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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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고향을 묻는 이유는 단순했다. 적과 아군을 구분하자는 이유,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는 듯했다.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영남과 호남으로 대표되는 극한적 대립은 말할 것도 없고, 실재하는 전쟁에 의해 70여 년의 세월 동안 분단국가로 살아온 또 다른 이름의 고향, 남한과 북한. 그리고 실향민이라는 이름의 디아스포라. 어쩌면 그것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모국에서 살아가면서도 마음속의 모국을 잃어버린, 간절히 가고 싶어도 다시는 갈 수조차 없는, 모국을 떠나온 그 어느 나라의 국민보다 못한, 그야말로 디아스포라가 아니지만 가장 비극적인 디아스포라이기도 한 그 이름은 실향민. 나는 몇 년 전 속초의 아바이마을에서 만난 주름살 가득했던 어느 노인을 생각하며 이 소설을 읽는다.

 

"복잡한 문제군요! 어디서 왔냐는 말이 암시하는 바가 뭔지부터 따져봐야 해요. 분만실이 위치한 언덕의 지리적인 위치를 암시하는지, 마지막 진통이 시작되는 순간에 머물고 있는 나라의 국경을 암시하는지? 부모님 혈통인지? 유전자, 조상, 방언인지?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출신이 창조물이라는 건 변함이 없어요! 한번 입으면 영원히 입고 있어야 하는 옷 같은 거죠. 그건 저주예요! 아니면 약간의 운이 들어 있는 능력이랄 수 있어요. 재능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장점과 특권을 만들어내는 능력 말이죠." (p.44)

 

우리는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보스니아 내전을 기억한다. 19924월부터 199512월까지 있었던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일어난 국제적인 무력 충돌 말이다. 치열했던 전투와 무차별적인 도시 폭격, 인종 청소, 집단 강간과 대학살 등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끔찍했던 전쟁. 소설 <출신>은 그 오래전 기억과 맞닿은 채 현재와 미래가 뒤섞인다. 유고슬라비아 출신이면서 지금은 독일인으로 살고 있는 저자의 현재가 그러한 것처럼. 그리고 장담할 수 없는 미래가 또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스니아 내전이 터졌을 때 작가는 부모님과 함께 독일로 이주했다. 작가는 치매를 앓다가 2년 전 세상을 뜬 자신의 할머니를 회상하며 '우리 할머니 크리스티나가 기억을 잃어가기 시작할 때 나는 기억을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할머니가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던 그 시점에 작가는 난민 신분에서 벗어나 독일 국적을 취득하기 위한 자필 이력서를 쓰면서 자신과 연관된 오래전 기억을 수집해야만 했던 것인데 그것은 어쩌면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 작업인 동시에 지구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모국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작은 추도이자 헌사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연속성 위에 드문드문 공란을 남겨둔 채 파편처럼 이어지는 기억. 작가는 전쟁이 발발하자 어머니와 함께 세르비아에서 헝가리로, 크로아티아를 넘어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로 도피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들을 세르비아 국경까지 무사히 인도한 후 비셰그라드로 돌아갔다. 그렇게 반년 동안 할머니를 돌보셨던 아버지. 그 후 아버지도 독일행을 택했지만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신분은 모두 잃었다. 조국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정치학자였던 어머니도, 경영학자였던 아버지의 신분도 한낱 과거로 남았을 뿐 독일에서 어머니는 큰 세탁 공장에서 뜨거운 수건에 묻혀 살았고, 독일어를 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공사판을 전전할 뿐이었다. 이마저도 불안불안하게 이어오던 부모님은 인종 청소가 자행되는 비셰그라드로의 추방을 염려하여 1998년 미국 플로리다로 이주했다. 그리고 미국 연금 생활자 신분이 된 지금 부모님은 크로아티아에 살고 있다.

 

작가 역시 독일에서의 삶이 순탄치 않았다. 작가로서의 삶을 끝없이 '증명'해야만 했고, 이방인인 자신으로 인해 토착민인 주변의 독일인들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모든 규칙'을 상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방인으로서의 부당한 대우와 편견을 통해 가족들은 오히려 사람들을 좀 더 편하게, 부드럽게 대하는 방법을 배웠다.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출신'으로 인해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자신들과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게 되었던 셈이다. 그리고 치매를 앓는 할머니로 인해 비셰그라드에서 그녀가 누렸던 행복했던 삶을 기억 속에 저장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비셰그라드 출신이라는 이유가 부당한 차별과 불공평한 대우의 시발점이었다면 할머니에게는 행복의 원천이자 지금의 불행을 잊게 하는 행복의 방부제였던 셈이다.

