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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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느낌이 생각보다 오래 이어지고 있다. 세기말, 아니 연말 분위기 탓인지도 모른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게 그저 형식상의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지만 사람의 기분이란 게 어디 그런가. 나도 모르게 왠지 센티해지고 이렇다 하게 슬퍼할 만한 일이 딱히 없어도 한없이 가라앉는 것이다. 이러다가는 우울의 늪에 깊이 가라앉아 결국에는 익사하고 말 것이라는 공포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도 이따금 들고 종잡을 수 없는 기분이 하루에도 몇 번씩 극과 극으로 치닫다 보니 하루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여러 번 경험하는 느낌이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있었던 송년 모임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졌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빅 엔젤 데 라 크루스는 시간을 엄수하기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다. 같은 직장에 다니는 미국인들은 그를 가리켜 '독일인'이라고 부르곤 했다. 참 웃긴 일이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멕시코인이라고 해서 시간을 안 지킬 거라고 생각하다니. 비센테 폭스가 일처리를 제때 하지 못한 적이 았냔 말이다." (p.16)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가 쓴 <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을 손에 잡았던 건 꽤나 오래 전의 일이다. 우울한 기분을 달래기에는 딱이다 싶었던 책이었지만 한달음에 후루룩 다 읽어버린 책의 리뷰를 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일, 내일 하고 미루었던 게 그만 해를 넘기게 생겼다. 정신이 번쩍 들어 컴퓨터 앞에 앉기는 하였지만 내용이 가물가물하고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이런 젠장, 이러다가는 정말 해를 넘기겠는 걸, 하는 생각에 아침부터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각자의 주장이 강하고 개성이 넘치는 데 라 크루스 가문의 존경받는 가장이자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미겔 엔젤은 올해로 일흔 번째 생일을 맞는다. 어찌 보면 성격이 까칠하고 엄격한 그이지만 가족들에 대한 애정만큼은 누구보다도 크고 강하여 가족들은 그를 '빅 엔젤'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건강만큼은 늘 자신했던 그이지만 의사로부터 들었던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으로 인해 그의 신념과 인생 계획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그가 암에 걸렸으며, 남은 시간도 한 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입술 위에 닿는 이불의 가장자리 느낌이 좋았다. 몸을 모두 다 덮은 느낌은 빡빡하니 안전하게 느껴졌다. 동이 트기 전의 새벽녘이 제일 좋았다. 그때는 죽어가고 있다는 게 생각나지 않으니까. 잠시 그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과거를 음미했다. 오늘, 그 과거의 맛은 스카치 캔디 맛이었다." (p.259)

 

빅 엔젤은 자신의 마지막 생일을 아주 성대하게 치르기로 마음먹고 미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가족들을 불러 모은다. 그러나 생일 파티를 일주일 남기고 100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식과 생일 파티에 모두 참석하려면 두 번이나 먼 길을 오가야 하는 까닭에 빅 엔젤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일주일 미뤄 자신의 생일 파티와 함께 할 수 있도록 일정을 조정한다. 빅 엔젤의 마지막 생일이자 마지막 주말이 되는 바로 그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이미 해가 중천인데 가족들은 아직도 세상 모른 채 자고 있는 게 아닌가.

 

"빅 엔젤은 어머니의 장례식에 지각했다. 그는 침대에서 고개를 벌떡 쳐들었다. 발에 침대 시트가 이리저리 감긴 채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깨닫자 옆구리에서 땀이 송송 솟았다. 해가 중천이었다.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로 빛이 환했다. 온 세상이 분홍빛으로 타오르고 있다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먼저 가 있을 것이다. 안 돼. 이러지 마. 오늘은 안 된다고. 그는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p.9)

 

소설의 주인공인 빅 엔젤의 마지막 생일 파티를 기점으로 가족 구성원에 대한 빅 엔젤의 기억과 회상에 의해 데 라 크루스 가문의 역사가 재구성되는 이 소설은 만만찮은 볼륨과 많은 등장인물로 인해, 혹은 멕시코라는 다소 낯선 공간과 그곳 사람들의 생경한 문화와 어색한 이름으로 인해 읽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삶과 죽음을 한 자리에 놓고 즐기려는 작가의 의도는 독자들에게 충분히 전달되고 있다.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며 삶 역시 영원하지 않다는 걸 작가는 심각한 언어로 말하지 않고 데 라 크루스 가문 구성원의 개성 넘치는 유머와 재치,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남미 특유의 정서를 잘 버무려 독자에게 전달하는 까닭에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부담감 없이 즐기게 된다.

 

"빅 엔젤은 죽음이라는 무도의 슬픈 스텝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제 말을 하는 것도 상당한 노력이 들었다. 죽는다는 건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하는 게 힘들어진다. 누가 옆에 있는지 잊게 된다. 갑자기 분노가 차오르고 화가 치밀어 올라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성스럽게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토록 약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그러다 갑자기 기분이 좀 좋아지면서 어리석게도 곧 기적이 일어나서 나을 거라고 믿게 되기도 한다. , 누군가를 몰아붙이는 게 따지고 보면 그리 더럽고 썩어빠진 짓은 아니군." (p.412)

 

동양인의 정서 상 가족의 죽음을 가볍고 유쾌하게 받아들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소설 속 등장인물들도 속으로는 빅 엔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겉으로 내색을 하고 있지 않을 뿐이지만 어쩌면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의 죽음이나 질병으로 인해 서로 등 돌리고 반목하던 가족이 다시 화합할 수 있다면 그것은 또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삶과 죽음의 길이 예 있으매 두려워 나는 가노란 말도 못 다 이르고 갔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서 가는 곳 모르겠구나. , 극락에서 만날 너 도 닦으며 기다리련다.'라고 노래했던 월명 스님의 제망매가(祭亡妹歌)가 떠오른다. 출가한 몸으로 세속의 인연에 연연하는 건 불도에 어긋날지도 모르지만, 죽은 누이를 그리는 아름다운 인간애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뭉클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언젠가 나는 <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을 떠올리며 월명 스님의 절절한 우애를 가슴에 새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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