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찰스 부코스키의 작품을 읽으면 왠지 사는 게 조금 가벼워지곤 한다. 그가 쓴 글들이 처음부터 욕심이나 집착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세상의 부조리와 삶의 허무를 소설 속의 한 문장 한 문장에 밀어넣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의 시선은 조금 삐딱하게 기운 채 세상을 경멸하거나 비웃는다. 소설의 탄생이 애초에 그렇다는 걸 말해주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도덕이나 규칙의 굴레에서 벗어난 노골적이면서도 직설적인 말과 행동을 보여준다.

 

"그럭저럭 괜찮은 여자, 같이 자기 좋은 여자였지만 그런 여자들이 다 그렇듯이 서너 밤 자고 나자 재미도 시들해져 다시 가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떨칠 수는 없었다. 세상에, 집배원들은 편지를 넣고 다니면서 여자들하고 같이 눕기도 하는구나. 이거 나한테 딱 맞는 일인데. 오, 이거야, 이거. 이거라고." (p.12)

 

찰스 부코스키의 소설 <우체국>에 나오는 '헨리 치나스키'는 크리스마스 즈음 '거기 가면 개나 소나 다 써준다'는 얘기를 듣고 임시 집배원으로 일하던 중 한 여자와 밤을 보낸 후 정식 집배원이 되기로 결심한다. '편지를 넣고 다니면서 여자들하고 같이 눕기도 하는' 집배원이라는 직업이 천직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보결 집배원으로 시작된 그의 일과는 만만치 않았고, 여자랑 같이 누울 수 있는 기회를 은근히 기대했었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현장 주임이었던 존 스톤의 눈 밖에 난 까닭에 그의 순로는 항상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곳을 배정받았다.

 

3년간의 힘든 보결 집배원 생활을 마친 그는 마침내 '정규 집배원'이 되었으나 늘 술과 도박 여자에 빠져 살던 그는 여전히 현장 주임의 감시 대상 일순위였다. 어느 날 규정 위반으로 여러 장의 경고장을 받아든 그는 결국 3년 반만에 사직서를 제출한다. 백수가 된 헨리는 경마를 하며 소일한다. 같이 동거하던 여자 베티가 타자수로 취직하면서 그와 헤어지고 그는 텍사스 출신의 젊은 여자 조이스를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다시 빈털털이가 된 그는 조이스와 함께 텍사스로 향하지만 조이스의 부모와 조부모는 그가 혹시 그들의 재산을 탐내어 조이스와 결혼하지 않았는가 의심한다. 조이스의 권유에 따라 그는 결국 우편 사무원으로 다시 취직하지만 그들은 결국 이혼한다.

 

스툴에 앉아 우편물을 분류하는 일을 하면서 그는 현장 주임의 감시하에 정해진 시간 내에 분류를 마쳐야 하는 표준화 된 노동생산성의 노예가 된다. 이 때의 미국은 빈틈없는 작업방식의 구축과 기계적 반복작업의 실행을 바탕으로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하는 '포드주의'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비인간적인 작업환경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주변 사람들. 그러나 헨리는 이러한 체제에 견디지 못하고 반항한다. 그가 반항하는 방식은 주로 섹스와 술이었다.

 

"우체국 업무는 하룻밤 열두 시간 근무에다가, 현장 주임을 더하고, 우편 사무원들을 더하고, 살덩이들 틈에서 제대로 숨도 쉴 수 없는 분위기를 더하고도, 거기에 <비영리> 식당에서 만든 쉰 음식까지 참아야 하는 일이었다." (p.126~p.127)

 

헨리가 마지막에 만난 여자는 페이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언제나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반전 운동을 하는 페이는 전남편에게서 받는 생활비 수표로 근근이 살아가는 여자였다. 페이는 이따금 워크숍에 참석하고 글을 쓰기도 했다. 페이가 임신을 하고 딸을 낳았다. 그럼에도 헨리는 기계의 부속품처럼 반복되는 고된 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페이는 결국 딸을 데리고 집을 나간다.

 

"지나간 11년이 머리를 뚫고 지났다. 이 일이 사람을 갉아 먹는 것을 봐왔다. 사람들은 흐늘흐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도지 우체국에 지미 포츠라는 직원이 있었다. 내가 처음 왔을 때 지미는 흰 티셔츠를 입은 건장한 사내였다. 이제 그때 그 사람은 사라졌다. 그는 바닥에 가능한 한 가까이 붙어 앉아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로 버티고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이발도 못 했고 3년 동안 똑같은 바지를 입었다. 일주일에 두 번 셔츠를 갈아입었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우체국이 그를 살해한 것이다. 그는 쉰다섯 살이었다. 퇴직까지는 7년이 남아 있었다." (p.219~p.220)

 

헨리는 결국 사표를 내고 다시 고주망태로 변한다. 그는 술에 취해 쓰러졌다가 다시 깨어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자신이 소설을 쓸 것 같다고 생각하였고, 소설을 썼다.

 

"2층이었다. 문을 열었더니 사람들이 있었다. 우정 사업 본부 직원들. 한 여자는 불쌍하게도 팔이 하나밖에 없었다. 거기 영원히 있겠지. 나처럼 늙은 주정뱅이가 되는 거나 다름없다. 뭐, 다른 동료들이 말하듯이 어디에서라도 일은 해야 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그게 노예의 지혜였다." (p.232)

 

찰스 부코스키의 책이 대개 그렇듯 <우체국> 역시 그의 경험에 바탕을 둔 자전적인 소설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헨리 치나스키는 반복되는 일상과 부속품으로 전락한 자신의 모습에 끝없이 절망한다. 절망의 나락에 빠진 자신을 건져내기 위해 그는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소설을 씀으로써 자신을 구제한다. 자신을 돌보는 마지막 방법으로 소설 쓰기를 선택한 것은 찰스 부코스키답다.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멋있게 들리는 건 내가 도박하듯 글을 쓰기 때문이다. 너무 신중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연구하고, 가르치고, 그리곤 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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