 

'한 번 입으면 영원히 입고 있어야 하는 옷 같은 것''출신'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의식의 자유로운 흐름처럼 전개되는 소설 속에서 '출신'은 어느새 '계속해서 이야기되는 현재의 모습'으로 바뀐다. 과거에 대한 회상과 주변 인물의 일화가 모여, 그 모든 과거와 현재가 끝없이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출신'이 형성되고, 흐르는 세월과 함께 끝없이 창조된다는 것이다. 속초에서 만난 북한 출신의 어느 노인이 그랬던 것처럼 한 사람의 과거는 오롯이 과거 자체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내가 쓰는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쓰여 있다. '나의 반항은 일종의 적응이었다.' 독일에서 이민자로 살아가야 하는 방식에 걸었던 기대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반항은 출신의 숭배뿐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환상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속감은 지지했다. 나를 원하고 내가 있고 싶은 곳에서는 소속감을 갖고 싶었다. 그런 소속감과 함께 우리의 가장 작은 공통분모는 '충분하다'였다." (p.295)

 

지나온 삶이 한 번 지운 일기장처럼 희미해지는 날이면 나는 아바이마을에서 만났던 어느 노인을 떠올리곤 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공통분모로 그와 나의 희미한 기억들이 위치도 정해지지 않은 이 땅의 어느 곳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저 든든해지곤 했다. 나의 기억이 그에게도 닿아 나처럼 든든했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 않았다. 할머니의 행복했던 기억이 작가에게 든든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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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목수정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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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시기에 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찾아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설사 발견한다 하더라도 구성원 전체를 설득하여 더 나은 쪽으로 혁신을 유도한다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단지 사회 구성원 몇몇에 의한 너무나 미약한 목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 전체의 삐걱거림, 혹은 사회 시스템의 붕괴와 같은 위기 상황이 아니고서는 사회의 모순을 발견하고 이를 시정해야만 한다는 강한 신념이 구성원 각자에게 발현된다는 건 기대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까닭에 사회의 진보는 마냥 더딜 수밖에 없고, 성급한 사회 구성원에게 진보란 언제나 답답한 현실로만 비친다.

 

"국가의 경제적, 재정적 권력이 우리를 움직이긴 하지만, 국가의 지성은 그렇지 않다. 분노의 힘과 시민들의 운동 속에서 단순하고 명확한 메시지가 나타나야 한다. 이 세계는 우리에게 속해 있다. 우리는 결코 정부에 속하지 않았으며, 국가를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금융권력에는 더더욱 속하지 않는다." (p.274)

 

전 세계적인 코로나19의 충격은 각국 정부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바이러스처럼 빠르게 전파되었던 자유주의 시장 경제 체제의 한계를 노정하는 시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금과옥조처럼 추구되던 신자유주의 경제에 대한 회의와 우리의 미래를 맡기기에는 그 제도가 얼마나 부실한가에 대한 실제적인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가 작금의 코로나 위기였다. 그런 측면에서 스테판 에셀의 자서전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갈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는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2010년 그의 나이 92세에 발표한 32쪽 분량의 작은 책 <분노하라>가 세계인들에게 분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것처럼 말이다.

 

국가의 구성원들이야 어찌 되든 오직 자신의 정치적 유불리만을 따져 상황을 판단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유리하다면 비록 그것이 범죄에 가까운 행위일지라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저지를 수 있는 정치인들. 자신 입장은 쏙 뺀 채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게 국가 구성원 전체에게 유리하며 그것이 마치 정치적 선을 추구하는 유일한 길인 양 선전하는 정치인들. 부를 향한 무한대의 욕망을 부추기고 '자유 경쟁'이라는 미명 하에 무한대의 축재를 용인하는 정치인들. 예컨대 북한의 김정은이 최근 99% 사망했다고 주장함으로써 국민들 전체를 불안에 떨게 하고 국가 전체를 혼란에 빠트렸던 탈북 정치인과 그가 속한 정당의 정치인들은 김정은이 건재하다는 뉴스에도 불구하고 일언반구의 사과조차 없었다. 그를 뽑아준 지역구의 국민들도 우매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선적으로 그와 같은 자들을 공천한 정치인들의 잘못이 크다 하겠다. 결국 코로나19와 같은 전 세계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분노가, 깨어 있는 시민들의 용기가, 그리고 타인을 배려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걸 우리는 작금의 위기를 통해 배운다.

