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가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이룩한 업적은 무수히 많지만(못 믿겠다는 듯 코웃음을 치시는 분이 더러 있군요. 어떻게 알았냐구요? 척 보면 다 앱니다. 아무튼 처음부터 그렇게 냉소적인 태도로 대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저는 오직 사실만을 말할 테니까요.) 그 중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큰 성과라고 한다면 대한민국 국민 전체를 정치인화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현 정부의 굵직굵직한 업적을 나열하자면 이렇습니다. 국가 재난 상황에서도 정부가 뒤로 물러나 아무일도 하지 않음으로써 국민들 스스로 각자도생을 꾀하게 하고 그것을 통하여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과 독립심을 고취시켰다는 점, 매년 청년 실업률을 높임으로써 청년 백수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고 직업이 없는 청년을 다소 비하하는 듯한 뉘앙스의 '청년 백수'라는 단어를 대신하여 취준생이나 공시생 등을 사용함으로써 언어 순화에 기여하였던 점, 자신의 출신 성분(금수저, 흙수저 등)에 따라 계급을 확고히 함으로써 온 국민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한 점, 어느 분야의 종사자라고 할지라도 이념에 따라 적과 동지를 구분할 수 있는 정치적 소양을 기르게 한 점 등 현 정부가 국민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한 업적은 이루 나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업적 가운데 정부는 그동안 이념적으로 중립을 지켰던 분야, 이를테면 의학이나 과학 등에서도 이념화를 꾸준히 추진하여 현재는 전 국민의 정치인화를 완성단계까지 끌어 올렸으며 이러한 결과는 전 세계의 민주 국가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죽하면 간단한 사망진단서 작성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자신의 이념을 드러냄으로써 대부분의 의사가 '외인사'라고 우겨도 홀로 꿋꿋이 '병사'라고 기재하는 의사가 나타났겠습니까. 대단하지요? 그뿐 아닙니다.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 함으로써 이제는 초등학생들조차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컨대 '5.16'을 군사정변으로 보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군사혁명으로 이해하는 학생도 있다는 것입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이런 성과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이었기에 현 정부의 업적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동안 등한시되던 스포츠분야에서도 이념화는 꾸준히 진행되어 낡고 중립적인 '국민체조'가 이념화 된'늘품체조'로 산뜻하게 변하였다는 걸 빼먹을 뻔했군요.

 

태풍 차바가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오늘, 정부는 역시 국민들의 독립심 고취를 위해 별 다른 일은 하지 않고 '피해를 입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라'는 당부만 반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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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10-05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 정부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업적을 남기는 능력을 발휘하는군요. 대단한 공무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꼼쥐 2016-10-07 11:53   좋아요 0 | URL
말하자면 그렇지요. ㅎ
답설무흔의 경지라고나 할까, 암튼 그렇습니다.

2016-10-05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07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베어지지 않는 나무
김만옥 지음 / 나남출판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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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운명은 누군가에게 단단히 발목을 잡힌 게로구나, 생각할 때가 왕왕 있다. 말하자면 무척이나 심심한 조물주가 나도 까맣게 모르던 어떤 미래를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툭 하고 내던져 놓고는 깔깔거리며 좋아라 하는 듯한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질 때면 나는 그만 망연한 생각에 넋을 놓게 된다. 그럴라치면 일의 앞뒤를 따져 볼 요량은커녕 자포자기의 심정이 먼저 들고 마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나는 이른 나이에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은 친구의 소식을 전화로 전해듣고는 어찌나 정신이 없고 황망하던지 '어째서?' 하는 물음보다는 '그렇구나!'하면서 주저앉아버렸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일은 더욱 빈번하게 벌어지고 그때마다 내 운명이 누군가에게 단단히 발목 잡혔다는 생각은 더욱 굳어져만 간다.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 단편소설이 좋아졌다. 장편소설과 달리 단편소설의 짧은 이야기들 중에는 평범하지 않은, 발목이 잡힌 운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사건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한때 재미있는 소설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들고 있고 싶어서 대하소설만 읽었던 적이 있었다. 장편소설이라고는 해도 단행본은 역시 막 재미있어지려는 찰나에 서둘러 끝이 나는 감이 없지 않아서 책을 덮고 나면 어찌나 아쉬움이 크던지 나는 처음부터 낱권이 아닌 여러 권으로 구성된 장편소설이나 대하소설만 골라 읽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무렵의 나에게 단편소설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 들어서는 장편소설이 오히려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아서 여러 권의 장편소설이나 대하소설에는 숫제 손이 가지 않는 것이다.

