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한순간에 후루룩 무너져내리는 것도, 무너지던 삶을 근근이 되살아나게 하는 것도 다 그리움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가 더러 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늘처럼 뭐라 말할 수 없는 봄이 온 세상에 가득할 때면 그리운 이름들을 가만가만 불러보게 된다. 그리움처럼 개나리가 피고, 배꽃이 피고, 연녹색 잎들이 세상을 물들인 들판에 그리운 이의 이름이...

 

봄햇살이 너무 좋아서 차를 몰아 근교로 나갔었다. 낮에는 코트를 벗어야 할 정도로 철이른 대위가 대지를 뒤덮었던 오늘, 농부들의 분주한 손길만이 봄의 고랑을 고르고, 나무들은 꽃을 틔울 준비를 서두른다. 허둥대는 계절의 전령들이 제 순서를 잊고 갈팡질팡 혼란스러웠던 한낮,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저 어둡기만 했다. 봄을 즐기기에는 코로나19의 그림자가 너무나도 넓고 짙었다.

 

인적도 끊긴 식당에서 칼국수 한 그릇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마을을 가로지른 배꽃 향기가 후드득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오후. 그리운 이름들을 가만가만 되뇌어보면 흘러간 봄에 지불했던 소중한 시간들이 되살아날까. 석양이 물들고 있다. 느긋했던 마음이 불현듯 길지 않은 봄의 하루처럼 다급해지는... 한적한 도로를 속력을 높여 달려가는 차량들. 문이 굳게 닫힌 시골 성당을 둘러보았다. 한때는 삶의 이야기로 북적였을 이곳도 적막감만 감돌았다. 그러나 집으로 향하는 어느 사거리의 교회는 예배에 참석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그도 저도 아니면 이기적이라고 해야 할지... 이런 단순 무식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바이러스는 숙주를 필요로 하고, 인간의 무지는 바이러스의 통로가 되고 있다. 그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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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사라지지 않는 여름 1~2 - 전2권
에밀리 M. 댄포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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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어떤 시점이 되면 오늘 뭘 할까? 고민하지 않아도 습관적으로 하루를 흘려보내게 되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하루하루가 끝없는 도전의 연속이었고, 새롭게 주어진 하루를 도대체 뭘 하면서 그 긴 시간을 채워나갈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도덕이나 관습과는 거리가 먼 다소 엉뚱한 생각들이 우리를 지배했던 날들이 더러 있게 마련이었고, 삶의 오점이나 흠은 그러한 생각에서 비롯되었음을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아무튼 우리는 럭비공과도 같은 그 시절을 통과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에서 경험이라는 큰 자산을 얻는 대신에 복구할 수 없는 흠을 남기기도 하고, 그저 하나의 작은 오점에 불과한 여러 경험들을 두루 겪어보기도 한다.

 

세상에 흠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마는 나 역시 지난 삶을 이따금 돌이켜보면 인생의 어떤 부분은 얼굴이 후끈 달아오를 정도의 부끄러움을 느끼게도 된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안에서는 밖이 훤히 보이고 밖에서는 안을 조금도 볼 수 없는 원웨이글라스 방식의 화장실에서 느낄 수 있는, 자신의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듯한 부끄러움이랄까. 설령 누가 보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자신의 영혼을 투명 외피로 겨우 감싼 듯한, 그리하여 누군가 내 영혼의 검은 속내를 속속들이 다 지켜보고 있는 듯한 두려움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을 누군가에게 스스로 털어놓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질 리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것은 대개 삶의 방향이나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십대의 어린 시절에 만들어지곤 한다.

 

미국 작가 에밀리 M. 댄포스가 쓴 <사라지지 않는 여름 1, 2>은 십대 소녀 캐머런 포스트의 성장 과정을 담은 아름다운 소설이다. 묘사와 표현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동성애라는 쉽지 않은 주제를 아주 조심스럽게, 한편으로는 섬세하게 다룸으로써 우리가 십대 시절에 형성했을 성() 의식과 그를 둘러싼 알 수 없는 죄의식, 동성애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일방적인 편견과 무지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시나브로 대다수의 이성애자들이 소수의 동성애자들을 향해 얼마나 가혹했던가 반성하게 되고, 자신의 십대 시절을 회상하면서 지나온 삶을 반추하기도 한다.