 

"내가 보기에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방관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를 기다리고 잇는 어려움들은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 아니며 우리에겐 충분히 사용하지 않은 에너지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직은 너무 멀게만 보이는 가치들에 대한 열망이 우리 안에 들끓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만일 우리가 불가능을 가능이라고 여긴다면, 그곳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고 충분한 힘이 있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조화를 이룰 수 있다." (p.167)

 

외교관으로서 세계 인권 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하는 등 현실 정치인이자 사상가였던 저자는 자본의 폭력에 맞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자고 호소했던 '낭만적인 레지스탕스'이기도 했다. 우리가 유럽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두 개의 지구가, 미국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다섯 개의 지구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나의 지구에서 70억 명의 인구가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시스템 구축에 헌신할 것을 강조했던 스테판 에셀.

 

"나를 바르게 지탱해주었던 첫 번째 힘은 우리 집안이 갖고 있는 일종의 전통 같은 것이었다. 내 부모님의 삶의 핵심이자 유익하며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던 것들의 영향이다. 내 부모님은 한 편으로는 그리스 신들을, 다른 한 편으로는 시를 내게 물려주었다.(중략) 내게 시는 하나의 '증거'였다. 내 경험에 의하면, 세상에는 우리를 활짝 피어나게 해주고, 우리가 맞서 싸우는 세력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그로부터 초월하게 해주는 영역이 있다. 시가 바로 그 증거다. 그때 우리는 다른 영역에 존재한다." (p.158)

 

'나에게 영혼이라는 것은 내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다. 그것은 전 인류의 눈이며, 눈물 흘리지 않고는 암송할 수 없는 시들이기도 하다.'라고 했던 스테판 에셀의 명언은 코로나 시대의 전 지구인에게 전하는 위로이자 계명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했다고 하는 미국과 서구 유럽의 국가에서 코로나19로 인한 많은 희생자가 나왔던 것은 아마도 그들의 지도자 대부분이 '눈물 흘리지 않고는 암송할 수 없는 시'를 가슴에 품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반면에 우리는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여길 수 있는, 영혼이 있는 지도자를 둔 덕분에 위기 상황에서도 오늘과 같은 평화를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는 가짜 뉴스도 언제든 퍼뜨릴 수 있는 사이비 정치인을 배제하는 게 이 시대의 진보를 향한 첫걸음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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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봄을 즐기기도 전에 때 이른 초여름 날씨에 어리둥절했던 하루였다. 그러나 부처님 오신 날과 근로자의 날 그리고 주말 연휴로 이어지는 달콤한 휴가 덕분인지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웠다. 무엇보다 코로나19의 진정세가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마트에도 근래에 보기 드문 인파로 북적였다. 미덥지 않은 삶의 동아줄을 확인하면서도 하루하루의 일상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는 자각이 사람들을 저으기 안심시켰는지도 모른다.

 

이천의 한 물류창고 공사 현장에서 있었던 화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지난한 삶의 현장에서 전해지는 암울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옛말이 나도 모르게 떠오르곤 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밥이 곧 하늘인 현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의 위협에 다들 외출도 꺼려하던 요즘, 직접적인 살인 도구인 우레탄폼의 검은 연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야만 했던 그들의 거친 일상은 또 어떠했을지... 때 이른 무더위가 지나던 오월의 첫날, 그래 오늘은 근로자의 날이지. 근로자가 없는 달력에 붉은 글씨의 '근로자의 날'만 선명한...

 

우리는 이따금 'n번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과 같은 범죄자는 선천적으로 타고난다고 믿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착각에 불과하다. 만민중앙교회의 이재록 목사도, 지난 30여 년 간 자신의 교회에 다니는 여성 신도 9명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하거나 추행했다는 전북의 어느 목사도 선천적인 악인으로 보기는 어려울 터, 그들은 다만 범죄가 용이한 환경에 너무나 자주 노출되었을 뿐이다. 자신의 돈과 권력으로 너무도 쉽게 저지를 수 있었던 범죄와 그런 범죄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처벌은 집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은 그들로 하여금 절대적인 악의 편으로 내몰지 않았을까.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들과 그들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던 사람들. 죄는 다만 처음이 어려울 뿐 두 번, 세 번은 비교적 쉬웠던 게 아닐까.

