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아직, 연애가 필요해
차현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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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특색 없고 밋밋한 시간들이 더디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 성긴 시간들 속으로 흐릿한 추억들이 언뜻언뜻 끼어들고, 지친 기색의 사람들이 무채색의 오후 일과를 습관처럼 펼쳐듭니다. 아침나절 맑았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우중충한 얼굴을 드러냈건만 사람들은 그저 심드렁한 표정으로 '관.심.없.음' 팻말을 공공연히 드러낸 채 그저 제 할 일에 빠져있었습니다. 기다림은 일상인 양 또 익숙합니다. 왠지 활력이 느껴지지 않는 목요일 오후. 차현진의 <내겐 아직, 연애가 필요해>를 읽으며 '아, 진작 연애나 할걸'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지금 내게 연애는 과연 어떤 느낌일까? 아주 오래전에 외웠던 수학 공식처럼 시시한 느낌인 것도 같고, 지난 봄에 피었던 산수유꽃처럼 흐릿한 색깔인 듯도 하고, 마치 오늘의 풍경처럼 시큰둥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목요일 오후의 나른함을 극복하기 위해 집어든 책이건만 과거를 향해 내달리는 생각을 어찌하지 못한 채 그저 하염없었습니다.

 

"우리가 그 시간 속,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난 우리가 만만해졌으면 좋겠어." 아, 담백해. 사귀자는 말을 이렇게 사소하게 건네던 그였다. 그 말 한마디가 내 평범한 시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 (p.21)

 

그녀는 자신이 만났던 8명의 남자에 대한 추억과 느낌을 책에 적었습니다. 그녀가 겪은 일종의 사랑 회고록이라고나 할까요. 뭐,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녀에겐 아직 남겨진 사랑이 있을 테니까요. 이 책에서 그녀는 자신이 만나 한때 사랑했던 남자들의 각기 다른 느낌과 지금 시점에서 바라보는 자신의 변화를 감각적인 문체로 쓰고 있습니다. 모두 이별한 사람들이고 그 이별의 기억들 하나하나가 버거울 텐데 그녀는 마치 자신이 들었던 다른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는 것인 양 그저 담담할 뿐입니다.

 

"이게 마지막이어도 좋다. 어쩌면 나는 이 3초의 포옹을 평생 가슴에 넣어두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그가 내 영혼을 가만히 어루만져주는 이 느낌을 끝까지 간직하고 살아가면 되니까. 그건 아무도 못 뺏어가는 거니까. 한걸음도 내딛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진, 앞으로 나가야만 한다." (p.177)

 

그녀의 사랑 이야기는(아니 이별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어쩜 그렇게 제각각 다를 수가 있을까요. 무명의 개그맨에서부터 식품회사의 젊은 CEO, 일본에서 활동하는 디젤 모델, 항공사의 부기장 등 직업도 다양하지만 그들과 함께 했던 사랑의 색조는 무지개처럼 다채로웠습니다. 그녀의 연애 경험은 젊었던 시절의 나와는 크게 달랐습니다. 나는 비슷비슷한 성격의 비슷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을 주로 만났던 듯합니다. 그런 까닭인지 나는 지금도 여자에 대해서는 별반 아는 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혹은 여자라면 다 이런 것을 좋아한다거나 저런 것은 싫어할 것이라고 뭉뚱그려 추측하기도 하지요. 말하자면 나는 오늘의 풍경처럼 밋밋하고 단조로운 사랑만 했었나 봅니다.

 

이따금 후회의 마음이 들지 않는 건 아닙니다. 그때 나는 왜 조금 더 적극적이지 못했을까, 연애의 시기는 인생에서 찰나의 시간처럼 짧다는 걸 왜 진작에 알지 못했을까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사랑도 연애도 인생의 소중한 경험이라는 걸 이제야 알 것 같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경험했던 이별의 모습은 사랑만큼이나 다양했습니다. 어쩌면 사랑의 순간은 세월에 따라 빛이 바래고 기억마저 희미해지는 것이지만 이별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고 오래도록 가슴 깊이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렇게 자신의 마음을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편할까? "나도 방금 니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그대로 말하고 싶었어. 그런데 난 그게 안 되는 사람이야.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가 말로 나오지 않아." 그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사이에 숨어 있는 수많은 계절, 그 쪼개진 틈에도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많은 단어를 가지고 있어서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 바로 그였다." (p.248)

 

인생이 의도하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지는 것처럼 사랑 또한 의도하지 않았던 시간에, 기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낯설게 다가오는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생경한 느낌에 가슴 설레고 마치 지구 밖의 지구 위에서 단 두 사람만 존재하는 듯 잠깐 넋이 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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