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아침운동을 나서는데 어찌나 춥던지요. 어제 아침은 얼마나 춥고 바람이 거세던지 결국 산에 오르는 건 포기하고 아파트 인근의 체육공원에서 가볍게 몸을 푸는 걸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집을 나서기 전부터 '오늘은 기필코 산을 오르고야 말겠다.' 굳은 결심을 하엿던 것입니다. 사납게 불던 바람은 잦아들었지만 볼에 닿는 찬 기운이 에이듯 매서웠습니다.

 

발길을 움직일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조용한 숲에 울려 퍼졌습니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이따금 계곡을 거슬러 오르는 바람이 능선에 쌓인 눈을 등산로 옆 나뭇가지에 하얗게 흩뿌려 놓았습니다. 어렸을 적 누나가 떠준 빵모자와 벙어리 장갑을 끼고 바람 매서운 길을 30여 분 걸어 학교에 가던 생각이 나더군요. 털실로 짠 모자와 장갑은 바람이 불 때마다 바깥 추위를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었지요. 손과 발 귀가 꽁꽁 언 채로 학교에 도착하면 벌써 등교한 친구들이 아직 불도 붙지 않은 난로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곤 했었습니다. 서로의 체온을 조금씩 나눠주면서 말이지요.

 

오늘 만났던 사람들마다 '많이 춥지요?' 하고 인사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네 인사말이 참으로 다양합니다. 판에 박은 듯이 '안녕하십니까?' 나  '안녕하세요?' 또는 서양식의 '좋은 아침입니다.'가 보편화 되었지만 과거에는 '진지 드셨습니까?'와 같은 실제적인 물음이 인사를 대신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진심이 담기지 않은 요즘의 빈 인사말보다 진심이 가득 담긴 과거의 투박한 인사말이 더 정감이 가는 것도 그런 이유인 듯합니다.

 

오늘 뉴스를 보다 보니 대통령이 노동5법 등의 입법을 촉구하는 재계의 서명운동에 동참했다는 소식이 있더군요.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그렇게 한가한 직책이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얼마나 할 일이 없고 무료했으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대기업과 재벌단체가 하고 있는 서명운동에 동참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보좌관들은 대통령을 위해서 하다 못해 뜨게질 거리라도 사다 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더군요. 비서실 직원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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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1-20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날씨에도 운동을 ...으...머..멋...지십니다.
힘을 빼고 걸을시길..하긴 운동하면 열이발생하니
덜 춥긴...하죠. 그래도 마주오는 바람의 차가움은.
매서운데.ㅡ옷 잘 챙겨입고 다니시길 바랍니다.^^

꼼쥐 2016-01-21 13:02   좋아요 1 | URL
오늘은 부딪히는 바람이 한결 부드럽더군요. 올해는 소한이 대한 집에 와서 얼어 죽게 생겼습니다. 다음주에는 조금 풀리겠지요. 그러면 겨울도 다 가겠지만 말입니다.

[그장소] 2016-01-21 17:14   좋아요 0 | URL
오...재미있는 표현입니다..소한이 대한 집에 와...얼어죽다..ㅎㅎㅎ
겨울 걸음은 느리고 뒤끝도 깁니다..도마뱀 꼬리마냥...잘린 걸 두고 몸통만 가서..남은녀석이 휭허니 있다 지독을 부리는게
겨울 끝이곤 합니다. 끝났나 싶음 아직. .갔나
싶음 저기..그런 식이죠..오죽함 이른 녀석이 빼꼼 고개빼고 지가 어딜 껴야하나 들여다 본다고 봄 , 아직 있나..가긴 갔나..들여다 봄..해서 봄이잖아요.^^

우민(愚民)ngs01 2016-01-21 0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급격한 체온 변화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꼼쥐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할 일 없으면
역사책이나 보시든지 말입니다. 정치란 분배고
나눔이다. 문제는 어느 계층의 세금을 거둬 어느 계층에 나눠줘야 하는가이다. 역사를 보면
백성을 짜내어 탐관오리 배를 불린 것과 지금의 서민 등골 뽑아 재벌들과 고위직 배 불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말입니다.

꼼쥐 2016-01-21 13:05   좋아요 1 | URL
제가 생각하기에 역사책을 비롯한 인문학 서적과는 담을 쌓은 것 같아요. 물론 독서 자체도 싫어하는 것 같지만. 차라리 그 큰 공간에서 할 일 없으면 아프리카 신생아를 위해 털모자라도 뜨는 게 어떨지 생각했습니다.

