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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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것은 어쩌면 '이해'라기보다 체념에 가까운 굴복이라고 하는 게 옳겠지만, 아무튼 세상에 산재하는 여러 부조리를 이해한다는 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혹은 온 지구상에서 파편화 된 개인으로서의 자신은 매우 보잘것없고 미미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거대한 벽으로서 존재하는 부조리, 개인의 힘만으로 바로잡는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을 때의 무기력, 그래도 정의로운 신은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 우리가 그럼에도의 삶보다는 그러므로의 순응적 삶을 선택하는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일지 모른다. 도덕적 의식과 실재하는 삶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미약한 존재로서의 우리는 영웅의 출현이나 신의 강림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폴 오스터의 <공중 곡예사>는 독자들에게 얼핏 황당한 이야기로 비칠 수 있지만 작가는 주인공 월트의 삶을 통해 아홉 살 소년이 어떻게 부조리한 삶을 헤쳐가고 있는지 상세히 그려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나약함과 부조리한 삶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1924년, 세인트 루이스의 한 거리에서 예후디 사부는 거리의 부랑아였던 월터 클레어본 로울리를 제자로 선택한다. 예후디 사부는 거리를 전전하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던 아홉 살의 월트에게 열세 번째 생일을 맞는 날까지 하늘을 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당시에 월트의 보호자였던 슬림 외삼촌에게서 월트를 빼내 캔자스의 어느 농가로 그를 데려간다. 그곳에는 사부가 돌보고 있던 이솝과 수 아주머니가 있었다. 이솝은 똑똑하지만 몸이 불구인 흑인 소년이었고, 수 아주머니는 두 번째 결혼한 남편으로부터 참혹한 폭력에 시달리다 사부에게 극적으로 구출된 마음씨 착한 인디언 여인이었다.

 

월트는 그곳에서 하늘을 날기 위한 33단계의 혹독한 훈련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아홉 살의 소년이 견디기에는 힘에 겨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근본적으로 예후디 사부를 비롯한 이솝과 수 아주머니를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월트는 몇 번이나 탈출을 시도한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의 탈출은 쉽지 않았고 그때마다 번번이 예후디 사부에게 붙잡히곤 했다. 또 다시 탈출을 시도하던 월트가 눈보라에 갇혀 죽을 고비를 겪게 되는데 살기 위해 무작정 들어갔던 곳이 위더스푼 아주머니의 집이었고 그녀는 예후디 사부의 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월트의 후원자이자 조력자 역할을 한다.

 

여러 사람의 돌봄과 극진한 간호 덕분에 다시 살아난 월트는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간다. 이솝이 예일 대학의 장학생으로 입학 허가를 받았을 무렵 월트는 드디어 하늘을 날게 되고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간다 싶었던 그 때 생각지도 못한 불행이 그들에게 닥친다. 마을의 3K 단원이 그들의 집에 불을 질러 이솝과 수 아주머니를 살해한 것이다. 위더스푼 아주머니의 집에 머물면서 한동안 슬픔에 잠겼던 그들은 하늘을 나는 묘기를 갈고 닦아 전국 순회 공연에 나선다.

 

"우리에게는 죽은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건 기본적인 법칙이야. 만일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될 거다." (p.155)

 

공연은 순조로웠고 그에 따라 월트는 점점 더 유명해지고 바빠졌다. 공연의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부도 함께 따라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슬림 외삼촌이 그들을 찾아 온다. 외삼촌은 예후디 사부에게 공연 수익금의 일정액을 요구하였고, 예후디 사부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외숙모를 잃고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았던 슬림 외삼촌은 예후디 사부의 냉대에 분개하였고 갖은 욕설과 함께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외삼촌의 교활함과 포기하지 않는 근성을 잘 알고 있었던 월트는 불안에 시달린다.

 

"그 나머지 시간에 나를 계속 따라다니던 온갖 불안감을 생각한다면, 공연은 일종의 정신적 휴식, 내 마음을 괴롭히는 두려움으로부터의 진정제가 되어 주었다. 나는 전에 없이 일에 몰두하면서 그것이 내게 주는 자유와 보호를 만끽했다. 그러는 동안 내 정신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하루에 한 시간씩 원더보이 월트로 바뀌는 아이 월터 롤리가 아니라 공중에 떠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인 철두철미한 원더보이 월트로 바뀌어 갔다. 땅은 일종의 환상, 음모와 망령들이 깔린 위험 지대였을 뿐 아니라,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 또한 모두 거짓이었다." (p.195~p.196)

 

월트의 예상대로 다시 나타난 슬림 외삼촌에게 그는 납치 감금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월트의 공연은 매번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위기는 다른 곳에 있었다. 사춘기가 된 월트는 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거기에 집착하면서 심한 두통과 현기증에 시달리게 되자 더 이상 하늘을 날 수 없게 된다. 그러자 사부는 월트에게 '공중 곡예사(Vertigo)'라는 별명을 붙여 준다. (Vertigo에는 현기증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슬림과 그의 패거리들에게 습격을 받은 사부는 심한 총상을 입고 자살을 하고, 월트는 외삼촌을 죽이고 암흑가로 스며든다. 조직에서 그는 승승장구하여 클럽을 운영하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고 군에 입대한다. 제대를 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그는 제빵 회사에 취직하여 그곳에서 일하던 몰리와 결혼한다. 그것이 어쩌면 하늘을 나는 원더보이 월트가 온전히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법을 익히는 첫번째 단계였는지도 모른다. 월트는 그렇게 몰리와 23년을 살았고 암으로 그녀를 잃었다. 원더보이 월트의 노년은 결국 위더스푼 부인으로 이어지는데...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단 두 번의 쓸 만한 결정을 내렸는데, 그 첫번째는 아홉 살이었을 때 예후디 사부를 따라 기차에 올라 탄 것이고, 두 번째는 몰리 피츠시먼즈와 결혼을 한 것이었다. 몰리는 나를 다시 완전한 인간으로 되돌려 주었다. 내가 뉴어크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어떤 처지였는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하찮은 일이 아니었다." (p.380~p.381)

 

폴 오스터의 이 소설은 1920년대 미국인의 성공과 좌절을 원더보이 월트의 삶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은 다소 황당하고 어이없는 이야기는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성공의 이미지였을 테고, 월트가 성공했던 그 짧은 순간 역시 성공의 덧없음을 말하고 있을 터였다. 월트는 결국 지면에 발을 딛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법을 익히기 위해 그가 어렸을 때 예후디 사부로부터 받았던 혹독한 훈련보다 몇 배나 더 길고 처절한 삶을 경험해야만 했다. 예후디 사부는 죽으면서 그에게 말했었다. '좋았던 시절들을 기억하라'고. 세월의 위대함은 개별적인 인간의 삶을 결국에는 보편적인 어떤 것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모습으로 늙어갈 뿐이다. 결국 우리는 절망을 통해 하늘을 나는 법을 익히고 하늘을 날았던 기억으로 자신에게 다시 찾아온 절망의 순간을 견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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