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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환장 속으로 - 엄마 아빠, 나만 믿고 따라와요, 세 식구가 떠나는 삼인사각 스페인 자유여행
곽민지 지음 / 달 / 2019년 4월
평점 :
내가 사는 세상을 느낌이 아닌 그저 바라보이는 현상만으로 인식할 때가 더러 있다. 그럴 때 세상은 우리의 눈을 가리거나 현혹하는 잔부스러기들을 걷어냄으로써 맑고 투명하게 보이는 게 아니라 쓸쓸하거나 덧없는, 신기하거나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그런 곳이 되고 만다. 예컨대 어제처럼 오락가락 비가 흩뿌리던 날에 '비가 온다'는 한마디의 말로 현상을 설명하지 못할 것은 없지만 개인의 느낌이 곁들여지지 않은 그 말에서는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가 쓴 여행기를 읽을 때에도 장소에 대한 건조한 설명보다는 개인의 감정이 2/3도 넘을 듯한 책에 이끌리는 까닭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호하는 여행기는 장소를 옮겨가며 쓴, 장소에 대한 설명이 마치 양념처럼 간간이 등장하는 무척이나 사적인 경험담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책을 통한 대리만족이라도 하자는 생각이 부쩍 드는 요즘이다. 그마저도 않으면 좀이 쑤셔서 견디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곽민지 작가의 <걸어서 환장 속으로>를 읽게 된 것도 내심 그런 이유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여느 해 같았으면 잠깐의 여유 시간이 나더라도 집 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기보다는 산으로 들로 나들이를 떠났을 테지만 지금이야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니 말이다.
"삼십몇 년 내공의 단단한 연애를 훈훈하게 바라본 지 1초 만에, '귤 줄까' 한마디로 우릴 경기도에 있는 집 거실에 데려다놓는 엄마는 위대한 사람이다. 누가 그랬더라, 세 명 이상이 함께 있으면 사회가 된다고.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서 깨달았다. 어떤 공간에 함께 지내는 세 명의 사람이 다른 공간에 왔을 때 그들 중 하나가 평소 셋이 있는 공간에서와 같은 행동을 하면, 다른 사람들도 거실에서 하던 소리로 받아치게 된다는 걸." (p.40)
아버지의 환갑과 은퇴를 동시에 맞은 가족은 그동안 고생하신 엄마와 아빠를 위해 평소 꿈꾸던 스페인 패키지여행을 준비했었다. 하지만 엄마는 시간에 쫓기는 그런 여행 말고 자유여행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나이도 들고 앞으로 점점 자유여행이 힘들어질 텐데 지금이 아니면 평생 해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게 그 이유였다. 두 딸 중 마침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작은딸이 부모님을 모시고 스페인 자유여행길에 올랐고, 그렇게 시작된 여행의 전 과정을 담은 책이 바로 <걸어서 환장 속으로>이다.
"카메라를 가방에 다시 넣은 아빠는 달랑달랑 신발 봉지를 들고서 론다 거리 한복판을 걷는다. 딸은 뒤에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체크인 할 시간이 된 걸 눈치채고 엄마와 아빠를 양떼 몰듯 호텔 방향으로 몰아 사장님을 찾아간다. 올라! 우리 왔어요." (p.181)
집에서 하던 모습 그대로 가방에서 연신 귤을 꺼내는 엄마와 가는 곳마다 '당신 거기 서봐' 하면서 사진을 찍어대는 아빠, 그리고 어설픈 가이드이자 잔소리꾼을 자처한 딸, 이들 셋이 펼치는 좌충우돌 스페인 여행기는 그들 간에 오간 생생한 대사를 그대로 옮겨놓음으로써 마치 드라마 속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처럼 읽는 이로 하여금 지루할 새가 없도록 한다. 대학 때 용돈을 모아 처음으로 떠났던 유럽 국가인 스페인, 그 나라의 매력에 흠뻑 빠진 딸은 틈만 나면 그곳을 찾았고 그만큼 익숙해진 나라였음에도 부모님과 함께 방문한 스페인은 또 다른 매력을 선사했다. 딸이 베테랑 가이드로 변신하는 동안 그들은 끈끈한 가족애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여권을 분실하는 등 크고 작은 소동이 있었지만 말이다.
"엄마 아빠와 여행을 또 가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굳이 여행의 방식을 빌리지 않더라도 여행 갔을 때처럼, 내일도 이어질 동행을 위해 오늘 서로를 좀더 관찰하면서 현재 가진 것을 기뻐할 줄 알려고 노력한다. 사실 여행을 떠나는 일보다 그게 훨씬 어렵다." (p.286)
지금은 고인이 된 중국 작가 위지안은 자신의 책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그동안 불투명한 미래의 행복을 위해 수많은 '오늘'을 희생하며 살았다. 저당 잡혔던 그 무수한 '오늘'들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라고. 우리는 어쩌면 위기를 통해 삶의 의미를 하나씩 하나씩 배워나가는지도 모른다. 바람을 통해 낱알과 쭉정이를 구분하듯 지금과 같은 환란의 시기에 진정한 리더를 발견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과 같은 '답답한 오늘' 속에서도 자신만의 기쁨을 쉼 없이 찾아내기를. 그것만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