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는 소프라노의 고음처럼 차고 건조했다. 잠이 덜 깬 나를 질책이라도 하려는 듯 걸음을 뗄 때마다 찬 공기는 중무장한 나의 운동복 틈새를 비집고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달빛이 밝았다. 불투명의 달빛을 배경으로 쭉쭉 뻗은 나무 그림자가 마치 멍키바의 간격처럼 등산로를 규칙적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숲은 고요했다. 날씨 탓인지 산을 오르는 등산객의 발길도, 산짐승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발밑에 밟히는 낙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히 경험하는 것'이라고 했던 <걷기 예찬>의 저자 다비드 르 브르통. 그는 책에서 "자신의 몸을 땅과 수직으로 꼿꼿하게 세우고 걷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비로소 자연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게 되었으며, 인간과 우주의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기 시작하였다."고 썼다. 나는 이따금 그의 책에 나오는 다른 멋진 문구를 생각하곤 한다.
달빛은 여전히 밝았다. 미세먼지로 몸살을 앓앗던 지난 며칠, 나는 황사 마스크를 쓴 채 답답한 산길을 걸었었다. 그래서인지 밝은 달빛이 지나친 호사로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때로는 분에 넘치는 호사보다 익숙한 가난이 더 편안한 법이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발걸음을 앞으로 밀어내는 것은 그 무시무시한 괴로움의 씨앗이 아니라 자기변신, 자기 버림의 요구,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길과 몸을 한덩어리로 만드는 연금술을 발견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여기서 인간과 길은 행복하고도 까다로운 혼례를 올리며 하나가 된다."
낮이 되어도 기온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춥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2015년도 며칠 남겨두지 않은 오늘, 비로소 겨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