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게 안녕 - 도시의 힘없는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공감과 위로!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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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이 지나고부터 '확실히 겨울은 겨울이구나.' 하는 생각을 매일 아침 하게 된다. 빌딩과 빌딩 사이로 부는 차갑고 매운 바람이 내 몸에 훅 끼칠 때마다 귀와 코끝에 알싸한 자극이 전해졌다. 차 없이 걸어서 다니는 것의 장점은 건강도 건강이지만 이처럼 계절의 감각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 추위를 몸으로 직접 느껴보지도 않은 채 단지 차창 밖의 풍경만 보고 계절을 가늠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마치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책을 읽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낮이 되어서도 날씨는 풀리지 않았다. 미농지처럼 얇은 햇살이 사람들의 발길을 밖으로 한껏 유인하는 듯 보였지만 인적이 끊긴 거리에는 냉냉한 한기만 흐르고 있었다. 다만 바람이 아침보다 조금 잦아들었을 뿐이었다. 어제는 추위 때문이었는지 모처럼 들른 도서관에서 김현진의 <뜨겁게 안녕>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목이 조금 촌스럽거나 야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결국 대출을 결심했던 건 역시 '뜨겁게'의 위력이었다. '또 다시 말해주오 사랑하고 있다고'로 시작되는 노래가 생각나기도 했고 말이다.

 

"그때도 철이 덜 들어 감동하기만 하고 서른이 넘은 지금에야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소중한 것을 반드시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지만, 어쨌거나 술집 아줌마들이야말로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준 선생님들이었다. 이모는 그중에서도 큰스승이었다. 입술을 깨물고 무심하게 그냥 참는 것, 몸이 놀고 자빠지려고 하면 후들겨 패는 것, 자꾸 편하려고 하는 걸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걸 아는 것, 좋은 결과를 내려면 어떨 때는 필사적으로 참아야 한다는 것, 그렇게 어차피 세상은 참고 참고 또 참는 과정의 연속이라는 것, 왕십리가 결국 내게 가르친 것은 입 다물고 버티는 연습이었다." (p.106 ~ p.107)

 

이야기는 책의 제목에서 연상되는 분위기와는 영 딴판으로 흐르고 있었다. 내가 오늘 자비를 베풀 생각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하늘을 향해 약간의 온기를 구차하게 빌었던 것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꽃띠 여자의 순애보도 아니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인간들의 '남녀상열지사'는 더더욱 아니다. 강압적이기만 한 고등학교를 박차고 나와 줄곧 글을 쓰고 있다는 작가의 서울 생존기라고나 할까 아니면 이사기라고 할까? 아무튼 돈 없고 빽 없는 그녀가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곳저곳을 전전했던 기억들을 그녀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하여 기록한 웃픈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상도동에서 남창동으로, 홍대입구에서 왕십리로, 다시 옥수동으로 그녀는 서울의 외곽, 변두리, 달동네로 지칭되는 곳으로 차츰 밀려났다. 나도 겪어본 일이지만 서울에서의 이사는 본인의 의사와 크게 상관이 없다. 뼈가 빠지게 일을 해도 집값 상승의 속도를 추월하지 못기 때문이다. 소득과 집세의 속도 차이는 오십 씨씨 스쿠터와 람보르기니의 속도에 비견될 정도만큼이나 큰 것이고 세월이 갈수록 그 격차는 더 크게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걸 서울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일이다. 특별시민의 지위를 끝까지 포기하지 못한 채 밀리고 밀리다가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경기도민의 신분을 취득하게 되는 과정은 흔하디흔한 이력서이다.

 

"옥수동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에는 방이 세 개에 광활한 다락이 두 개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손바닥만 한 마당도 딸려 있었다. 그런데도 강남에서 월세 얻기도 어려운 돈으로 전세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서울에서 그렇게 살 수 있는 세월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마 곧 서울에서 밀려날 것이다. 더욱 서울 외곽으로 돌다가 경기도로, 거기서 더 간 지방 어딘가로 떨려날 것이고 그렇기에 더 애틋하게 남아 있는 우리 집, 옷장만 한 화장실이 두 개나 있던 희한한 우리 집, 그리운 우리 집." (p.146)

 

