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라는 안정제
김동영.김병수 지음 / 달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따금 생각합니다. '필연'이란 수천 번의 어긋남에서 비롯된 '우연'의 결합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예컨대 날씨 화창했던 토요일 오후, 만나기로 약속했던 친구가 전해 온 짧은 사과와 부득이하게 약속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는 문자. 취소된 약속으로 인해 갑자기 비어버린 오후의 시간. 우울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모처럼 나간 산책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 그리고 지속되는 만남과 깊어지는 관계. 이런 상투적인 만남이나 사랑이 비단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만 가능한 일은 아니겠지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작가는 우연과 필연에 대해 설명합니다. 대략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직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중략)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오직 우연만이 웅변적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조금 더 과장하자면 삶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는 '우연'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연은 '알 수 없음'에서 비롯되는 '불안'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근원을 따져 묻고, 그곳에서 마주치는 수없이 많은 '우연'의 기원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야말로 불안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불안을 내포한 혼돈이란 분명 고통스러울 테구요. 고통의 출발은 언제나 그렇게 단순한 법이지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두 손과 팔 그리고 가슴이 마비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가져본 적 없는 공포가 찾아왔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검지를 이빨로 물어뜯어 피가 나오게 했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리고 이내 메스꺼움을 느껴 구토를 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거친 나의 호흡만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모른다."      (p.119~p.120)

 

김동영 작가의 <당신이라는 안정제>를 읽었습니다. 언제였던가요?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가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랐을 때, 나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이름 때문이었는지 책의 내용조차 조금 미심쩍어 했었던 듯합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쉽게 그를 잊고 말았습니다. 내가 그렇게 그를 잊고 지내는 동안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한두 권의 책을 더 출간했고, 나름 괜찮은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이유도 없이 한동안 심하게 아팠었나 봅니다. 그가 공황장애로 칠 년을 앓는 동안 한 달에 한두 번씩 만났던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전문의 김병수 박사와 작가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이 책입니다. 환자와 주치의의 전문적인 치료기록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주고받을 수 있는 솔직한 감정과 사적인 이야기를 포함하여 다양한 주제에 대해 나누었던 두 사람의 생각이 이채롭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혼자가 아니라 나 아닌 누군가와 함께할 줄 아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혼자가 아니라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묶여 있지 않음으로가 아니라 묶여 있으므로 자유를 느낄 수 있고, 혼자보다 둘이 되어야 평화로워질 수 있는 존재다. 혼자보다 좋은 둘이 아니라, 반드시 둘 이상이 함께 가야만 하는 길이 우리 삶이다." (p.321)

 

앞에서 말했듯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기본요소는 제 생각에 '우연'인 듯합니다. 그리고 '우연'은 기본적으로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삶의 근원을 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공포를 느끼는 이유도 거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은 우연이나 불안, 미래의 불확실성은 애써 외면한 채 그저 순간순간의 기쁨에만 집중하며 살고 있습니다. '왜 사는가?' 생각하면 기본적으로 우울해지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잠재적인 정신질환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우리에게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 지금의 내 모습은 왜 이래야만 하는지,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지금 닥친 일들은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설명해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정답일까요? 삶은 그렇게 흘러가도록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일까요? 아닐 겁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그 어떤 설명도 유효하지 않습니다." (p.328~p.329)

 

많은 우연으로 구성된 2015년의 수많은 일들이 이제 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내게 다가올 2016년의 또 많은 우연들은 제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알지 못하기에 설레고 더 흥분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중에는 어쩌면 내가 모험을 하듯 도전해야 할 버거운 일들도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삶을 지속하는 한 나는 또 2016년의 이맘때쯤에 그 많은 일들을 내 기억의 뒤편으로 가벼이 밀어내고 있겠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