 

샌드위치 패널을 휩쓸고 간 이천의 어느 공사현장의 화마처럼 후끈한 열기가 한반도 전체를 달구었던 오늘, 그래 오늘은 공사 현장의 근로자도 없는 붉은 글씨 선명한 '근로자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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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눈
딘 쿤츠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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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언제나 소설보다 더 잔인하다. 그것은 상상과 체험의 차이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 디테일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게다가 현실은 소설보다 더 공포스러우며 견디기 힘든 공간이기도 하다. 현실을 주관하는 신은 감정이 없는 반면 소설을 쓰는 인간은 다분히 감정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예컨대 자신이 상상하는 소설 속 한 장면을 글로 표현할 때, '이 정도면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 혹은 '이것보다 더 나아가면 과장된 거 아닐까?' 하면서 스스로 판단하고 뒤로 한 발 물러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인간의 가치판단이나 도덕적 양심, 혹은 신의 자비와는 무관하게 진행되곤 한다. 인간은 마지막 순간에선 대개 뒤로 한 발 물러서는 게 일반적이지만 신은 어떠한 순간에서도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쁨이나 행복, 또는 행운과 같은 긍정적인 장면은 현실보다 소설이 더 리얼하고 과장되게 마련이다. 현실에서 인간은 행복한 순간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으며 행복하다고 느끼는 찰나적인 그 순간은 너무나 빨리 흐르는 까닭에 현실에서 우리는 그 순간을 미처 감지할 수 없을뿐더러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행복했던 그 순간을 흐릿하게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행복은 언제나 과거형이다. 그러므로 소설 속에서의 행복은 마치 우리의 바람을 모두 옮겨 놓은 듯 길고 과장되게 마련이며 소설을 읽는 독자들을 유혹하면서 현실로 되돌리는 순간을 한없이 늦추곤 한다.

 

"그는 살인을 즐겼다. 세상에서는 비록 가면을 쓰고 다녀야 할지라도 스스로까지 속일 마음은 없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왜인지 설명할 수 없는 모종의 이유로 그는 죽음에 무척 매료됐다. 죽음의 형태와 본질과 가능성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연구하고 이론을 세우는 데 흠뻑 빠진 그는 자신을 죽음의 전령이자 신의 부름을 받은 사형집행자라고 여겼다. 살인은 많은 면에서 섹스보다 더 짜릿했다." (p.354)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딘 쿤츠의 초기작인 <어둠의 눈>은 외아들 대니를 사고로 잃고 힘들어하는 크리스티나 에번스(티나)가 겪은 4일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들이 죽은 지 1년이 넘었지만 길거리에서 아들 또래의 남자아이만 보아도 대니의 얼굴이 겹쳐 보이고, 시도 때도 없이 대니를 떠올리게 되고, 대니가 살아 있는 꿈을 수시로 꾸곤 했다. 1230일 화요일 새벽에도 다르지 않았다. 대니를 낳고도 쇼 댄서로 전전했던 티나는 5년 전 안무가로 전환했다. 그리고 대니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만 달러 예산의 쇼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새로운 쇼의 이름은 <매직!>. 그해 1230일은 <매직!>VIP 시사회가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아들 대니가 살아 있는 심란한 꿈을 꾸던 티나는 집 안에서 나는 정체불명의 큰 소리에 잠이 깨고 만다. 그것은 어쩌면 아들을 잃은 상실감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가던 요즘 <매직!>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걱정하느라 불안감이 커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매직!>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티나가 아들 대니의 방에서 겪었던 이상한 경험은 청소를 도와주는 비비언에게도 이어진다. 멀쩡하던 옷장의 문이 열렸다 닫히는가 하면 손도 대지 않은 장난감이 스스로 움직이고 기온이 떨어진 방은 성에가 끼기도 한다. 그리고 대니의 방 칠판에 누군가 써 놓은 '죽지 않았어!'라는 글씨. 티나는 그것이 이혼한 전 남편 마이클의 짓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집안 전체의 자물쇠를 모두 바꾼 후에도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고 공포에 휩싸인 티나를 돕기 위해 <매직!> 시사회장에서 만났던 엘리엇이 나타난다. 사실 스카우트 캠프를 떠났던 대니는 캠프 버스가 전복되는 바람에 버스에 탔던 전원이 사망하는 참변을 겪게 되었고,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시신의 훼손이 심했던 대니는 시신 확인 절차도 없이 묻히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티나와 마이클은 아들의 사망 원이도 제대로 모른 채 아들의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대니의 방에서 발생한 이상한 일을 겪은 후 티나는 무덤을 열어 대니의 죽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나 변호사인 엘리엇을 향한 누군가의 협박이 이어지고, 대니에게 있었던 죽음의 진실을 찾기 위한 티나와 엘리엇의 분투가 이어지는데...