우민(愚民)ngs01 2016-01-21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털모자 좋은생각이시네요!
 
[우물에서 하늘 보기]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물에서 하늘 보기 - 황현산의 시 이야기
황현산 지음 / 삼인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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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은 속절없이 시를 썼다. 아들딸을 잃고 시를 썼고, 때로는 불행한 부모들을 대신해서도 시를 썼다. 그 절망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비애의 극한이 잊힐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p.93)

 

자신의 유익을 탈탈 털어 세상의 무익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여전히 바보믜 무리에 속하는 천덕꾸러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무익이 합쳐져 세상의 빛이 되고 따사로운 온정이 된다는 걸 저는 알고 있습니다. 황현산의 시 이야기 <우물에서 하늘보기>에서도 작가는 줄곧 시 이야기를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시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은 오히려 오늘 내린 한파 주의보보다도 더 익숙하고 오래된 차가움일런지 모르겠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저는 '시 안 읽는 사회'라는 제목의 포스팅을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일부만 옮겨 보면 이렇습니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나는 시인도 아니고, 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닌, 순수 독자의 입장에서 시가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다. 시인의 속내를 낱낱이 알지 못하더라도, 시가 전하는 그 울림만으로 설레이던 시대가 있었다. 맘에 쏙 드는 시구를 연애편지에 인용하며, 제가 쓴 것인 양 얼굴을 붉히던 그리움이 있었다. 술동무를 옆에 두고, 노래 삼아 시를 읊조리던 젊음이 있었다. 우리는 시를 잃고, 사랑을 잃고, 그 속에 숨겨진 설레임, 그리움, 그리고 젊음의 낭만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시를 모르고 어찌 문학을 논하랴.

시를 모른 채 어찌 사랑을 노래할 것이며, 순수의 아름다움을 어찌 볼 수 있으랴.

시를 제쳐 두고 주옥같은 언어의 향연을 어찌 즐길 수 있으랴.

시는 문학의 태동이자, 끊이지 않는 북소리이다.

시는 언어가 아닌 몸짓이며, 아픔을 위로하는 따뜻한 손길이다.

시는 논리를 따라 흐르는 나의 의식이 아닌, 무의식에 흐르는 작은 흔들림이다.

 

시를 읽지 않는 사회! 그 각박한 현실을 사는 우리는 무엇에서 위로받을 것이며,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그 통로를 무엇에 의지하여 찾을 것인지... 시를 쓰지 못하는 문학가는 한낱 글쟁이에 불과하며, 그 글을 읽는 우리는 영혼을 잃은 로봇에 불과하다. 사랑은,설레임은, 그리움은,낭만은 언어가 아닌 시에 숨겨진 떨림이기 때문이다.

 

2014년 한 해 동안 '황현산의 우물에서 하늘보기'라는 제목으로 <한국일보>에 연재햇던 27개 꼭지의 '시화(詩話)는 이육사의 시 '광야'를 비롯하여 김종삼의 시 '북치는 소년', 김수영의 '꽃잎', 백석의 '사슴' 등을 통하여 '시가 꼬투리를 만들어준 이야기들이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사안들과 만나' 독자의 가슴에 시적인 어떤 것을 아로새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작가의 시 이야기는 단순히 시의 해석에 그치지 않고 시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으로 이어지는가 하면 한수산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숨결처럼 시를 토해내다 시러진 박정만 시인, 가난과 질병으로 삶을 마감한 진이정 시인, 자본주의적 욕망의 피안을 보여주었던 최승자 시인 등 시인의 삶을 함께 더듬고 있습니다.

 

"시 쓰기는 끊임없이 희망하는 방식의 글쓰기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시가 말하려는 희망은 달성되기 위한 희망이 아니라 희망 그 자체로 남기 위한 희망이다. 희망이 거기 있으니 희망하는 대상이 또한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 희망이다. 꽃을 희망한다는 것은 꽃을 거기 피게 한 어떤 아름다운 명령에 대한 희망이며, 맑은 물을 희망한다는 것은 물을 그렇게 맑게 한 어떤 순결한 명령에 대한 희망이다. 시를 읽고 쓰는 일은 희망을 단단히 간직하는 일이다." (p.262)

 

