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환자
재스퍼 드윗 지음, 서은원 옮김 / 시월이일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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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마치 어느 정신과 의사의 회고록인 양 읽혔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나는 여전히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한 채 그 중간 언저리쯤 어디에선가 방황하고 있다. 독서의 대부분이 문학 서적인, 그중 대다수는 소설에 집중되는 나의 독서 이력에 비추어 볼 때 이런 경험은 결코 자주 있는 일이 아님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책의 스토리가(작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이거나, 소설가로서 작가의 역량이 어떤 독자도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게 할 만큼 뛰어나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테지만 말이다.

 

"내가 엄청난 비밀을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나 자신이 미쳐버린 건지 현재로서는 확신이 서지 않아 이 글을 쓴다. 이런 상태로 계속 정신과 의사로 일한다는 것은, 분명 윤리적으로나 사업적인 관점에서도 좋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맹세컨대 나는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조금이나마 믿어줄 수 있는 여러분에게 이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내게 이 일은 인류에 대한 책임의 문제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p.13)

 

재스퍼 드윗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작가가 이 책의 저자란에 이름을 올렸을 뿐, 작가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정보도, 작가가 쓴 다른 책의 제목도 올라와 있지 않으니 독자로서는 더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작가는 자신이 정신과 의사를 계속해야 할 입장이라며 이 책에 실린 인물의 이름과 장소를 실명이 아닌 가명으로 할 수밖에 없음을 밝히고 있는 마당이니 책을 읽는 독자로서는 머리가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책에 실린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명망 있는 의대를 졸업한 유능하고 전도유망한 예비 정신과 의사인 파커는 선배와 교수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병원 재정이 열악한 코네티컷 주의 주립 정신병원에 자원한다. 변변치 않은 지방 출신이나 갈 만한 그런 병원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약혼녀인 조슬린에 대한 배려 차원이었다. 빼어난 미모에 집안도 좋은 조슬린은 당시에 셰익스피어 연구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고, 파커는 그녀가 논문을 완성하고 졸업할 때까지 가능한 한 가까이 머물고 싶었던 게 코네티컷 주에 있는 병원만 면접을 보게 된 하나의 이유였다.

 

병원에는 병명도 확실하지 않은 장기 입원 환자가 한 명 있었다. 여섯 살 때 병원에 보내져 30년 넘게 수용되어 있는, 본명도 확실치 않아 그저 '조'라고 불리는 남자. 그는 병실에서 나오지도 않고, 집단 치료에도 참여하지 않으며, 의료진과의 정기적인 접촉도 없었다. 게다가 그와 밀접하게 접촉했던 사람들은 모두 미치거나 자살했다는 흉흉한 소문만 떠도는 까닭에 직원들 대부분은 그를 기피했다.

 

"이 글을 읽다 보면 알겠지만, 아직도 나는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누구든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과 씨름한다. 애당초 어머니가 미쳐버린 게 내 잘못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해서 들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자책하는 태도가 이성적이지는 않지만 아이들은, 그리고 유년 시절에 트라우마를 겪은 어른들은 손쓸 도리가 없는 일까지 자기 탓으로 돌리며 행위의 주체를 되찾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p.112)

 

파커가 조에 대한 집착과 호기심을 가지게 된 계기 역시 그가 어렸을 적 망상형 조현병을 앓다가 정신병원에 수용된 후 열악한 환경과 부당한 대우 속에서 세상을 떠난 자신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병원에 구금된 채 방치하다시피 주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조'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은 그로 하여금 '조'에 대한 확실한 병명을 밝히고 반드시 치료할 수 있다는 어떤 확신을 갖게 했다. 그런 확신이 병원장이자 한때는 '조'의 담당 의사이기도 했던 로즈로부터 '조'를 치료해도 좋다는 허락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조'와의 상담이 거듭될수록 '조'의 구금이 단순히 열악한 병원 재정을 타개하기 위한 잘못된 결정이었으며, 기회가 되면 언제든 '조'의 탈출을 적극적으로 도와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지도록 했다.