 

엊그제 읽었던 김만옥의 소설집 <베어지지 않는 나무> 역시 단편소설집이다. 김만옥이라는 작가를 진작 알고 읽어 왔더라면 지금쯤 조금 더 진중하고 알찬 리뷰를 쓸 수 있었겠지만 나는 사실 이 책을 통하여 김만옥이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1977년 마흔의 나이에 늦깎이 등단을 한 것이나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것이나 한국전쟁과 4·19혁명을 원체험으로 간직하며 작품활동을 한 것 역시 고 박완서 작가와 겹치지만 그녀의 글은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날 선 문체로 인해 독자의 마음을 깊게 도려내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준다.

 

"부모와 같이 살 때는 부모와의 충돌로 어느 정도 완화된 후에 내게 가해지던 폭력이 전혀 마모되지 않은 채 생으로 행사되었기 때문에 훨씬 그 강도가 높아졌고 빈도 또한 잦아졌다.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지옥 같은 공포로의 진입이 된 내막은 그랬다." (p.25 '회칼' 중에서)

 

199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까지 발표된 작품들을 모아 엮은 이 책에는 '회칼'을 비롯하여 '거적때기', '한 그루 나무', 이상한 작별과 해후', 따뜻한 포옹, '저 희미한 석양빛', '아버지의 작고 검은 손금고', '돌멩이 두 개' 등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그녀의 글에는 우리 사회의 암묵적인 묵인 속에서 일상인 양 빈번하던 가정 폭력의 실상이 낱낱이 그려지고 있다. 여자라는 이유로, 아내라는 이유로, 또는 딸이라는 이유로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으로 가해지던 폭력의 그늘. 대학 1학년 때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인해 여자의 몸으로 팬티 한 장만 입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아야만 했던 아픈 기억과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그 기억을 먼 이국땅에서 우연히 떠올리게 된다는 줄거리의 '나무 한 그루'는 가부장적 권위를 등에 업고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던 가정 폭력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때 왜 끝까지 거절하지 않고 아버지의 요구를 들어드렸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어요. 죽기 살기로 대항하면 어머니를 빼낼 수 없었겠어요? 발가벗는 것보다는 그쪽이 더 쉬웠을 텐데 말이에요." (p.87 '한 그루 나무' 중에서)

 

작가의 기억은 때로 6.25 전쟁과 4·19 혁명에서 머물다가 일제시대의 아득한 기억 속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쩌면 소설보다도 더 소설같았을 그녀의 경험들이 시간의 체에 걸러지고 마침내 남았던 커다란 기억의 알갱이들이 이 책에 씌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머릿속에 남는 아픈 기억이 있게 마련이고 가슴으로만 썼던 혈서 한 장을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내보일 때가 있을 테니까. 가슴에 품었던 그 혈서가 이 책을 읽는 누군가의 눈물 한 방울에 섞여 붉은 생명력으로 되살아나기를 작가는 간절한 마음으로 바랐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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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간들 - 제1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지월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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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말한다는 건 나와 관련된 대체불가의 누군가를 지금 내가 속한 이 사회로 영원히 호출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그 빈자리는 나의 시선에 의해 항상 비어 있거나, 비어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사회로부터 획득하게 된다. 적어도 내가 이 사회에 살아 있는 한은 말이다. 소설 속 '석희'도 그러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자신을 비롯하여 산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작가 최지월은 아주 세밀하게, 때로는 무덤덤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므로 소설 <상실의 시간들>은 작가의 경험인 동시에 그 속에 내재된 보편성의 반영인 것이다.

 

"모든 존재엔 역사가 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장소에서 이윽고 생겨나서 변화하고 소멸에 이르는 역사. 소멸한 듯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것으로부터 새로 시작되는 역사. 그러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과 시작되는 것에 관해." (p.82)

 

소설은 어머니의 49재에서 시작하여 100일 탈상에까지 이어지는데 그것이 끝은 아니다. '끝'에 이어서 '278일'이라는 소제목의 장이 나오고 신부전이 악화된 아버지가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리고 '304일'의 장은 이 소설의 마지막이자 진정한 '끝'일 수 있는데 작가는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끝'이 아니라 '계속'으로 적고 있다. '생(生)'과 '멸(滅)'의 보편적인 순환은 계속될 수밖에 없고 인류적 관점에서 '끝'이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남겨진 모든 부담, 말하자면 어머니의 죽음 이후 사회적 관계의 정리며, 평생을 군인으로 살면서 집안일이라곤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를 챙기는 일이며, 어머니를 기억하는 주변 이웃이며 친지를 응대하는 일 모두가, 결혼하여 호주에 정착한 언니 소희와 제약회사에 다니는 동생 은희를 대신하여, 오롯이 둘째인 석희에게 떨어진 몫이었다. 하여, 소설 속의 '나(석희)'는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상실의 시간들'을 아주 느린 발걸음으로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딛게 된다. 그것은 마치 준비된 흙 반죽에서 공기를 제거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꾹꾹 내딛는 도공의 발걸음과 흡사하다. 게다가 당뇨로 인한 신부전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돌보는 틈틈이 무시로 떠오르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덤처럼 주어진 벗어버릴 수 없는 짐이었다.