작가는 이제 겨우 삼십대 초반이라고 했다. 젊디젊은 나이의 작가가 애 서넛은 족히 딸렸음직 한 아줌마 포스를 폴폴 풍기는 건 왠지 짠하고 안쓰럽다. 더 늦은 나이에 경험해도 될 일을 너무 이른 나이에 많은 걸 압축해서 겪은 사람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된 사람이 있을까마는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하고 사는 건 또 왜 이렇게 지랄같냐' 하늘을 향해 삿대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여자들이 직장 생활 2~3년차 정도가 되면 루이비통 스피디백 하나씩은 산다고 한다. 남자들은 차를 사는 것 같다. 그 백이 뭐 꼭 그렇게 예쁘다든가 그래서가 아니라 뭐 하나 할부로 질러놔야 직장 다닐 맛도 나고 직장에 억지로 좀 매어두는 고삐 같은 의미도 있고 뭐 그래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 내 경우는 술 마시다가 잃어버릴 염려가 있는 고가품은 절대로 사지 않기도 하거니와 그럴 여유도 없었다." (p.225)

 

지난 연말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송년 모임이 있었다. 술도 못 마시는 까닭에 대부분 1차만 참석하고 몰래 빠져나오곤 했지만 이따금 피치 못할 사정으로 끝까지 남아야 할 경우에는 뒷처리가 오롯이 내 몫으로 남았다. 술이 떡이 되도록 취한 사람을 부축하여 택시를 잡아 보내거나 대리기사를 불러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해야 하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보다 더한 것은 토하는 사람의 등을 두들겨주거나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사람의 옷 여기저기에 묻은 토사물을 대충이라도 닦아내는 일일 것이다. 이래저래 연말연시는 힘들다. 용맹정진을 하는 스님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버텨내지 못한다. 이렇게 몇 십 년 수도를 하면 성불할지도 모른다. 작가도 이 시각 그렇게 참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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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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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찰스 부코스키의 작품을 읽으면 왠지 사는 게 조금 가벼워지곤 한다. 그가 쓴 글들이 처음부터 욕심이나 집착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세상의 부조리와 삶의 허무를 소설 속의 한 문장 한 문장에 밀어넣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의 시선은 조금 삐딱하게 기운 채 세상을 경멸하거나 비웃는다. 소설의 탄생이 애초에 그렇다는 걸 말해주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도덕이나 규칙의 굴레에서 벗어난 노골적이면서도 직설적인 말과 행동을 보여준다.

 

"그럭저럭 괜찮은 여자, 같이 자기 좋은 여자였지만 그런 여자들이 다 그렇듯이 서너 밤 자고 나자 재미도 시들해져 다시 가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떨칠 수는 없었다. 세상에, 집배원들은 편지를 넣고 다니면서 여자들하고 같이 눕기도 하는구나. 이거 나한테 딱 맞는 일인데. 오, 이거야, 이거. 이거라고." (p.12)

 

찰스 부코스키의 소설 <우체국>에 나오는 '헨리 치나스키'는 크리스마스 즈음 '거기 가면 개나 소나 다 써준다'는 얘기를 듣고 임시 집배원으로 일하던 중 한 여자와 밤을 보낸 후 정식 집배원이 되기로 결심한다. '편지를 넣고 다니면서 여자들하고 같이 눕기도 하는' 집배원이라는 직업이 천직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보결 집배원으로 시작된 그의 일과는 만만치 않았고, 여자랑 같이 누울 수 있는 기회를 은근히 기대했었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현장 주임이었던 존 스톤의 눈 밖에 난 까닭에 그의 순로는 항상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곳을 배정받았다.

 

3년간의 힘든 보결 집배원 생활을 마친 그는 마침내 '정규 집배원'이 되었으나 늘 술과 도박 여자에 빠져 살던 그는 여전히 현장 주임의 감시 대상 일순위였다. 어느 날 규정 위반으로 여러 장의 경고장을 받아든 그는 결국 3년 반만에 사직서를 제출한다. 백수가 된 헨리는 경마를 하며 소일한다. 같이 동거하던 여자 베티가 타자수로 취직하면서 그와 헤어지고 그는 텍사스 출신의 젊은 여자 조이스를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다시 빈털털이가 된 그는 조이스와 함께 텍사스로 향하지만 조이스의 부모와 조부모는 그가 혹시 그들의 재산을 탐내어 조이스와 결혼하지 않았는가 의심한다. 조이스의 권유에 따라 그는 결국 우편 사무원으로 다시 취직하지만 그들은 결국 이혼한다.