 

"조의 방에서 누군가 웃고 있었다. 조는 아니었고, 그럴 리도 없었다. 그건 절대로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 대신 음산하고 축축한 목소리로 킥킥대는 웃음이 꼭 썩어가는 목구멍에서 나는 것 같았다. 전에도 들어본 목소리였다. 꿈속에서 어머니가 피와 오줌이 번들거리는 웅덩이로 끌려 들어갈 때 들었던, 바로 그 웃음이었다." (p.156)

 

병원으로부터 '조'를 탈출시키려 했던 파커의 계획은 결국 무산되고 만다. '조'가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비윤리적인 의료진에 의해 30년 넘게 갇혀 있는 거라고 믿었던 파커의 확신은 '조'를 탈출시키려던 그의 계획이 무산된 후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회의감으로 인해 조금씩 허물어졌다. 결국 그는 '조'가 태어난 후 처음으로 정신병원을 찾게 된 원인을 제공한, '조'의 부모님이 살고 있는 대저택을 방문하게 되는데...

 

아침나절 푸지게 쏟아지던 가을 햇살은 오후가 되자 희뿌연 구름 사이로 잦아들었다. 휘발성 강한 휴일 한낮의 시간들이 빠르게 소멸하고 있다.  산다는 게 한 줌 낙엽처럼 덧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고,'나도 가을을 타는 건가?' 하는 쓸쓸함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베란다 창문 밖으로 바람이 그저 나뭇잎의 흔들림을 통한 단순한 몸짓만으로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 환자>의 결말 부분에서 느꼈던 서늘한 공포가 소리도 없는 가을바람을 타고 천천히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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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을 많이 먹는 사람이 오래 산다는 속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백 세 시대를 실감하는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장수하는 사람들뿐이니 그마저도 속설인 듯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전두환이나 이명박 전 대통령처럼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확실히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남에게 나쁜 짓을 하나라도 더 많이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무한정 오래 사는 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공기도 맑고 활동하기에 적정한 온도와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는 요즘, 자신의 건강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산으로 산으로 몰려드는 듯합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시간부터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계절에 상관없이 매일 아침 5시 30분에 집을 나서는 나로서는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맘때의 산길에서 부지런한 등산객을 만나는 일이 그닥 익숙한 풍경은 아니지만 근 일 년째 지속되는 코로나 정국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는 산을 오를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반려견의 배설물을 그냥 방치한 채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도 있고, 조용한 새벽 산길에서 다른 사람들이 옆에 있건 없건 큰 소리로 '야호'를 외치는 사람도 있고, 박수를 치면서 크게 웃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욕을 먹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겠다는 욕심에서 비롯된 행동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서양의 제왕학으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있다면 동양에는 이종오의 <후흑학>이 있다는 문구를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문구를 읽고 혹하여 저 역시 <후흑학>을 서둘러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책 한 권 읽는다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얼굴 뻔뻔한 사람이 될 리는 없겠지만 <후흑학>이라는 책이 있는 줄도 모르는 정치인들은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후흑의 고수인 양 행동할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나저나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신경을 쓰는 사람이 더 건강할까요? 아니면 포커페이스, 후흑의 뻔뻔한 인간들이 더 건강할까요? "욕을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을 떠올리면 후자가 더 오래 살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①욕을 먹기 싫어서 매사에 완벽히 준비하고, 욕을 먹으면 누구보다 마음 아파하는 사람

②꼭 욕을 먹을 일만 골라하면서도, 욕을 먹으면 화를 내고 싫은 티를 내는 사람

③욕먹을 일은 하지도 않았으면서, “죄송합니다!”라는 말부터 먼저 하는 사람

④“삶에서 남의 평판은 중요치 않아!” 욕을 먹든 말든 오불관언하는 사람

 

"욕을 많이 먹는 사람이 오래 산다."는 말은 먼저 세상을 떠난 많은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여 욕을 먹는 사람을 하루라도 더 늦게 만나고 싶어 옥황상제에게 끝없이 청원을 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저승의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는 까닭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이승의 사람들은 그가 하루라도 빨리 세상을 떠나길 바랄 테지만 저승의 사람들은 그와의 대면을 하루라도 더 늦춰보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요. 이승의 삶을 남들보다 더 오래 산다는 건 어쩌면 저승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임을 입증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살 나이를 더할수록 저승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는 인간이 되지는 않을까 지난 삶을 자꾸만 뒤돌아보게 됩니다. 힐끔힐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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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0-11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 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네요.
저는 다른 관점에서 보려 합니다. 오래 사는 건 벌 받을 게 더 남아서라고 보는 거죠.
늙어서도 뉴스에 나오고 욕을 먹는 높은? 분들을 보면 죽을 때를 놓쳤다고 보는 거예요.
편안히 잠들 죽음을 놓치고 아직까지도 받을 벌이 있어서 이승에 오래 남는 거다, 이렇게 보는 거죠. 게다가 치매에 걸려 나중엔 가족에게조차 구박을 받을 처지가 된다면 그게 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라고 생각해 보는 거죠.