 

"그때 나는 리디아가 어째서 나의 망할 발달주기가 엉망이 되었는지, 어째서 내가 죄가 담긴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에 오게 되었는지 설명할 유의미한 무언가를 알아내기 직전이라고 믿는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2p.228)

 

소설은 몬태나주 동부의 작은 마을 마일스시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엄마와 아빠가 퀘이크 호수로 캠핑 여행을 떠났고, 캐머런을 돌봐주러 할머니가 오셨다.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냈던 아이린과 장난스레 키스를 했던 날 캠핑을 떠났던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부모님이 돌아가심으로써 아이린과의 일은 이제 아무도 모른다는 안도감에 빠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캐머런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게 되고, 부모님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큰 목장을 운영하던 아이린네 부모님은 아이린을 코네티컷에 있는 기숙학교로 보냈고, 캐머런은 그렇게 아이린과 헤어졌다.

 

부모님의 사망 이후 승무원이었던 루스 이모가 할머니와 함께 캐머런을 돌보기 위해 이사를 왔다. 아이린과 헤어진 후 중학생이 된 캐머런은 수영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시합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을 하던 린지와 사귀면서 캐머런은 레즈비언 문화에 대해 조금씩 눈을 뜨게 된다. 방학 동안 수영 연습을 함께 했던 린지는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정치적이고 혁명적이며 대항문화적인 것'이라고 가르쳐준 상대였고, 그녀가 사는 시애틀로 떠난 후에도 꾸준히 편지를 쓰거나 선물과 믹스 테이프를 보내오곤 했다.

 

고등학생이 된 캐머런은 육상팀에 들어갔고, 생물학 수업을 같이 듣던 콜리에게 급격히 빠져들었다. 게다가 콜리와 그 애 엄마가 캐머런과 루스 이모가 다니는 찬양의 문 교회에 다니게 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콜리가 커스터고등학교에서 수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농장에서 통학을 하다가 마일스시티 시내에 아파트를 얻고 자취를 하게 되면서 캐머런은 콜리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기회를 엿본다. 아파트에서 격렬한 키스를 나눈 뒤에 털어놓은 캐머런의 고백에 콜리는 잘못된 거라며 부정한다. 콜리와의 일이 발각된 후 캐머런은 결국 릭 목사가 운영하는 동성애 전환 치료 시설인 '하나님의 약속 기독 사도 프로그램'에 보내진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그곳에서 캐머런은 다른 입소생들의 다양한 상처와 욕망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입소생 중 한 명이 자해를 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믿음이나 자기부정을 통해 성 정체성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어른들의 신념이 잘못되었음을 캐머런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캐머런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같은 입소생인 애덤, 제인과 함께...

 

"그러나 아침이 되어도 나는 죄를 극복했다거나 하나님께 가까워졌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다만 내가 절제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이 달리기나 수영을 하면서 나 자신을 극복했을 때처럼 남몰래 뿌듯할 뿐이었다. 절제나 극기는 사람들을 중독시키기도 한다. 마치 자꾸만 절제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다른 사람보다 정결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리디아가 집착하는 그 모든 규칙을 따르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일이며, 시간이 흐르면 따라야 할 규칙을 점점 더 많이 만들게 되고 급기야는 성경 구절을 통해 이를 정당화하는 데 이르게 된다." (2, p.248)

 

본연의 성 정체성을 부정하고 혐오하며, 끊임없는 죄책감을 통하여 가능하지도 않은 믿음을 주입한다는 건 어쩌면 그들에게 크나큰 폭력이 아닐 수 없다. 그들로 하여금 평생을 죄책감과 자기부정 속에서 살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직접 겪어본 것도 아니면서 동성애자는 단지 그들의 의지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믿는 기성세대의 어리석은 믿음을 목격하곤 한다. 그와 같은 믿음은 동성애자들을 향한 포용이나 배려보다는 날 선 비난이나 혐오 혹은 배척이나 차별로 이어지는 게 보통이다. 나는 다만 운이 좋아서 이성애자라는 주류에 속했을 뿐 어떤 노력의 산물로서 지금의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다수 이성애자들이 자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코로나19의 확산이 특정 종교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처럼 <사라지지 않는 여름>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특정 종교의 잘못된 믿음이, 기성세대의 무지가, 그리고 우리 자신의 비양심이 누군가를 향해 보이지 않는 칼날을 휘두르게 된다는 사실을 가슴 절절히 깨닫게 된다.