 

스툴에 앉아 우편물을 분류하는 일을 하면서 그는 현장 주임의 감시하에 정해진 시간 내에 분류를 마쳐야 하는 표준화 된 노동생산성의 노예가 된다. 이 때의 미국은 빈틈없는 작업방식의 구축과 기계적 반복작업의 실행을 바탕으로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하는 '포드주의'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비인간적인 작업환경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주변 사람들. 그러나 헨리는 이러한 체제에 견디지 못하고 반항한다. 그가 반항하는 방식은 주로 섹스와 술이었다.

 

"우체국 업무는 하룻밤 열두 시간 근무에다가, 현장 주임을 더하고, 우편 사무원들을 더하고, 살덩이들 틈에서 제대로 숨도 쉴 수 없는 분위기를 더하고도, 거기에 <비영리> 식당에서 만든 쉰 음식까지 참아야 하는 일이었다." (p.126~p.127)

 

헨리가 마지막에 만난 여자는 페이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언제나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반전 운동을 하는 페이는 전남편에게서 받는 생활비 수표로 근근이 살아가는 여자였다. 페이는 이따금 워크숍에 참석하고 글을 쓰기도 했다. 페이가 임신을 하고 딸을 낳았다. 그럼에도 헨리는 기계의 부속품처럼 반복되는 고된 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페이는 결국 딸을 데리고 집을 나간다.

 

"지나간 11년이 머리를 뚫고 지났다. 이 일이 사람을 갉아 먹는 것을 봐왔다. 사람들은 흐늘흐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도지 우체국에 지미 포츠라는 직원이 있었다. 내가 처음 왔을 때 지미는 흰 티셔츠를 입은 건장한 사내였다. 이제 그때 그 사람은 사라졌다. 그는 바닥에 가능한 한 가까이 붙어 앉아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로 버티고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이발도 못 했고 3년 동안 똑같은 바지를 입었다. 일주일에 두 번 셔츠를 갈아입었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우체국이 그를 살해한 것이다. 그는 쉰다섯 살이었다. 퇴직까지는 7년이 남아 있었다." (p.219~p.220)

 

헨리는 결국 사표를 내고 다시 고주망태로 변한다. 그는 술에 취해 쓰러졌다가 다시 깨어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자신이 소설을 쓸 것 같다고 생각하였고, 소설을 썼다.

 

"2층이었다. 문을 열었더니 사람들이 있었다. 우정 사업 본부 직원들. 한 여자는 불쌍하게도 팔이 하나밖에 없었다. 거기 영원히 있겠지. 나처럼 늙은 주정뱅이가 되는 거나 다름없다. 뭐, 다른 동료들이 말하듯이 어디에서라도 일은 해야 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그게 노예의 지혜였다." (p.232)

 

찰스 부코스키의 책이 대개 그렇듯 <우체국> 역시 그의 경험에 바탕을 둔 자전적인 소설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헨리 치나스키는 반복되는 일상과 부속품으로 전락한 자신의 모습에 끝없이 절망한다. 절망의 나락에 빠진 자신을 건져내기 위해 그는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소설을 씀으로써 자신을 구제한다. 자신을 돌보는 마지막 방법으로 소설 쓰기를 선택한 것은 찰스 부코스키답다.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멋있게 들리는 건 내가 도박하듯 글을 쓰기 때문이다. 너무 신중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연구하고, 가르치고, 그리곤 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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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말은 맞는 말일 것이다. 영국의 모 방송사에서는 그와 관련된 기사를 내보냈나 보다. 뭐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을 대단한 발견이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떠는 모습은 조금 딱하기도 하고 이따금 귀엽게 느껴질 때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회사나 모임, 정당 등 여러 사람이 모인 어떤 조직에 몸을 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무자비한 사람이 대우를 받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닥 새로울 것도 없지만.