대한민국의 2016년 1월은 한파 주의보, 채무 주의보로 꽁꽁 얼어 붙었지만 사람들 가슴에는 온통 행복 주의보가 내려지기를 간절히 희망하게 됩니다. 시의 어느 한 구절이 단초가 되어 사그라들었던 희망의 불꽃을 다시 살려내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어쩌면 2016년 1월은 시의 부활, 희망의 부활을 알리는 시발점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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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 당신과 문장 사이를 여행할 때
최갑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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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연말이면 수척해진 내 희망의 뺨을 몇 번이나 어루만지며 자책과 함게 긴 한숨을 내뱉게 됩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외롭기 이를 데 없는 나만의 송년회인 셈입니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빈 방에는 졸음에 겨운 형광등 불빛과, 반성의 글 한 줄쯤 기대하며 지루한 시간을 견디고 있는 노트와,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몇 시간째 뱅글뱅글 맴을 도는 연필과, 문틈을 비집고 고개를 내미는 오래된 추억들이 흐르는 시간만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습니다. 창밖에는 이따금 겨울의 침묵 속으로 고독을 섞는 바람이 드세게 붑니다.

 

그렇게 밤을 지새고 나면 내 삶을 시간이 훑고 지나가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시간을 천천히 밟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헷갈리기만 합니다. 우리네 삶으로부터 피안처럼 멀기만 한 이상적인 삶, '본질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단념했기 때문에 삶을 즐기게 되었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매번 자신의 욕심 때문에 그 구질구질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떠밀려 갑니다.

 

"나는 지금 삶을 즐기고 있다."

난롯가에서 버트런드 러셀을 읽다가 이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온화하지만 이기적인, 다정하지만 냉정한, 따스하지만 논리적인 이 노신사의 책을 읽고 잇노라면 마치 그의 마른, 하지만 부드러움이 전해지는 손바닥이 어깨 위에 놓인 것만 같다. 가끔은 어깨 위의 손을 밀치며 '행복이라는 게 정말 있기나 한가요?' 하고 물어보고 싶기도 하지만. (p.114)

 

눈에 보이는 현실을 현실로서 차갑게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문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사는 지구상에는 갖가지 핑계를 대며 '다음에는 기필코'를 외치는 과대망상의 환자들로 넘쳐난다고 해야 맞겠지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도전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인류는 진보를 거듭했다고 주장한다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수십억의 사람 중에 단 몇 사람이 이룬 성과를 코앞에 들이대며 '그러니 너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희망고문은 과연 정당한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회의론자도 아니고 패배의식에 물든 퇴폐주의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보다는 현실을 현실로서 깨끗이 인정하고 단념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용기 없는 사람 중 한 명일 뿐입니다.

 

지난 연말에 나는 최갑수의 여행에세이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를 읽었습니다. 그의 푸석거리고 윤기 없는 허무의 감정이 실린 한 문장 한 문장마다 까슬까슬한 돌기가 되어 내 가슴께를 꾹꾹 누르며 지나갑니다. 어쩌면 저는 태고적 허무를 제 몸 속 어딘가에 감추어 둔 채 태어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기에 쓸쓸함을 담은 그의 글 하나하나가 제 몸 속에 들어와 요동을 치는 것이겠지요. 작가는 이 책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삶과 사랑과 여행에 관하여 쓰고 있습니다. 낯설거나 익숙한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며, 작가가 읽었던 책들, 자주 들었던 음악, 그리고 그의 심장에 인장을 찍듯 꾹꾹 각인된 문장에 그의 생각을 사진과 함게 덧붙였습니다.

 

이를테면 "이 세상 살아 있는 생물들은 모두 온 힘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이다." (후지와라 신야 '인생의 낮잠'중에서), "저기 밖에는 다른 삶이 있어. 내 말을 믿어."(레이먼드 카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중에서), "아무리 늙었다 해도 행복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니까."(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중에서)처럼 여행지에서 또는 그 어느 곳에서건 작가로 하여금 한동안 사색에 젖게 했던 문장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과 작은 깨달음이 선별하여 실은 사진과 함께 새로운 느낌으로 되살아납니다.

 

"세월이 간다. 하루에 하루씩 꼬박꼬박 가고 있다. 후지와라 신야 영감을 읽다 눈에 띄는 한 구절. "이 세상 살아 잇는 생물들은 모두 온 힘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한 적이 있었던가. 일에도 사랑에도 여행에도 그런 적이 있었던가. 시월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p.190)

 