 

인간은 평생을 비난과 자기혐오 속에서 살아가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결코 그렇게 명령한 적이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행복을 추구하며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자신을 부정하며 평생을 살아가도록 누군가에게 강요한다는 건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자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한 자기부정이 아닐 수 없다. 오늘처럼 봄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이면 타인에 대한 혐오와 비난을 일삼는 몇몇 인간의 잘못을 꾸짖는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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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아침의 농밀한 침묵 속으로 시간이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침묵 속을 유영하는 시간. 부챗살처럼 퍼지는 봄햇살 속으로 유영하는 시간을 타고 흐르다 보면 태곳적 원시의 세계를 만날 듯한 착각이 드는 주말의 아침. 고등학생인 아들은 코로나19의 위험을 뒤로한 채 학원으로 향했고 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도쿄 타워>를 읽고 있다. 청아한 문체와 세련된 감성 화법으로 사랑받고 있는 에쿠니 가오리는 '여자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자신의 작품에 무척이나 공을 들인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그녀의 청순한 문체는 때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배가시키는 효과로 작용하기도 한다. 물론 나만의 주관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예컨대 악인을 묘사할 때 행동이나 표정을 작가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무덤덤하게 표현함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오싹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영화에서도 표정이 없는 사이코패스가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작가의 내면에 깔린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고독과 결핍, 그리고 약자와 소수를 바라보는 그녀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녀의 작품 세계가 대부분 '정상적인 부부관계''정상적인 상처의 처리'를 부정하는 까닭에 그녀의 작품 전체를 싫어하는 독자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바깥 활동을 극도로 자제하다 보니 다소 게을러진 게 사실이다. 물론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것처럼 일관된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말이다. 웃기는 건 코로나19가 유행하지 않았던 지난해만 하더라도 바쁜 일상에 쫓기면서도 읽은 책은 언제든 리뷰로 남길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한가하기 이를 데 없는 요즘은 읽었던 책의 리뷰를 쓰기는커녕 책을 다 읽은 후 책을 책꽂이에 꽂는 일조차 버겁고 힘겹게만 느껴진다. 읽은 책과 아직 읽지 않은 책이 혼재한 채 집안 곳곳에서 굴러다닌다. 대한민국에서 코로나19의 빠른 제거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들과 이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혼재하는 것처럼. 어느 예일대 박사도 말하지 않았던가. 한국 정부의 적절한 코로나19 대응 시스템과 성숙한 시민의식 사이에도 '검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일부 노년층과 믿음으로 뭉친 이단 신천지 집단, 그리고 미통당의 코로나19 정치화 등이 변수로 존재한다고.

 

베란다 창문을 건너온 봄햇살이 거실 바닥을 아지랑이처럼 핥고 있다.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시간. 주일 오전의 여유로운 시간이 그렇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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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환장 속으로 - 엄마 아빠, 나만 믿고 따라와요, 세 식구가 떠나는 삼인사각 스페인 자유여행
곽민지 지음 / 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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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을 느낌이 아닌 그저 바라보이는 현상만으로 인식할 때가 더러 있다. 그럴 때 세상은 우리의 눈을 가리거나 현혹하는 잔부스러기들을 걷어냄으로써 맑고 투명하게 보이는 게 아니라 쓸쓸하거나 덧없는, 신기하거나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그런 곳이 되고 만다. 예컨대 어제처럼 오락가락 비가 흩뿌리던 날에 '비가 온다'는 한마디의 말로 현상을 설명하지 못할 것은 없지만 개인의 느낌이 곁들여지지 않은 그 말에서는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가 쓴 여행기를 읽을 때에도 장소에 대한 건조한 설명보다는 개인의 감정이 2/3도 넘을 듯한 책에 이끌리는 까닭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호하는 여행기는 장소를 옮겨가며 쓴, 장소에 대한 설명이 마치 양념처럼 간간이 등장하는 무척이나 사적인 경험담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책을 통한 대리만족이라도 하자는 생각이 부쩍 드는 요즘이다. 그마저도 않으면 좀이 쑤셔서 견디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곽민지 작가의 <걸어서 환장 속으로>를 읽게 된 것도 내심 그런 이유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여느 해 같았으면 잠깐의 여유 시간이 나더라도 집 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기보다는 산으로 들로 나들이를 떠났을 테지만 지금이야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니 말이다.