 

"정말 산 사람이 살아야 한다면, 죽음을 부정하고 삶을 욕망하는 걸론 부족하다. 죽음을 수용하고, 애도하고, 상실과 변화를 받아들여야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은 자연의 섭리 속에 태어나고, 사회의 질서 속에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한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몸이 마치면, 사회의 질서에 따라 그 정신을 쉬게 해야 한다. 나는 미래로 가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죽은 엄마를 죽여야 했다.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기분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돌이킬 수 없는 죄에 가담했다는 끔찍한 기분이 사라지질 않는다." (p.72)

 

20대에 엄마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43년을 살았던 아버지, 33년을 몸담은 직장에서 은퇴한 아버지는 이제 더이상 군인도 아니고, 가장의 역할도 끝이 났고, 아내마저 잃어 남편도 아니게 되었다. 소설 속의 '나'는 '엄마의 죽음은 아버지에게 닥쳐온 자신의 소멸, 죽음의 서장'이라고 인식한다. 애써 담담한 척 괜찮다고 말하는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나'는 서울에서 아버지가 사는 원주를 수시로 오가게 된다. 그것은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한층 느슨해진 관계의 틈을 메워야만 하는 산 자의 의무인지도 몰랐다.

 

언니와 동생 사이에서 누구의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치이면서 성장했던 '나(석희)'의 억울함은 엄마의 죽음 이후에도 고스란히 따라붙었다. 슬픔마저 독점하려 했던 동생 은희와 아내로서 43년을 봉사했던 어머니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치부하는 아버지의 태도, 화장을 하겠다는 가족의 의사를 무시한 채 죄인인 양 몰아붙이는 교회 사람들과 친척들. 한 사람의 부재로 인한 산 사람들간의 충돌이 '나(석희)'는 불편하다.

 

'나(석희)'는 엄마와 얽히고 설켰던 많은 일들이 스쳐지나간다. 공부를 잘 하고 재주가 많았던 학창시절 하며, 그럼에도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여 선생님을 비롯한 주변의 어른들과 자주 부딪혔던 일들이며. 집안 형편과 시대적 변화가 맞물려 원주에서 서울로 대학 진학을 했던 일들. 그런 와중에도 아버지의 존재는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방관자처럼 미미한 것이었다. 그랬던 아버지를 엄마가 죽고 난 후 '나(석희)는 100일 탈상까지만 아버지를 돌보겠노라 결심했던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도우미 아줌마를 부르고, 식기 세척기를 사 드리고, 반찬을 배달시키는 일은 순전히 혼자 남았을 때를 대비시키는 준비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언니(소희)와 동생 은희는 적적해 할 아버지 생각에 '내'가 아버지 곁에 있어줬으면 하는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삶을 지속한다는 건 끊임없이 낯설어지고, 새로워지고, 고독해지는 일이다. 형제도 자라서 타인이 되고, 타인이 만나서 가족이 되고, 그 가족은 다시 서로를 헤아리지 못하는 타인으로 변해 헤어진다. 만난 사람은 헤어진다. 40년이나 알아온 엄마와 나도 이제 헤어졌다. 이별만이 인생이다." (p.269)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산 사람들에겐 미처 적응하지 못한 새로운 삶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모든 게 어색하고 힘들다. 그러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다. 그러므로 상실의 시간이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새로운 삶을 강제하는 일인 동시에 그 삶에 적응하는 기간인 셈이다. 대학에 입학할 때처럼 예행연습이나 오리엔테이션이라도 있으면 좀 좋으랴. 최지월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에 그대로 옮겨놓은 듯 그 낯설고도 힘든 시간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예순다섯 해를 살고 떠났던 자신의 어머니를 훌훌 털어내려는 듯, 어머니가 없는 새로운 삶에 이제는 적응해야겠다 결심이라도 하려는 듯 시시콜콜한 기억들을 소설의 곳곳에 투영한다. 작가는 어쩌면 무디어가는 자신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이 한 편의 소설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잊혀짐은 언제나 훈련이 필요한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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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6-10-02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실에 따른 슬픔, 무거움, 죄책감,
그리움이 항상 일상에 배어있어요.
부모님의 마음은
부모가 되어 봐야 아는 것처럼
상실의 고통은
부모님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느끼는 고통인 것 같아요.
막연한 상상하곤 천지차이인듯 합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의 <인생수업>을 읽고
뜨거운 눈물을 흘려봐서 이 책을 읽을
용기가 나지 않네요ㅠ.ㅠ