 

심리학자들은 무자비한 사람을 마키아벨리즘, 나르시시즘, 사이코패스 성향 등 세 가지로 분석한다고 한다. 무자비한 사람들은 이 세 가지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한 가지만 보이는 경우도 있겠지만 나는 오늘 마키아벨리즘 성향의 원칙주의자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말은 참 근사해 보이고 조직 내에서도 원칙주의자를 신봉하거나 자신도 그와 같이 되려고 동경해 마지 않는 사람들도 많은 걸로 알고 있다. 하긴 원칙주의자로 불렸던 여당의 당대표를 대통령으로 뽑는 바람에 대한민국이 지금 요 모양 요 꼬락서니가 되었으니 내 결론이 어떤 것일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고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앙하거나 동경해 마지 않는 '원칙주의자'에 대해 나는 왜 그토록 싫어하게 되었을까. 적어도 '원칙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속성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사람들은 원칙주의자를 결코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장담한다. 혹자는 내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여전히'원칙주의자'를 좋아하고  그들은 어디서든 인기가 있다고 말이다. 어느 패널이 토론에서도 말했지만 대통령이 나라를 팔아먹어도 35%의 국민들은 지지할 거라고 하지 않던가. 맞는 말이다. 그것은 다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만 말해보면 이렇다.

 

첫째, 원칙주의자가 신앙처럼 믿고 따르는 원칙이라는 게 과연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인지, 아니면 소수의 사람들만 동의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동의를 구하지 않고 혼자만 옳다고 믿는 것인지 따져 묻고 싶다. 소위 '원칙주의자'로 불리는 사람들과 시간을 내어 대화를 해보면 그들이 믿는 원칙 중 상당 부분이 사회적으로 결코 동의될 수 없는 독선적인 원칙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된다. 예컨대 원칙주의자가 믿는 것은 단지 그가 믿는 원칙일 뿐 그 원칙이 정당한 것인가는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원칙의 정당성을 따지는 사람이라면 그는 결코 원칙주의자가 되지 못한다.

 

둘째, 원칙주의자는 평화주의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대통령도 평화를 자주 언급해서 하는 말이다. 그 둘은 결코 공존할 수 없다고 장담한다. 원칙주의자는 대개 서열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특히 원칙주의자가 조직내 서열의 상위를 차지했을 때) 평화를 유지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힘에 의한 복종일 뿐 진실한 평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원칙주의자를 잠재된 대결주의자로 인식한다. 심하게 말하면 호전주의자인 셈이다. 예컨대 원칙주의자의 조직내 서열이 낮아지거나 동등해지기만 해도 그는 당장에 자신이 숨겨놓은 발톱을 드러낼 게 뻔하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평화는 원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관용과 배려에 의해서만 유지되기 때문이다.

 

'원칙주의자'의 냉정함, 또는 무자비함, 사이코패스적 성향은 서열에 의한 복종이 유지될 때는 결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원칙주의자들은 대개 자신을 아끼는 나르시시즘 성향도 강한데 달리 말하면 그들은지독한 이기주의자라는 점이다. 그들의 이러한 성향은 서열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결부되어 자신을 서열의 맨꼭대기에 위치하게 하도록 한다. 베른대학의 대니얼 스퍼크 교수는 사회적 성공이 아닌 실제 삶에서는 관대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한 경향이 있다고 말하지만 원칙주의자들에게 그것은 허황된 말로 들릴 것이다. 나 또한 조직이나 사회에서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혼란한 상태를 원하는 것도 아니요, 원칙이나 규칙을 준수하는 사람을 일방적으로 미워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원칙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무자비함, 그것을 미워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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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1-11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것이 사회를 지켜나가는게 아니라 원칙과 함께하면서 변칙이 가끔 기적을 만들어 내는걸 무수히 봐왔는데도 곧잘 잊곤 하죠.원칙이 대세니 ㅡ그게 승리한 걸로 보일지 몰라도 ㅡ대게 변화는 변칙에서 오곤 하죠.
구원같은 사람을 만나는 경우도 늘 같은 노선이 아닌
일탈같은 상황에서 만나지고 말예요. 제 말은 다분히
환상적 측면을 가져가지만 앞으로 미래는 보통 ㅡ의 미래가 아닌 돌연변이가 세상을 바꿀것이란 말에 저는 일견 동의하는 쪽입니다.
순풍에 돗단듯 ㅡ이 아니라 역풍에서 활로가 나올 수 있는 것 처럼 ㅡ

