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 지음, 한기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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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 대한 부담감 없이 책을 읽고 있는 요즘, 신간보다는 지난날 한두 번쯤 읽었던 책들에 더 눈길이 간다. 곰팡내 나는 낡은 책들에 그렇게 정신없이 빠져들다 보면 마치 내가 그 책을 처음 읽었던 과거의 어떤 순간으로 되돌아 가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나는 그때 불안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낡은 책갈피에 부적처럼 찔러두었을지도 모르고, 변하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며 펼쳐 든 책의 낱장 곳곳에 깊은 한숨을 묻혀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노년의 삶을 입안 가득 꾸역꾸역 욱여넣던 내 청춘의 한 페이지를 가만가만 읽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인데,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저릿저릿 슬픔이 밀려오는 건 왜일까?

 

알다시피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쓴 <월든(Walden)>은 월든 호숫가에 본인이 지은 작은 오두막에서 2년 2개월 하고도 이틀을 보낸 경험을 토대로 쓴 에세이인데 인간이 문명과 떨어져 스스로의 삶을 계획하고 개척하면서 깨닫게 되는 자유롭고 인간적인 삶의 아름다움을 진솔하게 쓰고 있다. 현대인에게 <월든>은 마치 동화처럼 읽히는 측면이 있는데 이는 어쩌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 역시 그와 같은 아름다운 삶에 대한 동경을 가슴 가득 품고 있되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의 한 조각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생생한 기록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가 숲 속에 들어간 이유는 신중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생에서 꼭 알아야 할 일을 과연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기 위해서였다. 삶이란 그처럼 소중한 것이기에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았고, 도저히 불가피하기 전에는 체념을 익힐 생각도 없었다. 나는 깊이 있게 살면서 인생의 모든 정수를 뽑아내고 싶었고, 강인하고 엄격하게 삶으로써 삶이 아닌 것은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 (p.135)

 

자신의 인생에서 삶인 것과 삶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마는 우리는 대개 한참이나 지나고 난 후에나 '삶이 아닌 것'을 어렴풋이 깨닫곤 한다. 말하자면 '삶이 아닌 것' 혹은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마치 소중한 삶의 일부인 양 껴안고 살아왔음을 뒤늦은 후회와 함께 깨닫게 되고, 자신의 삶을 가득 채워 온 허섭스레기들을 어쩔 수 없는 삶의 일부로 인정하게 된다. 책에서 소로는 월든 숲속에서 은둔자적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고 종종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고, 친구와 호기심 많은 이웃들이 그의 오두막을 방문하기도 했던 경험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내가 아는 이들 중에서 가장 정신이 온전하고 비뚤어진 생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어제도 내일도 그러하다. 예전에 우리는 산책과 대화를 나누곤 했으며, 그럴 때는 세속의 먼지를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었다. 그는 그 어떤 제도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천진난만한 인간이었으므로.” (p.411)

 

<월든>이 세대를 뛰어넘어 지금까지 널리 읽히는 이유는 비단 이 책이 철학적인 메시지만을 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월든 호수와 숲속의 풍경을 유려한 문체로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계절의 변화를 동물 친구들과 함께 소개함으로써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독자들은 마치 살아 있는 소로를 만나 그와 어깨를 맞대고 월든 호숫가를, 새들이 지저귀는 숲속 오솔길을 걸으며 그 풍경에 흠뻑 취한 듯한 느낌에 벅차오르는 것이다.

 

“날씨는 점점 따뜻해지고 있는데도 호수의 얼음은 눈에 띌 만큼 호숫물에 잠식되지도 않았고 강처럼 조각조각 깨져서 떠내려가지도 않았다. 물가 쪽은 폭 몇 야드 정도가 완전히 녹았음에도 한복판은 벌집 무늬만 생기고 물이 흥건할 뿐이어서 두께가 6인치 정도로 발이 푹 젖었다. 그러다 다음 날 저녁때쯤 따뜻한 비가 내리고 이어서 안개라도 낀다면 얼음은 안개가 걷힐 때쯤 삽시간에 사라져버리고 만다. 마치 안개에 유괴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p.460)

 

사실 <월든>의 숨은 매력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인용하고픈 문장이, 노트에 적어두었다가 언제고 다시 읽고 싶은 문장이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게다가 예전에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을 다시 읽었을 때 실망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반해 <월든>은 언제고 다시 읽어도 그 느낌이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롭다는 점이다.

 

길게 이어지던 추석 연휴도 이제 막바지로 향하고 있다. 아슴아슴 멀어지는 기억들을 나는 <월든> 책갈피에 묻어둔 채 아침나절 동네 앞산을 다녀왔고, 소로가 걸었던 먼 나라의 오솔길을 떠올렸으며, 어깨를 겯고 성숙해지는 가을 풍경에 넋을 놓았다. 삶과 삶이 아닌 어떤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가을 햇살과 함께 쏟아져 내릴 듯한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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