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아직, 연애가 필요해
차현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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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특색 없고 밋밋한 시간들이 더디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 성긴 시간들 속으로 흐릿한 추억들이 언뜻언뜻 끼어들고, 지친 기색의 사람들이 무채색의 오후 일과를 습관처럼 펼쳐듭니다. 아침나절 맑았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우중충한 얼굴을 드러냈건만 사람들은 그저 심드렁한 표정으로 '관.심.없.음' 팻말을 공공연히 드러낸 채 그저 제 할 일에 빠져있었습니다. 기다림은 일상인 양 또 익숙합니다. 왠지 활력이 느껴지지 않는 목요일 오후. 차현진의 <내겐 아직, 연애가 필요해>를 읽으며 '아, 진작 연애나 할걸'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지금 내게 연애는 과연 어떤 느낌일까? 아주 오래전에 외웠던 수학 공식처럼 시시한 느낌인 것도 같고, 지난 봄에 피었던 산수유꽃처럼 흐릿한 색깔인 듯도 하고, 마치 오늘의 풍경처럼 시큰둥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목요일 오후의 나른함을 극복하기 위해 집어든 책이건만 과거를 향해 내달리는 생각을 어찌하지 못한 채 그저 하염없었습니다.

 

"우리가 그 시간 속,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난 우리가 만만해졌으면 좋겠어." 아, 담백해. 사귀자는 말을 이렇게 사소하게 건네던 그였다. 그 말 한마디가 내 평범한 시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 (p.21)

 

그녀는 자신이 만났던 8명의 남자에 대한 추억과 느낌을 책에 적었습니다. 그녀가 겪은 일종의 사랑 회고록이라고나 할까요. 뭐,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녀에겐 아직 남겨진 사랑이 있을 테니까요. 이 책에서 그녀는 자신이 만나 한때 사랑했던 남자들의 각기 다른 느낌과 지금 시점에서 바라보는 자신의 변화를 감각적인 문체로 쓰고 있습니다. 모두 이별한 사람들이고 그 이별의 기억들 하나하나가 버거울 텐데 그녀는 마치 자신이 들었던 다른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는 것인 양 그저 담담할 뿐입니다.

 

"이게 마지막이어도 좋다. 어쩌면 나는 이 3초의 포옹을 평생 가슴에 넣어두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그가 내 영혼을 가만히 어루만져주는 이 느낌을 끝까지 간직하고 살아가면 되니까. 그건 아무도 못 뺏어가는 거니까. 한걸음도 내딛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진, 앞으로 나가야만 한다." (p.177)

 

그녀의 사랑 이야기는(아니 이별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어쩜 그렇게 제각각 다를 수가 있을까요. 무명의 개그맨에서부터 식품회사의 젊은 CEO, 일본에서 활동하는 디젤 모델, 항공사의 부기장 등 직업도 다양하지만 그들과 함께 했던 사랑의 색조는 무지개처럼 다채로웠습니다. 그녀의 연애 경험은 젊었던 시절의 나와는 크게 달랐습니다. 나는 비슷비슷한 성격의 비슷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을 주로 만났던 듯합니다. 그런 까닭인지 나는 지금도 여자에 대해서는 별반 아는 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혹은 여자라면 다 이런 것을 좋아한다거나 저런 것은 싫어할 것이라고 뭉뚱그려 추측하기도 하지요. 말하자면 나는 오늘의 풍경처럼 밋밋하고 단조로운 사랑만 했었나 봅니다.

