일거리 삼아 같이 체스를 두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근친으로 기형아를 낳은 야스민을 만나게 됩니다. 루카스보다 두 살 위인 야스민은 자신의 아이 마티아스를 버릴 생각이었죠. 루카스는 자신의 집에서 그들과 함께 살게 됩니다. 루카스는 신체적으로는 불구이지만 똑똑하고 총명한 마티아스를 유난히 예뻐합니다. 혁명의 여파로 웬만한 책은 모두 사라져버린 까닭에 루카스는 도서관을 찾게 되고, 그곳에서 클라라를 만납니다. 루카스는 엄마뻘인 클라라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매일 밤 마을의 끝에 있는 그녀의 집을 찾아갑니다.

 

클라라의 남편 토마스는 혁명의 와중에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클라라는 아무도 찾지 않는 도서관을 지키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지요. 온통 클라라에게 마음을 뺏긴 루카스를 뒤로 하고 야스민은 도시로 떠납니다. 그녀의 아이인 마티아스는 오롯이 루카스의 책임으로 남겨집니다. 루카스는 마을의 외곽에 있던 할머니의 집을 처분하여 빅토르 씨의 서점을 인수합니다. 순전히 마티아스를 위해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마티아스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어떻게든 아이들과 어울려보려 했지만 극심한 따돌림과 폭력으로 결국 학교를 포기하게 됩니다. 루카스는 홀로 남겨진 마티아스를 위해 또래의 아이들에게 서점을 개방합니다. 책일 읽고 그림도 그릴 수 잇는 공간으로 만든 것이지요. 그곳에 아그네스와 사무엘이 방문합니다. 아그네스의 남동생인 사무엘은 마티아스와 비슷한 나이였습니다.

 

자신의 남편을 죽인 사람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클라라마저 떠나고 아그네스에게 관심이 있었던 루카스는 그녀와 사무엘을 집으로 초청합니다. 온통 사무엘에게 관심을 두는 듯한 루카스의 태도에 마티아스는 질투를 느끼고 끝내 자살합니다. 어쩌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였을지도 모를 마티아스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자 루카스는 실의에 빠져 지냅니다. 할머니의 묘 근처에 마티아스를 묻고 매일 그곳을 찾던 루카스는 결국 그것도 귀찮아 마티아스의 유골을 캐내어 집으로 가져옵니다. 그의 집에는 루카스의 엄마와 이복 동생, 마티아스의 유골이 걸리게 되었고, 루카스는 페테르 씨에게 서점과 자신이 쓴 비밀 노트를 맡깁니다.

 

"젊은 날에 신을 섬기도록 해라, 불행한 날이 닥치기 전에, 그리고 네 입에서 '나는 살고 싶지 않다'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p.97)

 

루카스가 사라진 마을에 국경을 넘었던 클라우스가 나타납니다. 소설은 이제 결말을 향해 치닫는 듯한 느낌입니다. 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그 모습을 드러내려 하는 것이지요. 페테르 씨는 클라우스에게 루카스가 쓴 비밀 노트 다섯 권과 서점을 넘깁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호적에 등재되지 않았던 클라우스는 세 번에 걸쳐 체류 연장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본국 송환을 요청받습니다. 소설은 'D대사관에 보내기 위해 K시 당국이 작성한 조서'를 끝에 배치함으로써 의미심장한 결말을 예고합니다. 과연 루카스는 실제로 살았던 인물인지, 클라우스는 정말 쌍둥이였는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잊어버리게. 인생은 그런 거야. 모든 게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게 마련이지. 기억도 흐릿해지고, 고통은 줄어들고. 나는 사람들이 어떤 새나 꽃을 기억하듯이 내 아내를 기억하고 있지. 그녀는 인생의 기적이었어. 그녀가 사는 세상은 모든 게 가볍고, 쉽고, 아름다웠지." (p.149)

 

한 개인에게 지난 일이란 거짓말처럼 아득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억이나 기억도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한 나라의 역사를 두고 누구는 왜곡되었다, 그렇지 않다 말하는 것도 어찌 보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자신의 짧은 인생도 다 기억하지 못하는데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역사의 흐름에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도 있게 마련이지요. 예컨대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 있었던 위안부와 같은 인권 유린의 흔적들 말입니다. 그것이 돈을 통한 협상으로, 국가의 이익을 위한 한 단계로 치부되고 덮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그런 큰 실수를 할 수 있어. 우리가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생긴 뒤지." (p.214)

 

인권이 강화되고 잘못된 과거에 대해서는 통렬한 반성을 요구하는 추세에 역행하여 전 세계의 조롱거리가 된 한일 간의 위안부 협상은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만 국론 분열과 반쪽짜리 대한민국은 오늘을 기점으로 다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협상을 서둘렀던 그들의 변명이 몇 가지 거짓말로 구성되었던 것인지 후세의 역사는 낱낱이 밝혀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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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의 마지막은 슬픈 소식으로 마감하고 있다. 그것이 자신의 임기 내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던 대통령의 공명심에 기인하든, 미국의 압력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든 간에 대한민국 정부는 국격을 땅에 떨어뜨리는 또 하나의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았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외교부 장관은 어제 이렇게 말했다.

"일본 정부와 함께 이 문제(일본군 위안부)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 라고.

