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난'이라는 매우 엄격한 스승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든 그곳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도 마치 때가 되면 사라지는 우리의 삶처럼 결국에는 아무리 혹독한 '가난'도 지나가게 되어 있다. 삶을 유지하면서든 그렇지 않든, 아무튼. 분명한 것은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설혹 잃는 게 있다 치더라도 또한 많은 것을 배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뼘쯤 더 성장하게 된다. 그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내가 만났던 '김영수(가명)' 할아버지는 근엄한 외모와는 달리 말이 많은(?) 분이었다.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공부를 하고, 취업을 하여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다가 오륙 년 전쯤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하셨다. 나와 만났을 당시 할아버지는 허리가 불편하여 복대를 착용하고 계셨다. 물려받은 재산도 없고, 남들보다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어서 젊은 시절에는 안 해본 것 없이 별별 직업을 전전하며 고생도 숱하게 했다고 하셨다. 슬하에 21녀를 두었는데 장성하여 다 일가를 이루고 잘 살고 있으니 자식 걱정은 한시름 놓았다며 웃으셨다. 지금은 노인이 된 두 분은 시골에서 가족들이 먹을 농사만 짓고 있지만 귀향한 주변 이웃들 중에는 대규모 경작을 하면서 자금과 기술력을 갖춘 대규모 기업농도 있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지금은 잘 만하면 농사도 할 만한 직업이 되었다며 나도 더 나이가 들면 농촌에서 사는 것도 생각해보라며 귀향을 적극 권하기도 하셨다.

 

불가능처럼 보였던 공수처법이 너무도 쉽게 통과되어버린 오늘,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듯한 농민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검찰도 공수처법과 함께 유순한 심성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검사로 근무하는 나의 친구는 검사가 마치 3D 업종인 양 말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사법고시를 통과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검사를 1순위로 선택하는 데는 뭔가 혜택이 있다는 것인데 공수처법이 통과되면 그게 사라지게 된다고 말했다. 그것이 돈인지, 권력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공수처가 탄생하는 내년에 선발되는 검사는 그들이 지금껏 바라마지 않았던 혜택보다는 국가에 대한 충성과 정의를 세우려는, 온 국민이 바라는 그 가치를 세움으로써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자들로 채워질 것인지... 어쩌면 우리는 그런 정의로운 검사들을 처음으로 맞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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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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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느낌이 생각보다 오래 이어지고 있다. 세기말, 아니 연말 분위기 탓인지도 모른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게 그저 형식상의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지만 사람의 기분이란 게 어디 그런가. 나도 모르게 왠지 센티해지고 이렇다 하게 슬퍼할 만한 일이 딱히 없어도 한없이 가라앉는 것이다. 이러다가는 우울의 늪에 깊이 가라앉아 결국에는 익사하고 말 것이라는 공포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도 이따금 들고 종잡을 수 없는 기분이 하루에도 몇 번씩 극과 극으로 치닫다 보니 하루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여러 번 경험하는 느낌이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있었던 송년 모임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졌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빅 엔젤 데 라 크루스는 시간을 엄수하기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다. 같은 직장에 다니는 미국인들은 그를 가리켜 '독일인'이라고 부르곤 했다. 참 웃긴 일이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멕시코인이라고 해서 시간을 안 지킬 거라고 생각하다니. 비센테 폭스가 일처리를 제때 하지 못한 적이 았냔 말이다." (p.16)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가 쓴 <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을 손에 잡았던 건 꽤나 오래 전의 일이다. 우울한 기분을 달래기에는 딱이다 싶었던 책이었지만 한달음에 후루룩 다 읽어버린 책의 리뷰를 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일, 내일 하고 미루었던 게 그만 해를 넘기게 생겼다. 정신이 번쩍 들어 컴퓨터 앞에 앉기는 하였지만 내용이 가물가물하고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이런 젠장, 이러다가는 정말 해를 넘기겠는 걸, 하는 생각에 아침부터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각자의 주장이 강하고 개성이 넘치는 데 라 크루스 가문의 존경받는 가장이자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미겔 엔젤은 올해로 일흔 번째 생일을 맞는다. 어찌 보면 성격이 까칠하고 엄격한 그이지만 가족들에 대한 애정만큼은 누구보다도 크고 강하여 가족들은 그를 '빅 엔젤'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건강만큼은 늘 자신했던 그이지만 의사로부터 들었던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으로 인해 그의 신념과 인생 계획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그가 암에 걸렸으며, 남은 시간도 한 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입술 위에 닿는 이불의 가장자리 느낌이 좋았다. 몸을 모두 다 덮은 느낌은 빡빡하니 안전하게 느껴졌다. 동이 트기 전의 새벽녘이 제일 좋았다. 그때는 죽어가고 있다는 게 생각나지 않으니까. 잠시 그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과거를 음미했다. 오늘, 그 과거의 맛은 스카치 캔디 맛이었다." (p.259)