 

이따금 후회의 마음이 들지 않는 건 아닙니다. 그때 나는 왜 조금 더 적극적이지 못했을까, 연애의 시기는 인생에서 찰나의 시간처럼 짧다는 걸 왜 진작에 알지 못했을까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사랑도 연애도 인생의 소중한 경험이라는 걸 이제야 알 것 같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경험했던 이별의 모습은 사랑만큼이나 다양했습니다. 어쩌면 사랑의 순간은 세월에 따라 빛이 바래고 기억마저 희미해지는 것이지만 이별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고 오래도록 가슴 깊이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렇게 자신의 마음을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편할까? "나도 방금 니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그대로 말하고 싶었어. 그런데 난 그게 안 되는 사람이야.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가 말로 나오지 않아." 그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사이에 숨어 있는 수많은 계절, 그 쪼개진 틈에도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많은 단어를 가지고 있어서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 바로 그였다." (p.248)

 

인생이 의도하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지는 것처럼 사랑 또한 의도하지 않았던 시간에, 기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낯설게 다가오는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생경한 느낌에 가슴 설레고 마치 지구 밖의 지구 위에서 단 두 사람만 존재하는 듯 잠깐 넋이 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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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정하 지음 / 문이당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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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햇살을 등지고 낯선 감정의 알갱이들이 몇 톨 서걱거렸다. 하루하루 기복없이 반복되는 순한 감정들을 제외하면 하루에 생겨나는 새로운 감정이란 게 사실 별것도 없지만 이따금 소금 알갱이처럼 서걱거리는 감정이 밀물처럼 출렁일 때가 있다. 때론 깊어졌다가 때론 아무일 아니라는 듯 스쳐 지나가는 감정의 변화들이 봄날씨처럼 변덕스럽기만 하다. 그런 날이면 나는 시를 읽는다. 손사래를 칠 만큼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 한 편을 두고 한나절 생각에 잠긴다. 그렇게 나는 나에게로 간다. 빨리도 느리지도 않게 천천히.

 

색깔도 없이 다만 형태로만 존재하는 물동그라미의 파문처럼 내 마음의 호수 위를 일렁이며 떠다녔을 숱한 감정의 흔적들을 찾아 나는 오늘 시 한 편을 화두 삼아 기신기신 헤매었다. 이정하 시인이 쓴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를 읽는 내내 약간의 두통이 있었고, 열병을 앓던 첫사랑의 순간에 닿아 있었고, 아련한 그림움의 옛기억들을 사랑인 양 반겼었다. 사랑은, 그대가 늘 그랬던 것처럼, 그대에게 꼭맞는 언어로 그리움이 놀다 갔을 당신과 나 사이의 틈새를 메우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 책에는, 그동안 독자들이 사랑해왔던 시들과 새로 쓴 시 여러 편, 그리고 왜 이 시를 썼는지에 대한 나의 변辯을 묶어 함께 엮었다. 시로 다할 수 없는 이야기. 시 속에 감춰진 나의 고백 같은 것을 덧붙였는데, 그 일을 하는 동안 나는 내내 자책과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혀야 했다. 그때는 왜 그리 바보스러웠는지, 할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 새로 시작하고 싶다." ('작가의 말' 중에서)

 

시인이 쓴 시어에는 사랑, 이별, 슬픔, 그리움, 삶, 추억 등 어느 한 시절 마음에 담은 누군가로 인해 자신이 알던 언어를 모두 버린 채 그대와 나 사이의 언어를, 둘만의 맞춤법을 새로 배우고, 어쩌면 세상과, 세상에 통용되는 질서마저 새로 배웠을 찬란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1장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 2장 '그대라는 이정표', 3장 '조용히 손을 내밀었을 때' 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각 장마다 사랑과 이별, 혹은 삶에 대한 시와 그에 대한 시인의 설명이 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여 이채롭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봄햇살이 유난히 싱그러운 오늘, 먼 곳에 있던 추억이 '물처럼 내게 밀려오'고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그 시절의 언어가 마치 호수면을 스치는 봄바람처럼 옅은 파문을 일으켰다. 반짝이는 추억의 물비늘에 가슴까지 촉촉히 젖어들었다.