꼼쥐 2016-10-04 17:27   좋아요 1 | URL
저도 엘리자베스 퀴블러의 <인생수업>을 제 손 가까운 곳에 두고 이따금 빼서 읽곤 합니다. 상실의 고통은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그 과정을 잘 극복하는 것도 스스로의 몫인 듯싶습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일고의 가치도 없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요? 거짓말 조금 보태면 최근 몇 년간 이 말을 뉴스나 다른 언론을 통해 일주일에 한 번씩은 듣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오죽하면 초등학교에 입학도 하지 않은 아이의 입에서 이 말이 툭툭 튀어나올라구요. 마치 오래전부터 늘 써왔던 말인 것처럼 억양마저 자연스럽게 말이지요.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 액자의 유리가 깨진 걸 보고 제 어미가 "이거 니가 깼지?" 물을 때에도 "일고의 가치도 없다!!", 어제 사서 넣어 둔 냉장고 속 음료수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바닥이 드러난 걸 보고 "이거 니가 다 먹었지?" 해도 "일고의 가치도 없다!!" 하며 정색을 합니다.

 

아이들은 대한민국의 가장 큰 어른인 대통령을 보며 자라는가 봅니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던 당시 대통령의 행적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을 때에도 "일고의 가치도 없다!!",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이 있었을 때 정모 씨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일고의 가치도 없다!!", 청와대 정무수석에 대한 각종 의혹 제기에도 "일고의 가치도 없다!!",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에 대한 의혹 제기에도 "일고의 가치도 없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 재단의 정권 개입 의혹에 대해서도 "일고의 가치도 없다!!" 라고 하는 대통령의 강한 발뺌의 말이 아이들은 마치 제 부모의 추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항변의 말인 양 시도 때도 없이 남발합니다.

 

이런 모습은 비단 국내에만 한정된 건 아닌 듯합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세계경제포럼(WEF)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서 크게 고무되었었나 봅니다. 해마다 발행하는 세계경쟁력보고서를 통해 국가별 부패지수를 발표했는데 우리가 몇 위인지 아십니까? 놀라지 마세요!! 우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무려 9위를 차지했습니다. 실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안타까운 것은 멕시코에게 1위 자리를 내주었다는 것이죠. 그렇지만 실망할 일은 아닙니다. 전 국민이 똘똘 뭉쳐 "일고의 가치도 없다!!"라는 말을 구호처럼 외치면 아마도 내년쯤에는 1위를 탈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우리가 경쟁해야 할 국가로는 멕시코 말고도 슬로바키아, 이탈리아, 헝가리, 그리스, 체코, 스페인, 라트비아 등이 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느낌이 들지요? 저도 더욱 분발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되는군요. 내년에 우리의 순위를 떨어트릴 가장 큰 장애요인은 아마도 '김영란법'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다 하더라도 전 국민이 모두 모여 한 목소리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라고 외치는 순간 크게 문제될 건 없다고 봅니다. 부정부패 세계 9위의 국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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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공감필법 공부의 시대
유시민 지음 / 창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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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하면 할수록,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오히려 공허한 마음만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머리에 든 게 많은 사람이나 든 게 없는 사람이나 죽고 나면 별 차이도 없는데, 하는 생각이 이따금 들면서 괜스레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저는 이허치허의 마음으로 독서를 하는 셈이지요. 한 권의 책을 읽음으로써 그만큼의 무의미를 더하는 격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허무를 통한 허무의 극복이라고는 하지만, 잠시 잠깐 책 속으로 시선을 돌림으로써 취기처럼 솟아나는 허무의 느낌을 무작정 유예하고만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렇게 책을 읽어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책을 읽어갈 것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습관처럼, 또는 지난 허무를 또 다른 허무로 덮으려는 심산으로.

