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의 농밀한 침묵 속으로 시간이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침묵 속을 유영하는 시간. 부챗살처럼 퍼지는 봄햇살 속으로 유영하는 시간을 타고 흐르다 보면 태곳적 원시의 세계를 만날 듯한 착각이 드는 주말의 아침. 고등학생인 아들은 코로나19의 위험을 뒤로한 채 학원으로 향했고 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도쿄 타워>를 읽고 있다. 청아한 문체와 세련된 감성 화법으로 사랑받고 있는 에쿠니 가오리는 '여자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자신의 작품에 무척이나 공을 들인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그녀의 청순한 문체는 때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배가시키는 효과로 작용하기도 한다. 물론 나만의 주관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예컨대 악인을 묘사할 때 행동이나 표정을 작가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무덤덤하게 표현함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오싹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영화에서도 표정이 없는 사이코패스가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작가의 내면에 깔린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고독과 결핍, 그리고 약자와 소수를 바라보는 그녀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녀의 작품 세계가 대부분 '정상적인 부부관계''정상적인 상처의 처리'를 부정하는 까닭에 그녀의 작품 전체를 싫어하는 독자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바깥 활동을 극도로 자제하다 보니 다소 게을러진 게 사실이다. 물론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것처럼 일관된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말이다. 웃기는 건 코로나19가 유행하지 않았던 지난해만 하더라도 바쁜 일상에 쫓기면서도 읽은 책은 언제든 리뷰로 남길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한가하기 이를 데 없는 요즘은 읽었던 책의 리뷰를 쓰기는커녕 책을 다 읽은 후 책을 책꽂이에 꽂는 일조차 버겁고 힘겹게만 느껴진다. 읽은 책과 아직 읽지 않은 책이 혼재한 채 집안 곳곳에서 굴러다닌다. 대한민국에서 코로나19의 빠른 제거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들과 이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혼재하는 것처럼. 어느 예일대 박사도 말하지 않았던가. 한국 정부의 적절한 코로나19 대응 시스템과 성숙한 시민의식 사이에도 '검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일부 노년층과 믿음으로 뭉친 이단 신천지 집단, 그리고 미통당의 코로나19 정치화 등이 변수로 존재한다고.

 

베란다 창문을 건너온 봄햇살이 거실 바닥을 아지랑이처럼 핥고 있다.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시간. 주일 오전의 여유로운 시간이 그렇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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