 

"그래, 사랑은 그런 우직한 사람만 하는 거다. 모든 걸 다 잃는다 해도 스스로 작정한 일, 소멸할 줄 뻔히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제 몸을 불태워 그대에게 건너가는 저 유성처럼." (p.267)

 

나는 왜 반짝이던 그 시절에 긍정의 후회 한 줄 남기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왜 이별을 위한 사랑 한 소절 남기지 않았을까. 이성을 닮은 무분별한 열정 하나로 완벽해지지 못했을까. 시인으로 인해 하나의 후회가 또 다른 후회로 이어지는 오늘, 봄바람이 철없이 불고 시어처럼 물비늘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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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보다는 의도적으로 그 사람의 내면을 보려는 연습을 꾸준히 하다 보면 '사람들은 다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갖게 됩니다. 물론 제가 실제로 모든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건 아닙니다. 저 자신의 내면도 보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지요. 말하자면 오랫동안 그런 태도를 유지하다 보면 그런 비슷한 이미지, 배경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비슷한 사진이나 그림을 자신의 마음 속에 한 장 갖게 된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조금씩 굳어져 다른 사람도 이럴 것이다, 확대 해석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저는 늘 생각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이런 것입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팔짱을 낀 두 팔을 제 무릎에 올려 놓고 쭈그려 앉은 열 살 남짓의 소녀. 고개를 드는 것조차 힘이 들었던지 무릎 위에 제 머리를 힘없이 뉘인 채 저 멀리 보이는 사람들을 그저 멀뚱히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깊고 깊은 고독, 삶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 이후의 사라지는 것에 대한 공포 등 인간이 내적으로 부딪히는 보편적인 절망과 맞닿아 있습니다. 육체적 고통이야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써 어느 정도 상쇄시킬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하지만 인간 내면의 절망은 순전히 한 개인에게 고착된 것이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유대감은 곧 안쓰러움이나 연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김연수 작가가 어느 인터뷰에선가 이렇게 말했더군요. 자신이 가장 경멸하는 책이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이라고 말이지요. 가짜로 산 인생, 자신이 자서전에 썼던 대로 살았다고 믿는 한심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김연수 작가가 그들을 경멸하는 이유였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결코 그런 삶을 살 수 없는 까닭이지요. 이세돌 9단과 알파고와의 최종국이 지금 한창 진행되고는 있지만 엊그제 있었던 제4국에서의 이세돌 9단의 승리가 많은 사람들을 감동하게 했던 까닭도 그런 데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맞수가 아닌 인공지능과의, 말하자면 이세돌 기사 자신만의 고독한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인간 내면의 고독을 극복하는 과정을 세세히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고독을 이해하고 인간으로서의 강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실생활에서 자주 주어지는 게 아니기에 바둑을 모르는 사람들조차 큰 감동을 느꼈을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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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愚民)ngs01 2016-03-16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뉴스에서 전문직 고소득자의 탈세가 33%
고의누락이라더군요 몰랐던 얘기는 아니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 당연한 듯 여기네요. 특히 굳이 안그래도 될 고소득자들이
말입니다. 그들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보다는
숨기는데 애쓰겠지요!
이런식의 부자들의 세금을 제대로 징수 못하고 간접세로 또는 유리지갑인 근로소득세로
메우려는 정부가 너무 한심할 뿐입니다.

꼼쥐 2016-03-16 13:49   좋아요 0 | URL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인들의 잘못은 투표에서 판가름이 나는 게 당연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가려지니 정치인들은 겁나는 게 없는 셈이죠. 나라를 팔아먹어도 당선될 판이니... 우리 세대에서는 한국의 문화가 바뀌기는 어려울 듯싶어요.
 
우리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 - 마젤란펭귄과 철부지 교사의 우연한 동거
톰 미첼 지음, 박여진 옮김 / 21세기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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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산에 오르는 나로서는 자연에 대한 애정이 각별할 수밖에 없다. 촌에서 태어나 자연 속에서 성장했던 것도 무작정 자연에 끌리는 한 이유가 될 것이다. 겨울이건 여름이건 일단 산에 오르면 나는 그렇게 마음이 푸근할 수 없다. 나무 위를 무리지어 오르는 청설모와 이따금 만나는 고라니의 가벼운 도약을 보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즐겁다.