한 사람의 글은 그 사람이 겪은 경험의 산물이자 귀결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따금 글도 생각도, 또는 말도 한 장소에서 우연히 얻게 되는 지역 특산물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다만 그 시각에, 그 장소에 내가 있었다는 이유로 내게 전달되었고 제 입과 손을 통하여 또 누군가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한풀 용기가 꺾이고 괜한 일로도 주눅이 드는 요즘입니다. 작가의 글은 얼핏 삶의 허무를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한 해의 말미에 느끼는 삶의 허무를 인생의 무상함으로 치유한다고나 할까요? '이열치열'이라는 말처럼 '이허치허'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수나 자질구레한 사건, 다툼 따위를 '에이, 이런 것쯤이 뭐라고'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잇었던 것은 아마도 피라미드 앞에서 배운 '허무의 감각'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죽어서 저렇게 커다란 삼각형도 하나 못 만드는 인생, 대충 넘겨가며 사랑하며 살자' 하고 생각할 수도 잇는 것이 인간이니까."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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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 - 그리움을 안고 떠난 손미나의 페루 이야기
손미나 지음 / 예담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불과 몇 년 사이에 여행기를 많이도 읽었다. '여행작가'라는 새로운 직업군에 편입된 사람들이 꾸준히 증가한 탓도 있을 테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뭔가 특별한 걸 원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여행기만큼 달콤한 유혹이 또 있을까.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푸른 하늘과 이국적인 건물들, 그리고 넘실대는 파도와 마냥 행복한 듯 보이는 관광객들. 그러나 여행기를 탐독하며 한 켜 두 켜 부러움이 쌓이는 동안 여행기가 주는 위로와 대리만족의 기쁨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최근 몇 달 동안은 여행기를 읽지 않았다. 유행하는 여행기라면 다들 비슷비슷해 보였다. 내용보다는 사진이 더 많은 여행기를 굳이 시간을 내어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작가는 분명 다른 사람인데 마치 한 사람이 장소만 바꾸어 여행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행기라면 이제 하도 많이 읽어서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몇몇 생각나는 여행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성용의 '여행생활자'나 후지와라 신야의 책들, 정희재의 '나는 그곳에서 사랑을 배웠다'와 박준의 '온 더 로드',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산책'과 이병률의 '끌림', 호시노 미치오의 '여행하는 나무'와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오소희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오다나의 '미치도록 즐거워',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그리고 손미나의 '스페인 너는 자유다'.

 

그 외에도 많았다. 여행기라기보다는 외지 생활기라고 해야 옳을 듯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와 기억나지 않는 그렇고 그런 여행기들. 내게 손미나는 아나운서 손미나보다 여행작가 손미나로 기억되고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그녀의 첫작품이었던 '스페인 너는 자유다'가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어 출간된 '태양의 여행자'를 비롯한 몇몇 책들은 나를 실망시켰다. 말하자면 이 책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는 내가 읽은 손미나의 두 번째 여행기인 셈이다.

 

"바다처럼 넓게 펼쳐진 녹색 평원에 드러누워 있자니 내가 잔디가 되고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된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인간이란 애초에 잔디나 바람 같은 존재와 다를 바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그저 모든 것을 순리에 맡긴 채 주어진 삶을 살아내면 되는 것이다." (p.154)

 

마추픽추로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페루, 작가는 능통한 스페인 어 덕분인지 페루 현지인들과 쉽게 동화되어 그들 속으로 녹아든 듯했다. 아마존 열대 밀림과 티티카카 호수, 쿠스코와 바예 사그라도, 나스카 라인과 콜카 캐니언의 콘도르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페루의 명소를 마치 현지인 안내자처럼 소개한다. 그러나 나의 괸심을 끌었던 것은 그런 명소가 아니었다.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지구 반대편의 명소이지만 나는 이미 텔레비전과 다른 매체를 통해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이제 그런 것들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작가가 만났던 현지인들과 그곳에서의 에피소드, 또는 자연 속에서의 작은 깨달음에 더 눈길이 갔다.

 

"젊은 아가씨, 우리의 땀이 곧 우리의 삶이에요. 인생은 그런 거지요. 어디에서 살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똑같아요. 중요한 건 가슴에,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 있죠. 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요. 당신도 부디 행복하세요."(p.92)

 

위의 인용문은 푸에르토 말도나도에서 만난 작은 식당의 여주인이 작가에게 들려준 말이었다. 우연처럼 다시 만난 택시 기사 그레고리의 따뜻한 환대와 스페인 유학 시절에 만나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 이야와의 만남 그리고 마추픽추 동행. 페루를 떠나기 전날 이야 가족의 초대. 여행은 이처럼 뜻하지 않은 작은 우연의 결합으로 인해 더 풍성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나씨, 살다 보면 아주 우연히 소중한 인연들을 만날 때가 있죠. 그것이 아무리 찰나라 해도 인생을 두고 영혼을 행복하게 해줄 만남들이 있어요. 그런 친구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 너무 부담 갖지 마요." (p.273)