 

빅 엔젤은 자신의 마지막 생일을 아주 성대하게 치르기로 마음먹고 미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가족들을 불러 모은다. 그러나 생일 파티를 일주일 남기고 100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식과 생일 파티에 모두 참석하려면 두 번이나 먼 길을 오가야 하는 까닭에 빅 엔젤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일주일 미뤄 자신의 생일 파티와 함께 할 수 있도록 일정을 조정한다. 빅 엔젤의 마지막 생일이자 마지막 주말이 되는 바로 그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이미 해가 중천인데 가족들은 아직도 세상 모른 채 자고 있는 게 아닌가.

 

"빅 엔젤은 어머니의 장례식에 지각했다. 그는 침대에서 고개를 벌떡 쳐들었다. 발에 침대 시트가 이리저리 감긴 채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깨닫자 옆구리에서 땀이 송송 솟았다. 해가 중천이었다.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로 빛이 환했다. 온 세상이 분홍빛으로 타오르고 있다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먼저 가 있을 것이다. 안 돼. 이러지 마. 오늘은 안 된다고. 그는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p.9)

 

소설의 주인공인 빅 엔젤의 마지막 생일 파티를 기점으로 가족 구성원에 대한 빅 엔젤의 기억과 회상에 의해 데 라 크루스 가문의 역사가 재구성되는 이 소설은 만만찮은 볼륨과 많은 등장인물로 인해, 혹은 멕시코라는 다소 낯선 공간과 그곳 사람들의 생경한 문화와 어색한 이름으로 인해 읽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삶과 죽음을 한 자리에 놓고 즐기려는 작가의 의도는 독자들에게 충분히 전달되고 있다.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며 삶 역시 영원하지 않다는 걸 작가는 심각한 언어로 말하지 않고 데 라 크루스 가문 구성원의 개성 넘치는 유머와 재치,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남미 특유의 정서를 잘 버무려 독자에게 전달하는 까닭에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부담감 없이 즐기게 된다.

 

"빅 엔젤은 죽음이라는 무도의 슬픈 스텝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제 말을 하는 것도 상당한 노력이 들었다. 죽는다는 건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하는 게 힘들어진다. 누가 옆에 있는지 잊게 된다. 갑자기 분노가 차오르고 화가 치밀어 올라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성스럽게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토록 약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그러다 갑자기 기분이 좀 좋아지면서 어리석게도 곧 기적이 일어나서 나을 거라고 믿게 되기도 한다. , 누군가를 몰아붙이는 게 따지고 보면 그리 더럽고 썩어빠진 짓은 아니군." (p.412)

 

