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말들 -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은유 지음 / 어크로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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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신변잡기나 독서 후기를 엮어 책으로 만드는 일은 마치 내가 어렸을 때 하루하루 그림일기를 쓰던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 그만큼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야 하고 아무리 재능이 출중한 사람일지라도 단 며칠 새에 후루룩 뚝딱 지어낼 수는 없다는 것.  방학숙제로 내준 그림일기를 단 며칠 만에 다 쓰려면 날씨도 내용도 다 거짓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신변잡기를 바탕으로 한 에세이나 독서 후기 형식의 글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필요한 만큼의 시간이 축적되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어느 누구에게도 감동을 줄 수 없는 거짓의 글이 되고 만다는 것.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은유 작가의 글을 따습게 읽었다. 말하자면 책 속에 축적된 작가의 시간을 감사히 여기면서.

 

"계절이 두 번 바뀌고서야 구의역 참사 현장에 가 보았다. 노란 포스트잇 흐드러졌던 승강장은 꽃잎이 진 잿빛 풍경이다. 고인이 '끼인' 9-4 승강장을 시간에 '쫓긴' 이들이 오늘도 바삐 통과한다. 일할수록 닦달당하고 마모되면서 가난해지는데 너도 가고 나도 간다. 아들도 가고 엄마도 간다. 때가 되면 군인 엄마의 옷은 벗어도 재난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불안의 옷은 벗지 못할 것임을 나는 안다." (p.152)

 

 

은유 작가의 책을 읽는 건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작가의 이름도 알지 못했던 대부분의 독자들이 <글쓰기의 최전선>이라는 다소 생소한 제목의 책이 입소문으로 알음알음 알려졌던 게 서너 해 전의 일이고 보면 내가 다른 작가의 글에, 혹은 내가 하고 있는 다른 일에 온전히 마음을 뺏길 만한 충분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는 여전히 작가의 글이 반가운 걸 보면 은유 작가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이라는 걸 알 수 있겠다. 글을 잘 쓰는 작가는 많지만 온 마음으로 글을 쓰는 작가는 드문 시대에 사는 까닭에 나처럼 작가에 대한 호불호가 명확하지 않은 사람도, 좋은 독자의 범주에는 처음부터 들지 못했던 어설픈 독자인 나에게도 은유 작가의 글은 이처럼 쉽게 읽히는 걸 보면 작가가 부제에서 밝혔던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이 책 속에 빼곡히 들어 있었던 모양, 그게 반가웠던 것이다.

 

"우리 엄마도 아픈 자식 얘기를 어디서든 후련하게 할 수 있었으면 울화가 풀렸을까. 조금 더 오래 살았을까. 동준 군 어머니 말씀에서 엄마가 감내한 외로움의 크기를 짐작한다. 피붙이인 나도 감정노동을 거부했다. 나 역시 인생 최대의 난국을 보내는 중이어서 같이 무너질까 봐 엄마를 더 피했다. 만약 어느 자리에서든 엄마가 위축되지 않고 괜찮은 척도 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슬픔을 떠들었다면, 듣는 사람들이 동정이나 입막음이 아닌 토닥이는 눈길로 들어주었다면 적어도 "자신의 존재가 통째로 세상에서 삭제되는 '시선의 차별'"을 겪진 않았을 것 같다." (p.190)

 

할 말이 많아진다는 건, 역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시간도 넉넉하게 주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누가 억압하지 않더라도 나의 말을 들어줄 누군가가 옆에 있지 않았을 수도 있고,  차마 다 말할 수 없는 슬픔이 혀뿌리까지 치밀어 올라왔을 수도 있고, 억제할 수 없는 분노와 화가 나의 눈과 귀를 막고 급기야 손발이 덜덜 떨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을 수도 있는 까닭에 글을 쓰는 일이 본업인 작가일지라도 글은 오래도록 정리되지 않고 오직 가슴에서만 맴을 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의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쏟아질 수도 있는 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고 보면 작가와 나는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비록 각자가 하는 일은 달라도 말이다.

 

 

"내 슬픔의 계보를 따져본다. 슬픔의 첫 습격은 5·18 민주화운동이다. 자료 사진을 보고 책을 읽고 망월동 묘역에 다녀오면서 소위 세상에 눈떴다. 당시 구 묘역의 황량한 무덤가에 놓인 영정 사진에 눈 맞추고 유가족이 써놓고 간 편지를 일일이 다 읽었다. 충격이 컸다. 그때부터 5월 광주를, 억울한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 애썼다. 0158 숫자를 암호 삼아 세상을 읽고 슬픔을 동력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p.204)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각 부의 제목만 들어도 작가의 마음을 알 수 있을 듯하다. 1부 '나를 천천히 들여다보면', 2부 '당신의 삶에 밑줄을 긋다가', 3부 '우리라는 느낌이 그리울 무렵', 4부 '낯선 세계와 마주했을 때', 5부 '주위를 조금 세심히 돌아보면'이 그것이다.  총 300쪽이 넘는 이 책을 나는 따뜻함 한 쪽, 따뜻함 두 쪽... 이런 식으로 각각의 페이지를 살뜰히 세며 줄어드는 쪽 수에 조금은 아쉬운 마음을 곁들여 읽어나갔다. 어쩌면 우리가 책을 읽는다는 건 한 발짝, 두 발짝 작가의 마음을 향해 다가가는 행위나 진배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글은 정자세로 앉아 시간을 바치지 않으면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목뒤부터 어깨를 타고 손끝까지 흐르는 저림을 겪으며 문장의 길을 터나가야 한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을 수 없는 직업이지만 그 미련스러움 때문에 내 일이 좋다. 새해를 맞아 순정하게 다짐해본다. "두부 장수가 두부를 만들듯이 성실하게 규칙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써나가고 싶습니다."" (p.320)

 

겨울은 말과 글이 익어가는 계절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추위와 미세먼지로 인해 밖으로 싸돌아다닐 수 없으니 느는 건 독서와 사색의 시간뿐이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공기도 탁하고 을씨년스러운 날씨에도 밖으로 밖으로만 싸돌아다니는 족속이 있게 마련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은유 작가의 글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채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렇게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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