 

"삼십몇 년 내공의 단단한 연애를 훈훈하게 바라본 지 1초 만에, '귤 줄까' 한마디로 우릴 경기도에 있는 집 거실에 데려다놓는 엄마는 위대한 사람이다. 누가 그랬더라, 세 명 이상이 함께 있으면 사회가 된다고.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서 깨달았다. 어떤 공간에 함께 지내는 세 명의 사람이 다른 공간에 왔을 때 그들 중 하나가 평소 셋이 있는 공간에서와 같은 행동을 하면, 다른 사람들도 거실에서 하던 소리로 받아치게 된다는 걸." (p.40)

 

아버지의 환갑과 은퇴를 동시에 맞은 가족은 그동안 고생하신 엄마와 아빠를 위해 평소 꿈꾸던 스페인 패키지여행을 준비했었다. 하지만 엄마는 시간에 쫓기는 그런 여행 말고 자유여행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나이도 들고 앞으로 점점 자유여행이 힘들어질 텐데 지금이 아니면 평생 해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게 그 이유였다. 두 딸 중 마침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작은딸이 부모님을 모시고 스페인 자유여행길에 올랐고, 그렇게 시작된 여행의 전 과정을 담은 책이 바로 <걸어서 환장 속으로>이다.

 

"카메라를 가방에 다시 넣은 아빠는 달랑달랑 신발 봉지를 들고서 론다 거리 한복판을 걷는다. 딸은 뒤에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체크인 할 시간이 된 걸 눈치채고 엄마와 아빠를 양떼 몰듯 호텔 방향으로 몰아 사장님을 찾아간다. 올라! 우리 왔어요." (p.181)

 

집에서 하던 모습 그대로 가방에서 연신 귤을 꺼내는 엄마와 가는 곳마다 '당신 거기 서봐' 하면서 사진을 찍어대는 아빠, 그리고 어설픈 가이드이자 잔소리꾼을 자처한 딸, 이들 셋이 펼치는 좌충우돌 스페인 여행기는 그들 간에 오간 생생한 대사를 그대로 옮겨놓음으로써 마치 드라마 속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처럼 읽는 이로 하여금 지루할 새가 없도록 한다. 대학 때 용돈을 모아 처음으로 떠났던 유럽 국가인 스페인, 그 나라의 매력에 흠뻑 빠진 딸은 틈만 나면 그곳을 찾았고 그만큼 익숙해진 나라였음에도 부모님과 함께 방문한 스페인은 또 다른 매력을 선사했다. 딸이 베테랑 가이드로 변신하는 동안 그들은 끈끈한 가족애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여권을 분실하는 등 크고 작은 소동이 있었지만 말이다.