 

유시민의 <공감필법>을 읽은 후 들었던 생각입니다. '창작과비평(창비)'이 50주년 특별기획으로 '공부의 시대'라는 강연을 개설하고, 강연자로 나섰던 다섯 명의 지식인(강만길, 김영란, 유시민, 정혜신, 진중권)의 강의록을 보완하여 책으로 낸 것들 중 하나인 이 책은 정치인에서 작가로 회귀한 작가 유시민의 생각을 조금쯤 엿볼 수 있게 합니다. 더불어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독자의 견해를 묻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지요.

 

"우리가 탐하고 갈망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객관적으로 의미있는 건 아닙니다. 돈, 지식, 권력, 명예, 다른 모든 것들도 내가 의미를 부여해야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자기 인생을 설계하고 의미있는 삶의 방법을 찾아간다는 것을 빼면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종과 다를 게 없어요. 저는 그렇게 믿으면서 오늘 하루의 삶에서 사피엔스의 일원인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을 챙겨보고 또다른 내일을 설계합니다. 우리가 서로 티격태격 싸우거나 죽일 듯 미워하는 이유가 대부분 지극히 사소한 문제라는 생각을 하면서요. 이렇게 세상과 사람과 인생을 대하는 관점과 태도가 조금 또는 크게 달라지는 순간을 체험할 때, 저는 공부가 참 좋다는 걸 실감합니다. 공부하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과 감정을 가질 수 없었을 테니까요." (p.30)

 

공부에 대한 생각이 저와는 크게 다르군요. 물론 대형서점에 가면 자신이 아는 지식이 참으로 보잘것없는 까닭에 '겸손하게 처신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건 제 생각과 비슷하지만 말입니다. 저자는 책에서 자신의 독서 경험과 글쓰기 경험을 말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데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코스모스'로 유명한 칼 쎄이건이 어린 시절 도서관에서 별에 관한 책을 읽은 후 느꼈던 감정을 저자 또한 짜릿한 느낌으로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는 대목이나 굴원의 '어부사'를 읽으며 세상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대목 등 독서가 우리에게 주는 효용이야 누구나 다 아는 것이겠습니다만 작가가 책에서 강조하는 바는 '감동', '감정이입', '감정' 등의 단어였습니다.

 

"먼저, 공부가 뭘까요? '인간과 사회와 생명과 우주를 이해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는 작업'입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공부의 개념이에요." (p.17)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아내와 저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놈도 모두 책을 좋아합니다. 성격은 서로 판이하게 다르지만 책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편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딱히 해야 할 일이 없는 여유시간에 뭘 할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지요. 우리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가벼운 마음으로 가까운 대형서점을 찾곤 합니다. 그곳에서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꺼내 읽다가 속이 출출해질 때쯤이면 근처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귀가를 합니다. 가성비 또한 만점입니다. 누구 한 사람 불만이 없지요. 우리 셋 중 책을 가장 좋아하는 아들놈이 밥을 먹으로 가자고 했을 때 보던 책을 마저 읽고 싶어 이따금 심통을 부리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논하고자 했던 몇 가지 테마, 이를테면 정체성, 감정, 공감, 태도, 격려, 어휘 등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읽어었던 책 중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칼 쎄이건의 <코스모스>, 신영복의 <담론>, 굴원의 <어부사>, <맹자>, 소스타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등을 들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는 강연의 뒤에 있었던 질의 응답 시간에 더 많은 책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테마에서는 대략 그런 책들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책은 그렇다쳐도 저자가 말하는 글쓰기 원칙은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첫째, 많은 독자가 관심을 가진 주제를 선택한다. 둘째, 전문지식이 없는 독자가 다른 정보를 찾지 않고도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쓴다. 셋째,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것보다는 정서적 공감을 일으키는 데 초점을 둔다. 넷째, 문장을 되도록 쉽고 간결하게 쓴다." (p.139)

 

개천절 연휴가 이어지는 이번 주말엔 비가 예보되었더군요. 딱히 할 일일 없으면 또 대형서점의 한 귀퉁이에 앉아 책을 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척이나 따분한 듯하지요? 생각해보니 저도 블로그에 글이랍시고 끄적거리기 시작한 지 꽤나 오래된 듯합니다. '도대체 뭘 하려고 이 짓을 하나?' 하는 회의감이 들 때도 많지만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런 회의감과, 쉼없이 떠오르는 허무의 느낌과 그 모든 감정을 이겨내기 위한 도구로서의 기능 때문에 글을 쓰지 않나 싶습니다. 말하자면 글쓰기는 제 자신을 갈고 닦는 수행의 한 방법인 셈이지요. 연휴를 앞둔 금요일 저녁에 읽기에는 조금 따분한 책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연휴 잘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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