동양인의 정서 상 가족의 죽음을 가볍고 유쾌하게 받아들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소설 속 등장인물들도 속으로는 빅 엔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겉으로 내색을 하고 있지 않을 뿐이지만 어쩌면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의 죽음이나 질병으로 인해 서로 등 돌리고 반목하던 가족이 다시 화합할 수 있다면 그것은 또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삶과 죽음의 길이 예 있으매 두려워 나는 가노란 말도 못 다 이르고 갔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서 가는 곳 모르겠구나. , 극락에서 만날 너 도 닦으며 기다리련다.'라고 노래했던 월명 스님의 제망매가(祭亡妹歌)가 떠오른다. 출가한 몸으로 세속의 인연에 연연하는 건 불도에 어긋날지도 모르지만, 죽은 누이를 그리는 아름다운 인간애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뭉클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언젠가 나는 <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을 떠올리며 월명 스님의 절절한 우애를 가슴에 새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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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지시등도 켜지 않은 채 마치 내 차를 스치듯 무섭게 추월했던 차가 얼마 가지도 않아 사고로 멈춰 선 모습을 볼라치면 나도 모르게 속으로는 은근히 '쌤통이다' 하는 마음이 절로 들게 마련이지만 부서진 자신의 차를 궁상맞게 지켜보고 있는 사고 차량 운전자의 모습에 '저 사람도 참 재수가 없구나. 얼마나 황당할까?' 하면서 혀를 끌끌 차게 된다. 인생도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나에게 사사건건 못되게 굴었던 사람을 어느 날 우연히 만났을 때, 처음에는 '너 그렇게 될 줄 알았다.' 하고 고소해하다가도 뒤돌아 서서 생각해보면 '저 사람 인생도 참 안 됐지 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은근히 서글퍼지기도 하고 말이다.

 

전에 만났던 어느 할머니 한 분은 지난해에 폐암으로 남편을 잃고 홀로 되신 분이었는데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그렇게 미웠었는데 죽고 나니 가끔 보고 싶다고 하시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다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의식했던지 뒤돌아서서 흐르는 눈물을 서둘러 닦으시면서 "주책이야. 장례식장에서도 울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눈물을..." 하는 게 아닌가. 할머니는 의미도 없는 혼잣말로 민망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한 것이었지만 나는 왠지 숙연한 느낌에 고개가 숙여졌다. "폐암은 마지막이 힘들다고 하던데 힘들어하시지는 않았어요?" 내가 여쭈었더니, "목에 구멍을 뚫어서 힘들어하지는 않았어. 그런데 그렇게 더 살고 싶어 하드만. 담배를 끊으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할 때는 들은 척도 않더니." 할머니는 여전히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미련과 그리움을 거두지 못하고 계셨다.

   

크고 작은 슬픔의 마디마다

글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세월의 선반마다 켜켜이 쌓이는 먼지처럼

삶의 기억은 그렇게 쌓여만 가는 거라고

그러다 어느 순간 먼지처럼 흩어지는 거라고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것들과

도무지 무뎌지지 않는 아픈 기억들을 안고

한 세상 허위허위 살다 보면

나 때문에 아파할 다른 누군가를 곧 만나게 될지니

삶은 그렇게 대를 이어 슬픔을 상속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것인가.

 

그야말로 다사다난하기만 했던 2019년도 저물고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미움과 증오를 쏟아내며 입에 담지 못할 온갖 막말을 오히려 종교인을 통하여 들어야만 했던 한 해. 지옥이 있다면 종교인들이 제일 먼저 지옥 입장권을 들고 선착순 입장을 하였을 듯한 모습들. 꼭 해야 할 말도 절반쯤 덜어내어 누구보다 말을 아껴야 할 종교인들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배로 부풀려서 떠벌리는 세상. 그들로 인해 우리는 어쩌면 세상의 종말을 향해 한 발 더 다가서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2019년의 길고 길었던 시간들이 먼지처럼 흩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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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말들 -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은유 지음 / 어크로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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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신변잡기나 독서 후기를 엮어 책으로 만드는 일은 마치 내가 어렸을 때 하루하루 그림일기를 쓰던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 그만큼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야 하고 아무리 재능이 출중한 사람일지라도 단 며칠 새에 후루룩 뚝딱 지어낼 수는 없다는 것.  방학숙제로 내준 그림일기를 단 며칠 만에 다 쓰려면 날씨도 내용도 다 거짓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신변잡기를 바탕으로 한 에세이나 독서 후기 형식의 글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필요한 만큼의 시간이 축적되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어느 누구에게도 감동을 줄 수 없는 거짓의 글이 되고 만다는 것.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은유 작가의 글을 따습게 읽었다. 말하자면 책 속에 축적된 작가의 시간을 감사히 여기면서.