 

잠시 동안 사귄 외국인 친구 그레고리가 작가의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의식을 치러주고 작가에게 건넨 말이다. 그에 더하여 그레고리는 작가를 위해 음식을 장만하여 자신의 집에 초대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깜짝 파티인 셈이었다. 가난하지만 손님을 극진하게 대접하고 우정을 나누고 서로 사랑할 줄 아는 그들에게 작가는 깊은 감동을 받았던 듯하다. 우리가 시시각각 여행을 꿈꾸는 이유는 바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여행은 인생의 대로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을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인생의 샛길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연처럼 작은 행복을 발견하기도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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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꽁꽁 숨겨둔 채 실컷 변죽만 울리다가 그냥 돌아섰던 기억, 혹시 있으신지.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제게도 그런 경험 한두 번쯤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사춘기 시절의 수줍은 고백담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요.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할 말 못하고 애면글면 속만 끓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지만 말입니다.

 

청소년기에 저는 누구나 어른이 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언제 어느 때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게 민주주의라고 교과서에서 배웠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런 자유는 청소년기에 더 많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습니다. 참 순진하다구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시절에는 저보다 더 순진한 사람들이 어디를 가나 넘쳐나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른들에게 있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저는 어른이 되고도 한참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말로 다 하지 못하는 답답함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책에서는 속 시원할 정도로 잘 정리되어 있더군요. 어렸을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던 책이 어른이 된 후에도 많은 위안이 되리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었는데 제게는 그야말로 신세계나 다름없었습니다. 논리는 없고 오직 이념만 존재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책에 빠져들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요. 이따금 '제국의 위안부'와 같은 한줌 값어치도 없는 책들이 출간되기도 하지만 그거야 얼마든지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겠지요.

 

무슨 말만 하면 종북이니, 좌빨이니, 수구꼴통이니 하는 이념적 단어들이 모든 논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은 역할을 하는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는 책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가끔 대한민국에서는 말할 수 있는 자유보다 쓸 수 있는 자유가 더 폭 넓게 보장되는구나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읽을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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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1-14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런 면도 확실히 있네요.^^
그런데 책에도 아직 그 경계는 있는듯해요.
나쁜책 좋은책 ..하며..표현에 대한 고르기 랄까..
언어 등급이 있는것 같다고 느끼는 적도 있어요.
약간 더 나가면 외설처럼 빼버리고, 확 나가지
못하는 애매한 선 위에 문학이 있는건 아닌가...
할 적이 있거든요.ㅎㅎㅎ

꼼쥐 2016-01-15 14:46   좋아요 1 | URL
그렇죠. 아무래도 유교적 전통이 오랫동안 지켜져 온 우리나라에서 서구나 일본처럼 적나라하게 쓴다는 건 아직 익숙하지 않은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데는 책이 좋은 것 같아요. 누구를 붙잡고 대화하다가 괜한 소리로 한발짝도 더 나가지 못하는 것보다는.

[그장소] 2016-01-15 21:04   좋아요 0 | URL
맞아요..거침없는 표현이나 그 아슬한 경계를 문학이 대변해주기도 하죠.저도 그래서 책이 도피의 혹은 우회의 수단이라고 늘 생각하는 1인 입니다.^^

우민(愚民)ngs01 2016-01-14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현의 자유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하지요
그래도 가끔은 출판계에도 기득권 세력이 그들만의 홍보와
텃새 나아가 끼리끼리 표절도 묵인해 주는 나쁜 관습은 없어져야 하지 않을 까요?

꼼쥐 2016-01-15 14:48   좋아요 1 | URL
작년에 있었던 신경숙 작가의 표절 문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죠. 어디 그분 한 사람뿐이었겠습니까. 다만 그분이 유명한 죄로 시범케이스가 되었겠죠. 출판계도 의외로 좁아서 한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이니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간 경우가 많았겠죠. 당연히 고쳐져야 할 일이지만.

초딩 2016-01-15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콜로세움의 던져주는 빵을 게글스럽게 먹느니, 담장아래에서 참을 인자 세번 쓰며 책을 읽는게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 백년에 한 번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더 없이 좋을 것 같구요. 딱히 바라진 않지만 :-)

꼼쥐 2016-01-15 14:50   좋아요 2 | URL
정말 멋진 비유입니다.^^
작금의 세태를 정확하게 짚어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