꼼쥐 2016-01-12 12:24   좋아요 1 | URL
국가든 기업이든 발전의 초창기에는 어느 정도의 원칙과 원칙준수의 필요성이 전재합니다. 그것은 저도 인정하는 바이고 누구나 수긍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장소 님의 말씀처럼 작금의 대한민국 경제 규모나 발전단계에서는 원칙보다는 어느 정도의 변칙이나 일탈이 필요하겠지요. 자유를 경험한 세대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행태는 영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장소] 2016-01-12 13:30   좋아요 0 | URL
그래서 다들 유신이니 민주화니 ..못 놓고 머릴 그쪽으로 두면서도 회의에 회한에 젖는게 아닌가 해요.스스로 뭔가 한다는 자각 ㅡ개개인이 ㅡ

마립간 2016-01-12 0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칙주의자이나 플라톤(-노자)주의자로서 말씀드리면,

제 의견은 세상의 모든 일이 원칙으로 이뤄졌다거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적절하게 원칙을 깨거나 디오게네스(-양주)주의적인 면 최선-최적일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경험한 세상-사회는 원칙을 지켜서 최선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보다는 원칙을 깼기 때문에 최선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원칙에는 사회적 합의, 평화주의를 원칙으로 포함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선택은 개인의 가치관이겠지만요. (강간살인자, 전쟁 도발 정치인에 대한 비대결주의의 입장에는 어떤 것이 가능할까요?)

(꼼쥐 님께서 제 서재를 자주 방문하셨다는 전제 하에 제가 사용하는 용어로 설명하자면, 저는 플라톤-노자주의 선호자이지만, 강플라톤-노자주의자는 아닙니다.)

꼼쥐 2016-01-12 12:30   좋아요 1 | URL
때로는 강요된 원칙이 의외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사실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일정한 위치에 잇는 공인, 타인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세운 원칙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마치 패배나 굴종으로 오인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리더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이 오히려 몸을 낮추고 그들의 의견을 따라갈 필요가 있는 것이죠. 백수가 자기 혼자서 어떤 원칙으로 살아가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원칙을 준수하는 삶이 더 나을 수도...

마립간 2016-01-12 12:33   좋아요 1 | URL
꼼쥐 님의 글의 의도나 진심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지적질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언어의 한계일 수도 있겠지요. 사회를 보는 저의 의견입니다.

꼼쥐 2016-01-13 15:58   좋아요 0 | URL
저는 자신의 의견을 누구나 마음놓고 개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마립간 님처럼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정중하고 논리적인 말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하고요. 예컨대 다짜고짜 욕설이나 상스러운 말을 하면서 논리도 없는 말을 댓글에 다는 경우에는 저도 대꾸할 여력도 없어서 삭제하곤 하지요.
 
당신이라는 안정제
김동영.김병수 지음 / 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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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생각합니다. '필연'이란 수천 번의 어긋남에서 비롯된 '우연'의 결합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예컨대 날씨 화창했던 토요일 오후, 만나기로 약속했던 친구가 전해 온 짧은 사과와 부득이하게 약속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는 문자. 취소된 약속으로 인해 갑자기 비어버린 오후의 시간. 우울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모처럼 나간 산책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 그리고 지속되는 만남과 깊어지는 관계. 이런 상투적인 만남이나 사랑이 비단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만 가능한 일은 아니겠지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작가는 우연과 필연에 대해 설명합니다. 대략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직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중략)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오직 우연만이 웅변적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조금 더 과장하자면 삶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는 '우연'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연은 '알 수 없음'에서 비롯되는 '불안'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근원을 따져 묻고, 그곳에서 마주치는 수없이 많은 '우연'의 기원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야말로 불안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불안을 내포한 혼돈이란 분명 고통스러울 테구요. 고통의 출발은 언제나 그렇게 단순한 법이지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두 손과 팔 그리고 가슴이 마비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가져본 적 없는 공포가 찾아왔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검지를 이빨로 물어뜯어 피가 나오게 했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리고 이내 메스꺼움을 느껴 구토를 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거친 나의 호흡만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모른다."      (p.119~p.120)

 