 

"계절이 두 번 바뀌고서야 구의역 참사 현장에 가 보았다. 노란 포스트잇 흐드러졌던 승강장은 꽃잎이 진 잿빛 풍경이다. 고인이 '끼인' 9-4 승강장을 시간에 '쫓긴' 이들이 오늘도 바삐 통과한다. 일할수록 닦달당하고 마모되면서 가난해지는데 너도 가고 나도 간다. 아들도 가고 엄마도 간다. 때가 되면 군인 엄마의 옷은 벗어도 재난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불안의 옷은 벗지 못할 것임을 나는 안다." (p.152)

 

 

은유 작가의 책을 읽는 건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작가의 이름도 알지 못했던 대부분의 독자들이 <글쓰기의 최전선>이라는 다소 생소한 제목의 책이 입소문으로 알음알음 알려졌던 게 서너 해 전의 일이고 보면 내가 다른 작가의 글에, 혹은 내가 하고 있는 다른 일에 온전히 마음을 뺏길 만한 충분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는 여전히 작가의 글이 반가운 걸 보면 은유 작가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이라는 걸 알 수 있겠다. 글을 잘 쓰는 작가는 많지만 온 마음으로 글을 쓰는 작가는 드문 시대에 사는 까닭에 나처럼 작가에 대한 호불호가 명확하지 않은 사람도, 좋은 독자의 범주에는 처음부터 들지 못했던 어설픈 독자인 나에게도 은유 작가의 글은 이처럼 쉽게 읽히는 걸 보면 작가가 부제에서 밝혔던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이 책 속에 빼곡히 들어 있었던 모양, 그게 반가웠던 것이다.

 

"우리 엄마도 아픈 자식 얘기를 어디서든 후련하게 할 수 있었으면 울화가 풀렸을까. 조금 더 오래 살았을까. 동준 군 어머니 말씀에서 엄마가 감내한 외로움의 크기를 짐작한다. 피붙이인 나도 감정노동을 거부했다. 나 역시 인생 최대의 난국을 보내는 중이어서 같이 무너질까 봐 엄마를 더 피했다. 만약 어느 자리에서든 엄마가 위축되지 않고 괜찮은 척도 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슬픔을 떠들었다면, 듣는 사람들이 동정이나 입막음이 아닌 토닥이는 눈길로 들어주었다면 적어도 "자신의 존재가 통째로 세상에서 삭제되는 '시선의 차별'"을 겪진 않았을 것 같다." (p.190)

 

할 말이 많아진다는 건, 역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시간도 넉넉하게 주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누가 억압하지 않더라도 나의 말을 들어줄 누군가가 옆에 있지 않았을 수도 있고,  차마 다 말할 수 없는 슬픔이 혀뿌리까지 치밀어 올라왔을 수도 있고, 억제할 수 없는 분노와 화가 나의 눈과 귀를 막고 급기야 손발이 덜덜 떨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을 수도 있는 까닭에 글을 쓰는 일이 본업인 작가일지라도 글은 오래도록 정리되지 않고 오직 가슴에서만 맴을 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의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쏟아질 수도 있는 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고 보면 작가와 나는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비록 각자가 하는 일은 달라도 말이다.

 

 