 

나는 이 말이 대한민국 국민의 의사라고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 대통령과 정부는 분명 내년 총선을 대비한 어떤 가시적인 성과가 급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도 국가의 미래와 역사를 좌우하는 중차대한 협상을 그렇게 무성의하게 졸속으로 처리했다는 것에는 분노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베의 마누라인 아키에는 합의가 있던 어제 보란 듯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가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법적으로 배상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우리 정부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합의에 응햇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일본 측은 외교장관 회담 당시 우리 측에게 '성노예'라는 표현을 쓰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뿐인가. 소녀상 이전 문제도 그렇다. '방구 뀐 놈이 성낸다'는 옛말처럼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아무것도 속 시원히 해결된 게 없는데 우리나라 정부는 단돈 10억 엔에 일본이 껄끄러워 하는 모든 문제를 일시에 해결해줬다.

 

이러한 국민 정서에 대해 정부의 관계자들은 아마도 속으로 이렇게 비웃을지 모른다. "대중은 개 돼지입니다.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라고 말이다. 중국의 신화통신은 일본군 성노예 합의에 대해"일본의 이번 한국과의 합의가 양심이 깨어난 데 따른 결정이 아니라 미국의 압력에 따른 정치적 선택이라는 측면이 더욱 크고 이는 또한 유감"이라고 논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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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2-29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잇..나라 팔아 먹을 ....이란 욕이 새로 생겨야...할지도..

꼼쥐 2015-12-30 17:07   좋아요 1 | URL
어떤 변명으로도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을 듯합니다.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그딴 짓을 했는지...

[그장소] 2015-12-30 19:23   좋아요 0 | URL
불가역적 ㅡ이라니...참 ,
뭐라 할 말이 없어요.
본인들이 아무 합의를 본 일이 없는데
나라가 ㅡ이래서는 안되죠.
이전에 어느 영화에서 그랬죠.
우리 나라 여자분이 해외에서 불법 감금에 오랜 시간 복역까지 한 사건을 영화화 했을때..늬들 나라가 나쁘다 ㅡ고...확실히 ㅡ그렇습니다.

꼼쥐 2015-12-31 18:01   좋아요 1 | URL
저는 불가역적이라는 말을 열역학 제2법칙에서 들었던 것 같아요. 이번 협상으로 우리 전체 국민의 위신은 땅에 떨어진 셈이지요. 박씨 부녀에 의해 대한민국 체면은 추락에 추락을 더하였습니다.

[그장소] 2016-01-02 17:19   좋아요 0 | URL
권력이란게 그런것일까요...존경받는 인물로 내내
지지를 받던 그가 돌연 그런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니...어쩌면 다른 그림을 또 그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단 ..한 줌 희망을 가져도 보지만..그런 것 있잖아요..적은 더 가까이 ..ㅎㅎㅎ
어쩐지 대통령을 적으로 두라 ㅡ하는 의미가 되다니..하 ..말세 맞죠..지금 .
그것도 제 희망일 뿐 ㅡ그밥에 그나물이 아니란 법도 없으니..권력 속성 무섭습니다...속을 스캔해 볼 수도 없고...

[그장소] 2015-12-31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不可ㅡ에 대한 단어를 찾아 이 단어 저 단어 붙여보던 시기가 있었어요.제게는...어쩌려고 그럴까 ..싶어 암담하네요..

꼼쥐 2016-01-02 16:09   좋아요 1 | URL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마저 이제는 대권도전을 노골화 하는 것 같더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번 협정을 대놓고 칭찬할 리가 없겠지요.
 

새벽 공기는 소프라노의 고음처럼 차고 건조했다. 잠이 덜 깬 나를 질책이라도 하려는 듯 걸음을 뗄 때마다 찬 공기는 중무장한 나의 운동복 틈새를 비집고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달빛이 밝았다. 불투명의 달빛을 배경으로 쭉쭉 뻗은 나무 그림자가 마치 멍키바의 간격처럼 등산로를 규칙적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숲은 고요했다. 날씨 탓인지 산을 오르는 등산객의 발길도, 산짐승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발밑에 밟히는 낙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히 경험하는 것'이라고 했던 <걷기 예찬>의 저자 다비드 르 브르통. 그는 책에서 "자신의 몸을 땅과 수직으로 꼿꼿하게 세우고 걷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비로소 자연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게 되었으며, 인간과 우주의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기 시작하였다."고 썼다. 나는 이따금 그의 책에 나오는 다른 멋진 문구를 생각하곤 한다.

 

달빛은 여전히 밝았다. 미세먼지로 몸살을 앓앗던 지난 며칠, 나는 황사 마스크를 쓴 채 답답한 산길을 걸었었다. 그래서인지 밝은 달빛이 지나친 호사로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때로는 분에 넘치는 호사보다 익숙한 가난이 더 편안한 법이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발걸음을 앞으로 밀어내는 것은 그 무시무시한 괴로움의 씨앗이 아니라 자기변신, 자기 버림의 요구,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길과 몸을 한덩어리로 만드는 연금술을 발견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여기서 인간과 길은 행복하고도 까다로운 혼례를 올리며 하나가 된다."

 

낮이 되어도 기온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춥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2015년도 며칠 남겨두지 않은 오늘, 비로소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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