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정하 지음 / 문이당 / 201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오후의
햇살을 등지고 낯선 감정의 알갱이들이 몇 톨 서걱거렸다. 하루하루 기복없이 반복되는 순한 감정들을 제외하면 하루에 생겨나는 새로운 감정이란 게
사실 별것도 없지만 이따금 소금 알갱이처럼 서걱거리는 감정이 밀물처럼 출렁일 때가 있다. 때론 깊어졌다가 때론 아무일 아니라는 듯 스쳐 지나가는
감정의 변화들이 봄날씨처럼 변덕스럽기만 하다. 그런 날이면 나는 시를 읽는다. 손사래를 칠 만큼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 한 편을 두고 한나절
생각에 잠긴다. 그렇게 나는 나에게로 간다. 빨리도 느리지도 않게 천천히.
색깔도 없이 다만 형태로만 존재하는 물동그라미의 파문처럼 내 마음의 호수 위를 일렁이며 떠다녔을 숱한 감정의 흔적들을
찾아 나는 오늘 시 한 편을 화두 삼아 기신기신 헤매었다. 이정하 시인이 쓴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를 읽는 내내 약간의 두통이
있었고, 열병을 앓던 첫사랑의 순간에 닿아 있었고, 아련한 그림움의 옛기억들을 사랑인 양 반겼었다. 사랑은, 그대가 늘 그랬던 것처럼, 그대에게
꼭맞는 언어로 그리움이 놀다 갔을 당신과 나 사이의 틈새를 메우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 책에는, 그동안 독자들이
사랑해왔던 시들과 새로 쓴 시 여러 편, 그리고 왜 이 시를 썼는지에 대한 나의 변辯을 묶어 함께 엮었다. 시로 다할 수 없는 이야기. 시 속에
감춰진 나의 고백 같은 것을 덧붙였는데, 그 일을 하는 동안 나는 내내 자책과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혀야 했다. 그때는 왜 그리 바보스러웠는지,
할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 새로 시작하고 싶다." ('작가의 말' 중에서)
시인이 쓴 시어에는 사랑, 이별, 슬픔, 그리움, 삶, 추억 등 어느 한 시절 마음에 담은 누군가로 인해 자신이 알던
언어를 모두 버린 채 그대와 나 사이의 언어를, 둘만의 맞춤법을 새로 배우고, 어쩌면 세상과, 세상에 통용되는 질서마저 새로 배웠을 찬란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1장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 2장 '그대라는 이정표', 3장 '조용히 손을 내밀었을 때' 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각 장마다 사랑과 이별, 혹은 삶에 대한 시와 그에 대한 시인의 설명이 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여 이채롭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봄햇살이 유난히 싱그러운 오늘, 먼 곳에 있던 추억이
'물처럼 내게 밀려오'고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그 시절의 언어가 마치 호수면을 스치는 봄바람처럼 옅은 파문을 일으켰다. 반짝이는 추억의 물비늘에
가슴까지 촉촉히 젖어들었다.
"그래, 사랑은 그런 우직한
사람만 하는 거다. 모든 걸 다 잃는다 해도 스스로 작정한 일, 소멸할 줄 뻔히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제 몸을 불태워 그대에게 건너가는 저
유성처럼." (p.267)
나는 왜 반짝이던 그 시절에 긍정의 후회 한 줄 남기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왜 이별을 위한 사랑 한 소절 남기지 않았을까. 이성을 닮은 무분별한 열정 하나로 완벽해지지 못했을까. 시인으로 인해 하나의
후회가 또 다른 후회로 이어지는 오늘, 봄바람이 철없이 불고 시어처럼 물비늘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