생각할 거리를 주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꼼쥐 2020-10-11 16:30   좋아요 0 | URL
페크 님의 말씀에 일견 공감하면서도 사는 게 마치 고통의 연속인 양 느껴져 불안하기도 합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인가요? 제가 아마도 살면서 지은 죄가 많아서 더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편안한 노후를 살 만큼 살다가 잠자듯이 떠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축복이 없을 텐데 말이죠.
 
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 지음, 한기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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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 대한 부담감 없이 책을 읽고 있는 요즘, 신간보다는 지난날 한두 번쯤 읽었던 책들에 더 눈길이 간다. 곰팡내 나는 낡은 책들에 그렇게 정신없이 빠져들다 보면 마치 내가 그 책을 처음 읽었던 과거의 어떤 순간으로 되돌아 가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나는 그때 불안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낡은 책갈피에 부적처럼 찔러두었을지도 모르고, 변하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며 펼쳐 든 책의 낱장 곳곳에 깊은 한숨을 묻혀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노년의 삶을 입안 가득 꾸역꾸역 욱여넣던 내 청춘의 한 페이지를 가만가만 읽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인데,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저릿저릿 슬픔이 밀려오는 건 왜일까?

 

알다시피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쓴 <월든(Walden)>은 월든 호숫가에 본인이 지은 작은 오두막에서 2년 2개월 하고도 이틀을 보낸 경험을 토대로 쓴 에세이인데 인간이 문명과 떨어져 스스로의 삶을 계획하고 개척하면서 깨닫게 되는 자유롭고 인간적인 삶의 아름다움을 진솔하게 쓰고 있다. 현대인에게 <월든>은 마치 동화처럼 읽히는 측면이 있는데 이는 어쩌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 역시 그와 같은 아름다운 삶에 대한 동경을 가슴 가득 품고 있되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의 한 조각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생생한 기록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가 숲 속에 들어간 이유는 신중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생에서 꼭 알아야 할 일을 과연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기 위해서였다. 삶이란 그처럼 소중한 것이기에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았고, 도저히 불가피하기 전에는 체념을 익힐 생각도 없었다. 나는 깊이 있게 살면서 인생의 모든 정수를 뽑아내고 싶었고, 강인하고 엄격하게 삶으로써 삶이 아닌 것은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 (p.135)

 

자신의 인생에서 삶인 것과 삶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마는 우리는 대개 한참이나 지나고 난 후에나 '삶이 아닌 것'을 어렴풋이 깨닫곤 한다. 말하자면 '삶이 아닌 것' 혹은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마치 소중한 삶의 일부인 양 껴안고 살아왔음을 뒤늦은 후회와 함께 깨닫게 되고, 자신의 삶을 가득 채워 온 허섭스레기들을 어쩔 수 없는 삶의 일부로 인정하게 된다. 책에서 소로는 월든 숲속에서 은둔자적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고 종종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고, 친구와 호기심 많은 이웃들이 그의 오두막을 방문하기도 했던 경험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내가 아는 이들 중에서 가장 정신이 온전하고 비뚤어진 생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어제도 내일도 그러하다. 예전에 우리는 산책과 대화를 나누곤 했으며, 그럴 때는 세속의 먼지를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었다. 그는 그 어떤 제도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천진난만한 인간이었으므로.” (p.411)

 

<월든>이 세대를 뛰어넘어 지금까지 널리 읽히는 이유는 비단 이 책이 철학적인 메시지만을 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월든 호수와 숲속의 풍경을 유려한 문체로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계절의 변화를 동물 친구들과 함께 소개함으로써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독자들은 마치 살아 있는 소로를 만나 그와 어깨를 맞대고 월든 호숫가를, 새들이 지저귀는 숲속 오솔길을 걸으며 그 풍경에 흠뻑 취한 듯한 느낌에 벅차오르는 것이다.

 

“날씨는 점점 따뜻해지고 있는데도 호수의 얼음은 눈에 띌 만큼 호숫물에 잠식되지도 않았고 강처럼 조각조각 깨져서 떠내려가지도 않았다. 물가 쪽은 폭 몇 야드 정도가 완전히 녹았음에도 한복판은 벌집 무늬만 생기고 물이 흥건할 뿐이어서 두께가 6인치 정도로 발이 푹 젖었다. 그러다 다음 날 저녁때쯤 따뜻한 비가 내리고 이어서 안개라도 낀다면 얼음은 안개가 걷힐 때쯤 삽시간에 사라져버리고 만다. 마치 안개에 유괴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p.460)

 

사실 <월든>의 숨은 매력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인용하고픈 문장이, 노트에 적어두었다가 언제고 다시 읽고 싶은 문장이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게다가 예전에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을 다시 읽었을 때 실망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반해 <월든>은 언제고 다시 읽어도 그 느낌이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롭다는 점이다.

