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중 - 타인의 증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의 기분이라는 게 언제든 뜯었다 붙일 수 있는 싸구려 벽지처럼 마음을 먹는다고 쉽게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평소에 하지 않던 싱거운 농담 몇 마디를 던지고 나면 그럭저럭 나아질 때가 있습니다. 되지도 않는 농담 몇 마디에 우울했던 기분이 갑자기 좋아지는 것 같지는 않고 조금 가벼워진다고나 할까, 아무튼 우울하거나 심각했던 일들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버거워만 보이던 세상 일들이 '까짓것' 하면서 한껏 허세를 부리게도 되죠. 한일 위안부 협상 발표가 있었던 엊그제, 기분도 꿀꿀해서 괜한 농담을 몇 마디 던졌더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무슨 좋은 일 있느냐'며 되묻더군요. 평소 위트와 농담에는 재능이 없는 사람이란 걸 잘 아는지라 '더 이상의 썰렁개그는 참아주세요' 하는 의사표시였는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다 보면 작가의 모국인 헝가리도 '지랄 같은 역사를 가진 나라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클라우스가 헝가리의 역사가 부끄러워 국경을 넘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상) - 비밀 노트>의 마지막 부분에서 쌍둥이 중 한 명인 클라우스는 국경을 넘어 떠나고 다른 한 명의 쌍둥이인 루카스는 할머니 집에 홀로 남게 됩니다. 소설의 구성을 복잡하게 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중) - 타인의 증거>에서 클라우스와 루카스의 삶을 교차하며 보여주는 것도 그럴 듯해 보입니다만, 작가는 전적으로 할머니 집에 남은 루카스를 위주로 소설을 전개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클라우스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클라우스는 떠났고 루카스는 남았습니다. 혼자가 된 루카스는 자신의 삶을 추스르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합니다. 가축을 돌보고, 농사일을 하며, 늙어 거동조차 어려운 신부님의 끼니를 챙기고 소일거리 삼아 같이 체스를 두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근친으로 기형아를 낳은 야스민을 만나게 됩니다. 루카스보다 두 살 위인 야스민은 자신의 아이 마티아스를 버릴 생각이었죠. 루카스는 자신의 집에서 그들과 함께 살게 됩니다. 루카스는 신체적으로는 불구이지만 똑똑하고 총명한 마티아스를 유난히 예뻐합니다. 혁명의 여파로 웬만한 책은 모두 사라져버린 까닭에 루카스는 도서관을 찾게 되고, 그곳에서 클라라를 만납니다. 루카스는 엄마뻘인 클라라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매일 밤 마을의 끝에 있는 그녀의 집을 찾아갑니다.

 

클라라의 남편 토마스는 혁명의 와중에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클라라는 아무도 찾지 않는 도서관을 지키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지요. 온통 클라라에게 마음을 뺏긴 루카스를 뒤로 하고 야스민은 도시로 떠납니다. 그녀의 아이인 마티아스는 오롯이 루카스의 책임으로 남겨집니다. 루카스는 마을의 외곽에 있던 할머니의 집을 처분하여 빅토르 씨의 서점을 인수합니다. 순전히 마티아스를 위해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마티아스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어떻게든 아이들과 어울려보려 했지만 극심한 따돌림과 폭력으로 결국 학교를 포기하게 됩니다. 루카스는 홀로 남겨진 마티아스를 위해 또래의 아이들에게 서점을 개방합니다. 책일 읽고 그림도 그릴 수 잇는 공간으로 만든 것이지요. 그곳에 아그네스와 사무엘이 방문합니다. 아그네스의 남동생인 사무엘은 마티아스와 비슷한 나이였습니다.

 

자신의 남편을 죽인 사람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클라라마저 떠나고 아그네스에게 관심이 있었던 루카스는 그녀와 사무엘을 집으로 초청합니다. 온통 사무엘에게 관심을 두는 듯한 루카스의 태도에 마티아스는 질투를 느끼고 끝내 자살합니다. 어쩌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였을지도 모를 마티아스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자 루카스는 실의에 빠져 지냅니다. 할머니의 묘 근처에 마티아스를 묻고 매일 그곳을 찾던 루카스는 결국 그것도 귀찮아 마티아스의 유골을 캐내어 집으로 가져옵니다. 그의 집에는 루카스의 엄마와 이복 동생, 마티아스의 유골이 걸리게 되었고, 루카스는 페테르 씨에게 서점과 자신이 쓴 비밀 노트를 맡깁니다.

 

"젊은 날에 신을 섬기도록 해라, 불행한 날이 닥치기 전에, 그리고 네 입에서 '나는 살고 싶지 않다'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p.97)

 

루카스가 사라진 마을에 국경을 넘었던 클라우스가 나타납니다. 소설은 이제 결말을 향해 치닫는 듯한 느낌입니다. 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그 모습을 드러내려 하는 것이지요. 페테르 씨는 클라우스에게 루카스가 쓴 비밀 노트 다섯 권과 서점을 넘깁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호적에 등재되지 않았던 클라우스는 세 번에 걸쳐 체류 연장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본국 송환을 요청받습니다. 소설은 'D대사관에 보내기 위해 K시 당국이 작성한 조서'를 끝에 배치함으로써 의미심장한 결말을 예고합니다. 과연 루카스는 실제로 살았던 인물인지, 클라우스는 정말 쌍둥이였는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잊어버리게. 인생은 그런 거야. 모든 게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게 마련이지. 기억도 흐릿해지고, 고통은 줄어들고. 나는 사람들이 어떤 새나 꽃을 기억하듯이 내 아내를 기억하고 있지. 그녀는 인생의 기적이었어. 그녀가 사는 세상은 모든 게 가볍고, 쉽고, 아름다웠지." (p.149)

 

한 개인에게 지난 일이란 거짓말처럼 아득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억이나 기억도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한 나라의 역사를 두고 누구는 왜곡되었다, 그렇지 않다 말하는 것도 어찌 보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자신의 짧은 인생도 다 기억하지 못하는데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역사의 흐름에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도 있게 마련이지요. 예컨대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 있었던 위안부와 같은 인권 유린의 흔적들 말입니다. 그것이 돈을 통한 협상으로, 국가의 이익을 위한 한 단계로 치부되고 덮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그런 큰 실수를 할 수 있어. 우리가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생긴 뒤지." (p.214)

 

인권이 강화되고 잘못된 과거에 대해서는 통렬한 반성을 요구하는 추세에 역행하여 전 세계의 조롱거리가 된 한일 간의 위안부 협상은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만 국론 분열과 반쪽짜리 대한민국은 오늘을 기점으로 다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협상을 서둘렀던 그들의 변명이 몇 가지 거짓말로 구성되었던 것인지 후세의 역사는 낱낱이 밝혀내겠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