"내 슬픔의 계보를 따져본다. 슬픔의 첫 습격은 5·18 민주화운동이다. 자료 사진을 보고 책을 읽고 망월동 묘역에 다녀오면서 소위 세상에 눈떴다. 당시 구 묘역의 황량한 무덤가에 놓인 영정 사진에 눈 맞추고 유가족이 써놓고 간 편지를 일일이 다 읽었다. 충격이 컸다. 그때부터 5월 광주를, 억울한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 애썼다. 0158 숫자를 암호 삼아 세상을 읽고 슬픔을 동력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p.204)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각 부의 제목만 들어도 작가의 마음을 알 수 있을 듯하다. 1부 '나를 천천히 들여다보면', 2부 '당신의 삶에 밑줄을 긋다가', 3부 '우리라는 느낌이 그리울 무렵', 4부 '낯선 세계와 마주했을 때', 5부 '주위를 조금 세심히 돌아보면'이 그것이다.  총 300쪽이 넘는 이 책을 나는 따뜻함 한 쪽, 따뜻함 두 쪽... 이런 식으로 각각의 페이지를 살뜰히 세며 줄어드는 쪽 수에 조금은 아쉬운 마음을 곁들여 읽어나갔다. 어쩌면 우리가 책을 읽는다는 건 한 발짝, 두 발짝 작가의 마음을 향해 다가가는 행위나 진배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글은 정자세로 앉아 시간을 바치지 않으면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목뒤부터 어깨를 타고 손끝까지 흐르는 저림을 겪으며 문장의 길을 터나가야 한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을 수 없는 직업이지만 그 미련스러움 때문에 내 일이 좋다. 새해를 맞아 순정하게 다짐해본다. "두부 장수가 두부를 만들듯이 성실하게 규칙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써나가고 싶습니다."" (p.320)

 

겨울은 말과 글이 익어가는 계절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추위와 미세먼지로 인해 밖으로 싸돌아다닐 수 없으니 느는 건 독서와 사색의 시간뿐이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공기도 탁하고 을씨년스러운 날씨에도 밖으로 밖으로만 싸돌아다니는 족속이 있게 마련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은유 작가의 글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채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렇게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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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국의 시골이란 시골을 다 돌다 보면 정말 보기 힘든 게 어린아이인 듯합니다. 사실 어린아이는 고사하고 젊은 사람도 보기 힘든 게 현실이지요. 마을에서 젊은이 축에 끼이는 사람이 대개 50, 어느 마을에서는 70대가 젊은이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건 할아버지보다 할머니 혼자 사시는 집이 열에 일곱 여덟은 된다는 사실입니다. 언제 어느 때 어떤 변고가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현실이지요.

 

얼마 전 내가 들렀던 어느 집에서는 할아버지 한 분이 툇마루에 앉아 햇볕을 쪼이고 있었습니다. "추운데 왜 나와 계세요?" 하고 내가 여쭙자, "햇살이 좋아서." 하는 답변이 돌아왔죠. 군데군데 검버섯이 핀 얼굴, 쪼글쪼글한 주름살,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듯한 움직임 등 한눈에 봐도 적지 않은 연세임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커피 한 잔 타 줄까?" 하시기에 ", 주세요." 하며 웃었더니 방으로 들어가셨던 할아버지는 한참이 지나서야 나오셨습니다. 뜨거울까 봐 종이컵 두 개를 겹쳐서 가져오셨기에 밖의 컵을 빼서 드리려 하자 뜨겁다며 그냥 마시라고 손사래를 치셨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커피의 양이었습니다. 종이컵에 가득 차 넘칠 듯 찰랑거렸습니다. "양이 많지? 날이 차서 금방 식을까 봐 커피 믹스 두 개를 탔어. 다 못 마시겠으면 적당히 마시고 버려." 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따뜻한 마음씨에 왈칵 눈물이 솟을 뻔했습니다. 물론 나는 할아버지의 커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지만 말입니다.

 

할아버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길게도 나누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현실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추세를 짚으시면서 그런 현실이 오히려 다행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다만 젊은이가 부족한 게 문제라면서 똑똑하고 성실한 젊은 인재를 외국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도 하셨죠. 한민족이니, 단일민족이니 운운하는 건 오만함의 극치라는 말씀도...

 

"살아온 날들이 마치 꿈만 같아." 하시는 말씀을 끝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석양빛을 따라 할아버지의 시선은 아스라이 멀어졌습니다. 우리는 결코 간단하지 않은 하루를 아주 가볍게 통과한 듯 생각하지만 그것은 마치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는 사실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나 깨닫게 되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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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12-24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님, 2019년 서재의 달인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꼼쥐 2019-12-27 11: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답글이 너무 늦었죠? 제가 이렇게 무심해서... 이따금 알라딘에 접속할 때마다 알라딘 서재 인기글에 올라온 서니데이 님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저야말로 서니데이 님이 좋은 이웃으로 남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