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말한다는 건 나와 관련된 대체불가의 누군가를 지금 내가 속한 이 사회로 영원히 호출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그
빈자리는 나의 시선에 의해 항상 비어 있거나, 비어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사회로부터 획득하게 된다. 적어도 내가 이 사회에 살아 있는 한은
말이다. 소설 속 '석희'도 그러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자신을 비롯하여 산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작가 최지월은 아주
세밀하게, 때로는 무덤덤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므로 소설 <상실의 시간들>은 작가의 경험인 동시에 그 속에 내재된 보편성의 반영인
것이다.
"모든 존재엔 역사가 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장소에서 이윽고 생겨나서 변화하고 소멸에 이르는
역사. 소멸한 듯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것으로부터 새로 시작되는 역사. 그러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과 시작되는
것에 관해." (p.82)
소설은 어머니의 49재에서 시작하여 100일 탈상에까지 이어지는데 그것이 끝은 아니다. '끝'에 이어서 '278일'이라는 소제목의 장이
나오고 신부전이 악화된 아버지가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리고 '304일'의 장은 이 소설의 마지막이자 진정한 '끝'일 수
있는데 작가는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끝'이 아니라 '계속'으로 적고 있다. '생(生)'과 '멸(滅)'의 보편적인 순환은 계속될
수밖에 없고 인류적 관점에서 '끝'이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남겨진 모든 부담, 말하자면 어머니의 죽음 이후 사회적 관계의 정리며, 평생을 군인으로 살면서 집안일이라곤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를 챙기는 일이며, 어머니를 기억하는 주변 이웃이며 친지를 응대하는 일 모두가, 결혼하여 호주에 정착한 언니 소희와 제약회사에
다니는 동생 은희를 대신하여, 오롯이 둘째인 석희에게 떨어진 몫이었다. 하여, 소설 속의 '나(석희)'는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상실의
시간들'을 아주 느린 발걸음으로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딛게 된다. 그것은 마치 준비된 흙 반죽에서 공기를 제거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꾹꾹
내딛는 도공의 발걸음과 흡사하다. 게다가 당뇨로 인한 신부전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돌보는 틈틈이 무시로 떠오르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덤처럼 주어진 벗어버릴 수 없는 짐이었다.
"정말 산 사람이 살아야 한다면, 죽음을 부정하고 삶을 욕망하는 걸론 부족하다. 죽음을 수용하고,
애도하고, 상실과 변화를 받아들여야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은 자연의 섭리 속에 태어나고, 사회의 질서 속에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한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몸이 마치면, 사회의 질서에 따라 그 정신을 쉬게 해야 한다. 나는 미래로 가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죽은 엄마를 죽여야
했다.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기분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돌이킬 수 없는 죄에 가담했다는 끔찍한 기분이 사라지질 않는다."
(p.72)
20대에 엄마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43년을 살았던 아버지, 33년을 몸담은 직장에서 은퇴한 아버지는 이제 더이상 군인도 아니고,
가장의 역할도 끝이 났고, 아내마저 잃어 남편도 아니게 되었다. 소설 속의 '나'는 '엄마의 죽음은 아버지에게 닥쳐온 자신의 소멸, 죽음의
서장'이라고 인식한다. 애써 담담한 척 괜찮다고 말하는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나'는 서울에서 아버지가 사는 원주를 수시로 오가게 된다. 그것은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한층 느슨해진 관계의 틈을 메워야만 하는 산 자의 의무인지도 몰랐다.
언니와 동생 사이에서 누구의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치이면서 성장했던 '나(석희)'의 억울함은 엄마의 죽음 이후에도 고스란히 따라붙었다.
슬픔마저 독점하려 했던 동생 은희와 아내로서 43년을 봉사했던 어머니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치부하는 아버지의 태도, 화장을 하겠다는
가족의 의사를 무시한 채 죄인인 양 몰아붙이는 교회 사람들과 친척들. 한 사람의 부재로 인한 산 사람들간의 충돌이 '나(석희)'는
불편하다.
'나(석희)'는 엄마와 얽히고 설켰던 많은 일들이 스쳐지나간다. 공부를 잘 하고 재주가 많았던 학창시절 하며, 그럼에도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여 선생님을 비롯한 주변의 어른들과 자주 부딪혔던 일들이며. 집안 형편과 시대적 변화가 맞물려 원주에서 서울로 대학 진학을 했던 일들.
그런 와중에도 아버지의 존재는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방관자처럼 미미한 것이었다. 그랬던 아버지를 엄마가 죽고 난 후 '나(석희)는 100일
탈상까지만 아버지를 돌보겠노라 결심했던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도우미 아줌마를 부르고, 식기 세척기를 사 드리고, 반찬을 배달시키는 일은
순전히 혼자 남았을 때를 대비시키는 준비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언니(소희)와 동생 은희는 적적해 할 아버지 생각에 '내'가 아버지 곁에
있어줬으면 하는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삶을 지속한다는 건 끊임없이 낯설어지고, 새로워지고, 고독해지는 일이다. 형제도 자라서 타인이 되고,
타인이 만나서 가족이 되고, 그 가족은 다시 서로를 헤아리지 못하는 타인으로 변해 헤어진다. 만난 사람은 헤어진다. 40년이나 알아온 엄마와
나도 이제 헤어졌다. 이별만이 인생이다." (p.269)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산 사람들에겐 미처 적응하지 못한 새로운 삶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모든 게 어색하고 힘들다. 그러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다. 그러므로 상실의 시간이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새로운 삶을 강제하는 일인 동시에 그 삶에 적응하는
기간인 셈이다. 대학에 입학할 때처럼 예행연습이나 오리엔테이션이라도 있으면 좀 좋으랴. 최지월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에 그대로 옮겨놓은 듯
그 낯설고도 힘든 시간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예순다섯 해를 살고 떠났던 자신의 어머니를 훌훌 털어내려는 듯, 어머니가 없는 새로운
삶에 이제는 적응해야겠다 결심이라도 하려는 듯 시시콜콜한 기억들을 소설의 곳곳에 투영한다. 작가는 어쩌면 무디어가는 자신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이 한 편의 소설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잊혀짐은 언제나 훈련이 필요한 까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