 

길게 이어지던 추석 연휴도 이제 막바지로 향하고 있다. 아슴아슴 멀어지는 기억들을 나는 <월든> 책갈피에 묻어둔 채 아침나절 동네 앞산을 다녀왔고, 소로가 걸었던 먼 나라의 오솔길을 떠올렸으며, 어깨를 겯고 성숙해지는 가을 풍경에 넋을 놓았다. 삶과 삶이 아닌 어떤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가을 햇살과 함께 쏟아져 내릴 듯한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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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웠던 피부도 나이가 들수록 점점 얇아지는 것인지 조금만 세게 부딪혀도 상처가 나고 멍이 들거나 자주 흉이 지곤 한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상처가 나는 것까지야 어쩔 수 없다 손 치더라도 예전 같으면 쉽게 아물어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질 만한 가벼운 상처조차 예상 밖의 더딘 회복과 회복 후에 남는 볼썽사나운 흉터로 인해 이따금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가뜩이나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에 툭툭 불거진 흉터가 더해지면 그야말로 가관이지 싶어서 하는 말이다.

 

지난여름에 시골에 있는 지인의 집을 방문했다가 텃밭의 가장자리를 따라 쳐놓은 철조망 울타리를 보지 못해 그만 철조망에 바지가 걸려 바지가 찢어졌음은 물론 왼쪽 정강이 쪽에 가벼운 상처를 입고 말았다. 낮게 친 철조망 울타리가 콩잎에 덮여 보이지 않았던 것인데 나는 그것도 모른 채 급히 걷다가 철조망에 걸린 가벼운 사고였다. 아무튼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당한 사고인지라 주인 부부는 미안함에 발을 동동거리며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하였고 나는 대수롭지 않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랬던 게 벌써 두 달 가까이 지나 계절도 바뀌었건만 그때의 상처는 길게 그어진 흉물스러운 흉터로 남아 있다.

 

작은 충격에도 상처를 입고 오래도록 남은 흉터를 지켜보는 건 비단 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시도 때도 없이 듣게 되는 섭섭한 말 한마디에도 꽁한 매듭이 지어지고 마음의 상처가 되어 오래도록 서운한 마음을 품고 지내는 걸 보면 마음도 몸을 닮아가는 듯하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천성이 꽁하고 속이 좁은 사람이라고 오해하기에 딱 알맞은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이가 들수록 세포의 재생 능력이 떨어져 일단 상처가 나면 회복도 더디고 흉터도 오래가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그렇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중년을 지나 한 살 한 살 나이를 더해갈수록 삶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는 까닭에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우리는 제 몸에 오래도록 흉터를 남기기도 하고, 뒤돌아서면 까맣게 잊을 듯한 가벼운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입고 오래도록 꽁 하고 품은 마음의 흉터로 남겨두는 건 삶의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아닐까. 그렇게 몸과 마음의 흉터를 통해 삶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연습은 결국 죽음이라는 가장 큰 흉터를 통해 이승의 기억을 저승의 어느 빈자리에 통째로 옮겨 놓기 위한 예행연습은 아닐까. 나는 오늘도 우수수 흩어지는 가을바람에 가슴 한켠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상처를 입고 지난여름에 몸에 새긴 흉터를 보며 가물가물 잊히는 기억을 가만가만 더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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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9-27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흉터로 남겨두는 건 삶의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한 것.
멋진 해석이십니다. 일리가 있어요.

꼼쥐 2020-10-04 12:33   좋아요 0 | URL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수록 편협하고 속 좁은 인간으로 변해가는 듯합니다. 별것 아닌 사소한 말에도 토라지거나 섭섭해하기 일쑤이고...
 
