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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환자
재스퍼 드윗 지음, 서은원 옮김 / 시월이일 / 2020년 8월
평점 :
소설은 마치 어느 정신과 의사의 회고록인 양 읽혔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나는 여전히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한 채 그 중간 언저리쯤 어디에선가 방황하고 있다. 독서의 대부분이 문학 서적인, 그중 대다수는 소설에 집중되는 나의 독서 이력에 비추어 볼 때 이런 경험은 결코 자주 있는 일이 아님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책의 스토리가(작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이거나, 소설가로서 작가의 역량이 어떤 독자도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게 할 만큼 뛰어나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테지만 말이다.
"내가 엄청난 비밀을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나 자신이 미쳐버린 건지 현재로서는 확신이 서지 않아 이 글을 쓴다. 이런 상태로 계속 정신과 의사로 일한다는 것은, 분명 윤리적으로나 사업적인 관점에서도 좋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맹세컨대 나는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조금이나마 믿어줄 수 있는 여러분에게 이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내게 이 일은 인류에 대한 책임의 문제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p.13)
재스퍼 드윗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작가가 이 책의 저자란에 이름을 올렸을 뿐, 작가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정보도, 작가가 쓴 다른 책의 제목도 올라와 있지 않으니 독자로서는 더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작가는 자신이 정신과 의사를 계속해야 할 입장이라며 이 책에 실린 인물의 이름과 장소를 실명이 아닌 가명으로 할 수밖에 없음을 밝히고 있는 마당이니 책을 읽는 독자로서는 머리가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책에 실린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명망 있는 의대를 졸업한 유능하고 전도유망한 예비 정신과 의사인 파커는 선배와 교수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병원 재정이 열악한 코네티컷 주의 주립 정신병원에 자원한다. 변변치 않은 지방 출신이나 갈 만한 그런 병원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약혼녀인 조슬린에 대한 배려 차원이었다. 빼어난 미모에 집안도 좋은 조슬린은 당시에 셰익스피어 연구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고, 파커는 그녀가 논문을 완성하고 졸업할 때까지 가능한 한 가까이 머물고 싶었던 게 코네티컷 주에 있는 병원만 면접을 보게 된 하나의 이유였다.
병원에는 병명도 확실하지 않은 장기 입원 환자가 한 명 있었다. 여섯 살 때 병원에 보내져 30년 넘게 수용되어 있는, 본명도 확실치 않아 그저 '조'라고 불리는 남자. 그는 병실에서 나오지도 않고, 집단 치료에도 참여하지 않으며, 의료진과의 정기적인 접촉도 없었다. 게다가 그와 밀접하게 접촉했던 사람들은 모두 미치거나 자살했다는 흉흉한 소문만 떠도는 까닭에 직원들 대부분은 그를 기피했다.
"이 글을 읽다 보면 알겠지만, 아직도 나는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누구든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과 씨름한다. 애당초 어머니가 미쳐버린 게 내 잘못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해서 들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자책하는 태도가 이성적이지는 않지만 아이들은, 그리고 유년 시절에 트라우마를 겪은 어른들은 손쓸 도리가 없는 일까지 자기 탓으로 돌리며 행위의 주체를 되찾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p.112)
파커가 조에 대한 집착과 호기심을 가지게 된 계기 역시 그가 어렸을 적 망상형 조현병을 앓다가 정신병원에 수용된 후 열악한 환경과 부당한 대우 속에서 세상을 떠난 자신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병원에 구금된 채 방치하다시피 주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조'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은 그로 하여금 '조'에 대한 확실한 병명을 밝히고 반드시 치료할 수 있다는 어떤 확신을 갖게 했다. 그런 확신이 병원장이자 한때는 '조'의 담당 의사이기도 했던 로즈로부터 '조'를 치료해도 좋다는 허락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조'와의 상담이 거듭될수록 '조'의 구금이 단순히 열악한 병원 재정을 타개하기 위한 잘못된 결정이었으며, 기회가 되면 언제든 '조'의 탈출을 적극적으로 도와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지도록 했다.
"조의 방에서 누군가 웃고 있었다. 조는 아니었고, 그럴 리도 없었다. 그건 절대로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 대신 음산하고 축축한 목소리로 킥킥대는 웃음이 꼭 썩어가는 목구멍에서 나는 것 같았다. 전에도 들어본 목소리였다. 꿈속에서 어머니가 피와 오줌이 번들거리는 웅덩이로 끌려 들어갈 때 들었던, 바로 그 웃음이었다." (p.156)
병원으로부터 '조'를 탈출시키려 했던 파커의 계획은 결국 무산되고 만다. '조'가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비윤리적인 의료진에 의해 30년 넘게 갇혀 있는 거라고 믿었던 파커의 확신은 '조'를 탈출시키려던 그의 계획이 무산된 후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회의감으로 인해 조금씩 허물어졌다. 결국 그는 '조'가 태어난 후 처음으로 정신병원을 찾게 된 원인을 제공한, '조'의 부모님이 살고 있는 대저택을 방문하게 되는데...
아침나절 푸지게 쏟아지던 가을 햇살은 오후가 되자 희뿌연 구름 사이로 잦아들었다. 휘발성 강한 휴일 한낮의 시간들이 빠르게 소멸하고 있다. 산다는 게 한 줌 낙엽처럼 덧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고,'나도 가을을 타는 건가?' 하는 쓸쓸함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베란다 창문 밖으로 바람이 그저 나뭇잎의 흔들림을 통한 단순한 몸짓만으로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 환자>의 결말 부분에서 느꼈던 서늘한 공포가 소리도 없는 가을바람을 타고 천천히 밀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