김동영 작가의 <당신이라는 안정제>를 읽었습니다. 언제였던가요?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가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랐을 때, 나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이름 때문이었는지 책의 내용조차 조금 미심쩍어 했었던 듯합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쉽게 그를 잊고 말았습니다. 내가 그렇게 그를 잊고 지내는 동안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한두 권의 책을 더 출간했고, 나름 괜찮은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이유도 없이 한동안 심하게 아팠었나 봅니다. 그가 공황장애로 칠 년을 앓는 동안 한 달에 한두 번씩 만났던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전문의 김병수 박사와 작가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이 책입니다. 환자와 주치의의 전문적인 치료기록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주고받을 수 있는 솔직한 감정과 사적인 이야기를 포함하여 다양한 주제에 대해 나누었던 두 사람의 생각이 이채롭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혼자가 아니라 나 아닌 누군가와 함께할 줄 아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혼자가 아니라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묶여 있지 않음으로가 아니라 묶여 있으므로 자유를 느낄 수 있고, 혼자보다 둘이 되어야 평화로워질 수 있는 존재다. 혼자보다 좋은 둘이 아니라, 반드시 둘 이상이 함께 가야만 하는 길이 우리 삶이다." (p.321)

 

앞에서 말했듯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기본요소는 제 생각에 '우연'인 듯합니다. 그리고 '우연'은 기본적으로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삶의 근원을 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공포를 느끼는 이유도 거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은 우연이나 불안, 미래의 불확실성은 애써 외면한 채 그저 순간순간의 기쁨에만 집중하며 살고 있습니다. '왜 사는가?' 생각하면 기본적으로 우울해지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잠재적인 정신질환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우리에게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 지금의 내 모습은 왜 이래야만 하는지,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지금 닥친 일들은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설명해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정답일까요? 삶은 그렇게 흘러가도록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일까요? 아닐 겁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그 어떤 설명도 유효하지 않습니다." (p.328~p.329)

 

많은 우연으로 구성된 2015년의 수많은 일들이 이제 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내게 다가올 2016년의 또 많은 우연들은 제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알지 못하기에 설레고 더 흥분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중에는 어쩌면 내가 모험을 하듯 도전해야 할 버거운 일들도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삶을 지속하는 한 나는 또 2016년의 이맘때쯤에 그 많은 일들을 내 기억의 뒤편으로 가벼이 밀어내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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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자기 주장이 강하거나 똑 부러지게 말하는 사람을 두고 '그 사람 참 야무지다' 라고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이러한 경향은 여자에게 특히 더 심하다. 더이상 반박할 말이 없어 그(또는 그녀)의 똑똑함을 마지못해 인정하는 경우에도 그 말에는 사뭇 가시가 돋곤 한다. 아니라고 해도 목소리 톤이나 얼굴 표정에서 금세 드러난다. 다들 알지 않나. '그래, 너 잘났다'는 말이 칭찬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튼 우리 사회에서 똑똑한 사람은 살아남기도 어렵고, 남들과 적당히 융화하며 산다는 건 더더욱 어렵다.

 

우리 사회의 이런 비정상적인 행태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산업사회 초창기에 횡행하던 편법에 의한 성취, 불법적인 부의 축적 등 불법과 편법에 의한 공정성의 상실이 가장 크겠지만 유교적 계급의식도 한몫하지 않나 싶다. 그로 인해 어느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에 대한 비아냥, 불신, 반목 등 부정적인 관계를 형성하는가 하면 성취를 이룬 사람들의 내면에도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이 바른말을 하면 '네가 뭘 알아' 내지는 '감히 내 앞에서...'와 같은 식의 반응을 보이는 선민의식을 갖게 되는 듯하다.

 

생각해 보면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보수세력의 공격도 이러한 유교적 선민의식에 바탕을 두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러한 폐단을 없애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경제적 이익을 편취하기 위한 불법이나 탈법은 여전히 성행하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은 산업사회의 초창기보다 훨씬 높아졌다. 예컨대 권력을 가진 자가 자신이 데리고 있던 비서관의 취직을 돕기 위해 압력을 가하는 모습은 이제 뉴스거리도 아닌 세상이 된 것이다. 흙수저 논란을 불러온 이러한 불법행위는 실업률이 높아질수록 더욱 힘을 얻을 게 뻔하다.

 

대한민국에서 젊은 인재는(그것도 고급 인재는 더더욱) 살기 어렵다. 젊은 사람들이 조국을 떠나는 이유는 비단 취직을 하지 못해서가 아닌 듯하다. 날씨도 추운데 이런 가슴 시린 이야기를 하게 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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