그럴 땐 바로 토끼시죠 - 하기 싫은 일은 적당히 미루고 좋아하는 일은 마음껏 즐기는 김토끼 묘생의 기술!
지수 지음 / 카멜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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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글을 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그동안 나는 책을 읽고 리뷰를 쓰겠다는 생각도,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의 갈래들을 붙잡겠다는 생각도 없이 되는 대로 무작정 책을 읽거나 떠오르는 상념들을 그저 무심히 흘려보내면서 하루하루를 건너왔던 것인데,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인간관계의 법칙처럼 글을 쓰는 일도 이와 같아서 '글을 쓰는 것도 일종의 습관이구나.' 하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서 내내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더불어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는 어떤 현상으로 인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곡을 만드는 등의 소위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게으른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도 마음 한켠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음을 휘젓는 어떤 현상의 원인을 캐거나 결과에 대해 궁금해하는 등 현상에 대한 일반적인 호기심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는 예술가들에게는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현상으로부터 멀찌기 떨어진 채 떠오르는 그때그때의 주관적인 상념들을 하릴없이 끄적일 뿐이다.

 

읽은 책에 대한 리뷰를 쓰겠다는 생각이 사라지자 단행본에는 눈길조차 가지 않았다. 너무 쉽게 끝나버리는 결말이 다소 싱겁게 느껴지기도 했고, 몇 날 며칠을 두고 길게 이어지던 독서가 마냥 그립기도 했던 까닭이다. 박경리 작가의 <토지>를 다시 읽기 시작했고, 이따금 머리가 무거울 때면 김용 작가의 무협지를 읽기도 했다. 그렇게 나의 독서는 한없이 가벼워지거나 두터웠던 벽이 한순간에 우르르 무너진 듯 체계도 없이 무뎌지고 있었다. 그 사이에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옮아왔고, 아들은 짧았던 여름방학을 마치고 비대면의 2학기 수업을 듣기 시작했으며, 더위가 사라진 아침 등산로에서 나는 더 많은 사람들과 눈인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지수 작가의  에세이 <그럴 땐 바로 토끼시죠>를 펼치면서도 리뷰를 쓰겠다, 미리 작정을 하고 읽었던 건 아니지만 오래간만에 찾은 나의 블로그가 너무 휑뎅그렁한 느낌이 들었던 까닭에 리뷰를 핑계 삼아 뭐라도 끄적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지난가을 밴쿠버에 계신 작가의 엄마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기 전날 '너무 골치 아프게 살지 말고, 하고 싶은 것, 잘 맞는 것을 찾으라고' 전화를 통해 말씀하셨고, 작가는 자신의 첫 책인 이 책을 통해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긴 이야기에 답을 해야만 했었다고 했다.

 

"세상을 살수록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다 보면 예술성이 발현될 여지는 줄어든다. 예술가로 사는 것은 아무리 따져봐도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굳이 시간과 체력을 투자해 공들여 글을 쓴 후, 종이와 나무와 지구 그리고 자신을 마주하기 민망했던 일은 어느 작가에게나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자주, 매우 많이." (p.203)

 

그렇다. 이 책은 김토끼를 그린 지수 작가의 첫 번째 에세이이자 평생을 예술가로 살겠다는 저자의 다짐이기도 하다. STEP 1. '도망칠 준비되셨나요?', STEP 2. '일단 뛰고 보는 거지', STEP 3. '지금 필요한 건, 호흡', STEP 4. '나의 페이스메이커들에게', STEP 5. '발길 닿는 곳 어디든'의 5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소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오지랖으로부터 한 발 물러서 오직 자신만의 보조와 속도로 세상을 살아갈 것을 권하고 있다.

 

"회사만큼 내 시간과 건강에 비싼 값을 쳐주는 곳이 없다고 해도, 나에게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곳에 언제까지고 머물 수는 없는 일이다. 한 번뿐인 인생, 한정된 시간과 체력을 최대한 의미 있는 곳에 쓰는 것이 '돈 벌려면 치사해도 참고 사는 거야'라는 말보다 나에게는 더 당연하니까." (p.125)

 

하늘이 점점 드높아지고 있다. 계절이 깊어갈수록 그에 따라 세상도 더욱 투명해져야 하는데 사는 날을 늘려갈수록 세상은 점점 더 모르는 곳이 되어 가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단절된 삶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막연한 상황도 모든 게 남의 일처럼 무덤덤해지는 요즘, 한 권의 책을 읽으면 으레 그에 상응하는 한 편의 리뷰를 써야만 했던 얼마 지나지 않은 나의 과거가 새삼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무작정 책을 읽고, 휑뎅그렁한 풍경을 지우기 위해 한 편의 리뷰를 쓰고 있다. 무심한 시간이 무덤덤한 일상을 쓰레기처럼 던져 놓는다. 하루가 어찌 흐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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