 

<우리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를 단숨에 읽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자연을 좋아하는 나의 성향 탓이 아닐까 싶다. 호기심 많고 모험심 강한 영국 시골 마을 출신의 청년 톰 미첼은 오직 낯선 곳을 탐험하고, 야생을 보고 싶다는 욕망에 이끌려 남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로 향했다. 그가 갔던 1970년대초의 아르헨티나는 정국이 불안하고 인플레이션이 극심했던 시기였지만 그는 돈을 벌겠다는 욕심보다는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새로운 문화와 자연을 체험하는 게 더 좋다고 그는 말했다. 아르헨티나의 유일한 기숙 학교인 세인트 조지의 선생님으로 자원하였고 그는 그렇게 아르헨티나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니 이전에 보고 들엇던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보고, 남아메리카에 대해 막연하게 품었던 기대와 현실을 비교해보면, 진정으로 중요한 것과 소중한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 세상에는 경이롭게 아름다운 것들과 이루 말할 수 없이 귀중한 것들이 이토록 많은데 인간은 다른 모든 종에게 그토록 이기적이고 잔인할 수 있을까?" (p.281)

 

작가는 어느 날 우루과이 해안의 휴양도시 푼타델에스테 Punta del ESte의 전망 좋은 아파트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친구 벨라미스가 한겨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며 휴가용 아파트를 그에게 기꺼이 내준 것이다. 그렇게 느긋하고 여유로운 휴가를 보낸 작가는 떠나기 전날 서둘러 짐을 꾸리고 청소를 하고 마지막으로 바닷가 산책을 나섰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기름과 타르에 덮여 죽어가는 수많은 펭귄의 사체를 목격한다. 기름유출 사고는 아니었고 환경 관련 규제들이 허술했던 당시의 유조선들은 화물을 내린 후 바닷물에 탱크를 씻기 일쑤였고, 유조선에서 흘려보낸 기름에 의해 많은 펭귄들이 죽어갔던 것이다.

 

그 끔찍한 장면을 보면서 해안을 따라 걷던 작가는 어느 순간 미약한 움직임을 목격하고 걸음을 멈춘다. 죽기 직전의 마지막 고통의 몸부림을 그는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기름에 덮인 펭귄을 들고 아파트로 향한다. 아파트 욕실에서 펭귄을 씻기던 중 부리에 손가락을 물려 깊은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작가는 기름을 제거한 후 바다로 되돌려 보낼 생각으로 열심히 씻겨주었다. 그러나 다 씻긴 펭귄을 데리고 바닷가에 나갔지만 그 새는 펭귄 무리를 향해 나아가지 않고 다시 작가를 따라왔다고 한다. 휴가를 마친 작가는 어쩔 수 없이 그 펭귄과 함께 우루과이로부터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의 험난한 여정을 시작했고 우여곡절 끝에 세인트 조지의 기숙사로 복귀했다. 스물세 살의 영국인 청년과 마젤란 펭귄 후안 살바도르(작가가 붙여준 펭귄의 이름)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후안을 현명한 새라고 생각했다. 후안의 외모도 한몫했다. 성직자들이 입는 빳빳이 세운 흰색 칼라 모양의 털에 길고 검은 망토를 입은 그의 모습은 마치 빅토리아 시대의 어느 너그러운 노신사처럼 보였다. 통풍으로 다리가 불편한 그런 노인 말이다. 아니면 목에 십자가 목걸이만 두르면 주교님처럼 보일 수도 있다. 언뜻 보면 말이다." (p.175)

 

후안의 소문은 학교 전체로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300명이 넘는 학생들과 교직원들, 심지어 경비원이나 청소를 담당하는 아줌마들에게도 후안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작가의 테라스에 거처를 정한 후안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눈을 마주치고 격렬하게 반겨준다. 인간과 동물이라는 관계를 떠나 사람들은 차츰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후안을 대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후안이 좋아하는 청어를 사다 날르고 테라스 청소를 하고 같이 산책을 하는 등 후안은 세인트 조지의 명실상부한 마스코트가 되었다. 그렇게 사람들과 격이 없이 소통하면서 우정을 키워나갔다.