 

"엄마 아빠와 여행을 또 가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굳이 여행의 방식을 빌리지 않더라도 여행 갔을 때처럼, 내일도 이어질 동행을 위해 오늘 서로를 좀더 관찰하면서 현재 가진 것을 기뻐할 줄 알려고 노력한다. 사실 여행을 떠나는 일보다 그게 훨씬 어렵다." (p.286)

 

지금은 고인이 된 중국 작가 위지안은 자신의 책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그동안 불투명한 미래의 행복을 위해 수많은 '오늘'을 희생하며 살았다. 저당 잡혔던 그 무수한 '오늘'들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라고. 우리는 어쩌면 위기를 통해 삶의 의미를 하나씩 하나씩 배워나가는지도 모른다. 바람을 통해 낱알과 쭉정이를 구분하듯 지금과 같은 환란의 시기에 진정한 리더를 발견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과 같은 '답답한 오늘' 속에서도 자신만의 기쁨을 쉼 없이 찾아내기를. 그것만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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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의 평화로운 일상을 반납한 지 꽤나 오래된 느낌이다. 누가 강요한 건 아니지만 온 국민이 자가격리 상태에 준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집 안에서 머무는 시간이 부쩍 늘었고 단조로운 일상을 견디지 못하는 여러 지인들의 전화를 수시로 받게 된다. 다들 상대방의 건강이나 안부를 묻는 게 고작이지만 그보다는 집 안에서 갇혀 지내는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고 예전처럼 어떤 규제도 없이 마음껏 바깥 활동을 하게 될 날을 상상해보려는 목적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눈에 잘 띄지도 않고 과학적인 근거를 댈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와 같은 격리 생활로 인해 한결 좋아진 것도 있는 듯하다. 일단 도로의 교통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 교통 체증이 감소되었다는 점이다. 평일 낮에 운전을 하다 보면 상습적으로 정체가 반복되던 지점에서도 신호를 받고 한 번에 쉽게 통과하는 걸 볼라치면 왠지 낯설고 신기한 느낌이 들곤 한다. 이런 변화도 좋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 따로 있다. 교통량이 감소한 탓인지 이맘때면 늘 말썽을 부리던 미세먼지의 습격이 전혀(는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을 나가기 전에 습관적으로 보게 되는 미세먼지 예보에서 나쁨을 찾아볼 수가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침 기온이 제법 쌀쌀하지만 기분 좋게 산행을 마칠 수 있으니 하루가 행복할 수밖에. 또 하나 좋은 점은 줄어든 행사만큼 씀씀이가 줄어든 것도 좋고, 상대적으로 늘어난 개인 시간에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좋다. 그렇다고 코로나19로 인한 달라진 풍경을 언제까지고 즐길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물론 평일 낮에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사무실 근처의 식당을 방문해 보면 줄어든 손님 탓에 힘겨워하는 식당 주인 분들의 표정이 안쓰럽기도 하다.

 

그러나 온 국민이 이와 같은 상황을 말없이 인내하고 있는 이 시점에도 이런 상황을 (즐기는 건 아니겠지만)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려는 사악한 무리들이 있게 마련이다. 중앙일보의 임 모 기자는 우리나라와 일본 이탈리아가 중국에 마스크를 퍼주는 바람에 마스크가 부족해졌고, 그와 함께 최악의 코로나19를 경험하고 있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쓰레기 기사를 썼는가 하면 머니투데이의 오 모 인턴기자는 최근 중국의 웨이하이시에서 인천시에 보내온 마스크가 마치 부적합 판정을 받은 마스크인 양 기사를 씀으로써 가짜 뉴스를 통해 중국의 이미지를 훼손하려 했다. 일개 인턴 기자가 타국의 선의를 이따위 방식으로 훼손하고 외교적 결례를 범했는데도 법적으로 용서가 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지만 말이다.

 

최악의 재난 상태에서도 나라의 안위나 국민의 안전은 뒷전인 채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하는 무뢰배들이 존재한다는 건 정말 짜증 나는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그들도 대한민국 국민인 것을... 봄기운이 완연한 날씨. 흐리고 구름도 많지만 비만 오지 않는다면 점심을 먹고 산책이라도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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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둘리 2020-03-07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대로 갈등과 분열, 분노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기사가 너무 많네요. 차분하고 진지하게 분석하고 통찰하는 기사를 찾기 힘든 점이 정말 아쉽습니다.

꼼쥐 2020-03-11 21:51   좋아요 1 | URL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하는 게 기자의 책무인데 우리나라의 기자들은 오직 자신의 유불리만으로 기사를 선별하는 못된 습성이 있지요. 그러다 보니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기사들만 난무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