 

"점차 좁아지는 지역 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차를 몰자 위풍당당한 숲이 그들에게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티나는 그 압도감에 경외심을 느끼는 동시에 불안했다. 이 깊은 산속에 대니와 다른 스카우트 단원들의 죽음에 얽힌 비밀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저 신비하고 불안할 정도로 원시적인 숲은 경외감과 두려움을 자아냈으리라." (p.383)

 

아들 대니를 향한 티나의 헌신적인 사랑과 소시민의 희생쯤이야 눈을 질끈 감고 전개되는 정부의 비밀 프로젝트,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의와 이에 맞서는 소시민의 용기, 그리고 남녀 간의 진실한 사랑 등 어쩌면 한 편의 영화에나 담길 듯한 여러 요소들이 한 권의 소설에 절묘하게 버무려진 이 소설은 작위적인 느낌마저 진하게 풍긴다는 평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들의 사고가 죽음으로 은폐되었던 어두운 진실이 하나 둘 밝혀지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인간의 사랑과 용기 그리고 불의에 숨겨진 인간의 추악한 단면들. 소설은 늘 그렇듯 선과 악의 구도 속에 감춰졌던 진실은 언젠가 꼭 밝혀지고야 만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그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에 우리가 계속하여 빠져들고 몰입하는 까닭은 아마도 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대립을 끝없이 성찰하고 다스리려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내면의 탐욕을 세세히 알지 못하는 게 현실, 현실은 언제나 소설보다 더 잔인하고 공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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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가볍게 넘을 수 없는 힘든 고비 몇 개쯤은 겪게 마련이지만 하나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이번 위기만 무사히 넘기면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말하자면 지금 겪고 있는 이 위기가 인생 전체에서 가장 큰 위기일 것만 같은, 앞으로도 없고 이전에도 없었던 절체절명의 위기쯤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기는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고 그때마다 우리는 '이번 위기만 무사히 넘길 수 있다면' 하면서 그 순간을 이겨나가게 될 것이다. 습관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나쳐 온 위기는 상대적으로 아주 작게 느껴지거나 그 시절이 몹시도 그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코로나19 위기가 해외에서는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지만 국내에서는 바야흐로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불안불안하다. 지금보다 더욱 심각한 코로나19의 확산이 재발한다고 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게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폭탄을 각자의 손에 쥔 채 불안한 평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맥스 포터의 소설 <슬픔은 날개 달린 것>을 읽었다. 160여 페이지의 비교적 얇은 이 소설은 하나의 산문시와 같은 생소하면서도 난해한 형식의 작품이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하나의 느낌이 오롯이 남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물론 읽는 이에 따라 각자 다른 경험을 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하나의 관념으로서의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는 건 멍청한 사람들이나 하는 생각이다. 지각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슬픔이 장기 프로젝트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서두르길 거부한다. 우리가 떠안은 이 고통은 그 속도를 늦추거나 올리거나 바로잡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p.144)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세계적인 대유행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누군가의 엄마였거나, 아빠였거나, 아들이었거나, 딸이었고, 며느리 혹은 사위였을, 혹은 누군가의 할아버지나 할머니였을 그 많은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전염'이라는 강력한 위협에 몸을 웅크린 채 제대로 된 작별 의식도, 슬픔이라는 장기 프로젝트에 대한 제대로 된 애도의 계획도 없이 우리는 그 모든 걸 '다음'으로만 미루고 있다. 달력 한 장을 넘기면 달력 상단에 5월이나 6월이 아닌 '다음'이라는 달이 등장할 것만 같은 작금의 시간 앞에서 우리는 치밀어 오르는 '슬픔'마저 유보해야 한다. 4월이 가면 '다음'이라는 막연한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동체의 불안을 우리는 그저 봄바람에 마음을 씻는 것처럼 요 며칠 거세게 불었던 봄바람에 기대고 있는 건 아닐까. 코로나19의 시간도 그렇게 훌쩍 지나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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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4-24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 님의 잘 정리된 글을 읽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꼼쥐 2020-04-27 17:39   좋아요 0 | URL
칭찬 댓글에 저 역시 기분이 좋아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