 

"후안은 펭귄이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사회생활을 했다. 불현듯 후안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들은 후안이 보내는 신호를 일일이 받아주고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사람 한 명도 없이 오직 펭귄들하고만 얼마나 살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지금 세인트 조지에 있는 후안 살바도가 그렇게 살고 있을 테니까" (p.247)

 

작가는 후안을 펭귄 무리에 되돌려 보내기 위해 발데스 반도를 둘러보는 둥 노력을 하지만 그것이 결국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후안의 입장에서도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고 판단하기에 이른다. 좋든 싫든 그는 후안을 끝까지 돌보겠다고 결심한다. 방학이면 그는 후안을 세탁실의 사라 아줌마에게 맡기거나 교사 루크에게 맡기고 한동안 여행을 하기도 하면서 잘 지낸다. 그러나 루크에게 맡겼던 어느 여름날 갑자기 후안이 죽었고 루크에 의해 안장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작가는 아르헨티나에서의 특별했던 추억을 안은 채 영국으로 귀국했고, 후안과의 잊지 못할 경험을 책으로 냈다. 이 책에서 작가는 후안이 마치 자신의 친구인 양 코믹하게 쓰고 있다. 노인이 된 작가는 다시 아르헨티나에 돌아와 후안과 지냈던 추억의 장소를 더듬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몇 년 전에 읽었던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를 떠올렸다. 샌프란시스코 만의 기름 유출 사고를 목격하한 후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 시승을 거부하였고, 미국 전역을 걸으면서 17년 동안 말을 하지 않았던 존 프란시스. 이런 책들을 읽으면 인간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우리는 자연에 대해 너무나 잔인하지 않은가 반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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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갈 능주 생중달(死諸葛 能走 生中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시는 분도 있겠습니다만 삼국지에서 전해지는 말이지요. 죽은 제갈량이 살아 있는 사마의를 쫓아냈다는 뜻으로 촉인들 사이에 회자되던 말인 듯합니다. 출사표를 바치는 것으로 시작된 제갈량의 북방원정은 읍참마속(泣斬馬謖)의 비극을 겪은 후에 결국 오장원에서 제갈량이 죽음으로써 끝이 나게 됩니다만 제갈량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자신이 죽기 전에 사마의를 몰아낼 계책을 세웠던 것입니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촉군을 향해 진격했으나, 촉군 진영에서는 제갈량이 살아서 군대를 통솔하고 있었다지요. 혼비백산한 사마의는 꽁지가 빠져라 퇴각하였고 그 바람에 촉군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제갈량이 아니라 제갈량을 본뜬 목상이었습니다. 후에 사마의는 "나는 그의 삶도 헤아리지 못하고 그의 죽음도 헤아리지 못하는구나!" 하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요즘 여당이나 야당이나 4월에 있을 총선에 대비하여 공천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만 그로 인하여 정국이 시끄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웃기는 것은 살아 있는 권력보다는 죽은 사람이 더 무서운 것인지 연일 '친노 패권'이니 '노무현 세력'이니 '노빠'라느니 7년 전에 서거하신 노무현 대통령을 들먹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삼국지에서의 조조도 죽은 관우의 환영에 시달리다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지요. '친박 패권 청산'이라는 구호는 들어본 적도 없으니 살아 있는 권력은 아무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새누리당이든 야당을 표방하는 국민의당이든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의 환영에 시달리는 걸 보면 그들의 최후도 멀지 않은 듯합니다.

 

과연 그들은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요? 무덤 속에서 권력을 행사할 리도 만무한데 말입니다. 뉴스에서 연일 떠드는 바람에 한동안 잊고 지냈던 국민들도 돌아가신 대통령을 다시 그리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깜박 잊었던 그 모습을 선명하게 떠올리기도 하고 말입니다. 야권의 분열로 인하여 여권이 어부지리의 승리를 점치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권력의 향배야 어찌 되든 고인이 되신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많은 국민들이 있는 한 살아 있는 권력은 영원히 고인의 환영 속에서 두려움에 떨어야 할 것입니다. 꽃이 피는 4월이 오면 우리는 20대 국회의원을 새로이 뽑고 허깨비 같은 그들을 국회의원이라 칭하겠지만 5월의 기억은 꿈결인 양 아련한 그리움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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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1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2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