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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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집을 좋아한다. 콕 집어 좋아할 만한 뚜렷한 이유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시인 특유의 섬세함과 글에 담긴 웅숭깊은 사유가 어쩌면 우둔한 나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시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나로서는 시보다는 산문집이 오히려 읽기에도 편하고 낯설지 않아서 좋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지나친 허세가 발동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시인이 아닌 일반 에세이스트의 글을 하찮게 여기거나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이걸 글이라고 썼나? 내용도 빈약하고 표현도 거칠고...' 하는 식의 박한 평을 늘어놓는 것이다. 물론 남들 들으라고 입 밖으로 내는 경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책을 쓴 당사자는 허투루 한 나의 말에 몹시도 귀가 가렵지 않았을까.

 

"방법적 꿈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갖고 있지 않고, 따라서 기억도 상처도 못 이룰 희망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그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향기로운 사탕발림 속에서 내가 공상으로 절여두었던 맛있는 것들을 한 입씩 꺼내 먹는다. 그렇게, 과거를 가진 기억과 시간 밖에 존재하는 방법적 비몽사몽 사이에서 나의 정신은 진자운동을 거듭한다."  (p.21)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역시 제목에 섞인 '시인'이라는 두 글자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살아,/기다리는 것이다./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라고 썼던 시인의 시구와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는 몇몇 시구들이 마치 오래된 어느 궁궐의 조각난 기왓장처럼 내 기억의 발길에 차여 뒹굴 뿐 시인에 대한 존경이나 독자로서의 팬심이 나를 사로잡았던 건 아니다. 인연이란 그저 시간의 벌판에서 마주치는 하나의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나는 이 고독이라는 어휘와 그것이 뒤에 후광처럼 거느리고 있는 어떤  분위기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독을 연기해보고 싶었다. 아니 이런 말이 있을 수 있다면, 나는 고독을 실행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하여 내 유년기 최초의 고독 연습이 시작되었다."  (p.106)

 

거친 피부와 광대뼈가 불쑥 솟은 시인의 얼굴은 신산스러웠을 어떤 삶과 연결 지어지곤 한다. 그것이 꼭 시인 자신의 삶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런 얼굴이 갖는 이미지는 어쩌면 고독, 죽음, 우울, 가난, 지병 등 온갖 부정적인 단어들과 연결된 채 더 이상 근접할 수 없는 어떤 거리감을 유지하게 한다. 온갖 어두운 그늘이 얼굴 전체에 덕지덕지 붙은 누군가를 바라보면 볼수록 나 역시 질긴 삶의  악연에 손목을 낚아채일 것 같은 느낌. 시인에게선 그런 불길한 징후가 풍기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시인이 알고 있는 삶의 이면을 반드시 알아내야만 할 것 같은 어떤 책임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카발라가 유대 신비주의라면 수피즘은 이슬람 신비주의인데, 수피즘은 이론보다는 주로 시와 우화를 통해서 가르치지. 재미있는 것은 모든 신비 체계에는 죽음의 주제가 나오는데, 그건 바로 재탄생 혹은 부활의 주제라고 할 수 있지. 죽지 않으면 재탄생, 부활이 가능하지 않으니까. 그러네 그 경우 죽음이란 우리가 두려워 마지않는 물질적, 육체적 죽음의 극복을 뜻하고, 그건 달리 말하자면 죽음이란 없음을 깨닫는 것을 뜻하지. 육체적 죽음이 마지막 목적지로 정해져 있는 인생 프로그램에서 죽음이란 없음을 뜻하는 것, 즉 '죽음'의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모든 신비 체계의 클라이맥스이고, 연금술에서 말하는 현자의 돌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p.168~p.169)

 

시인은 에둘러 말하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신이 쓰는 산문집의 모든 글을 에둘러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시에서 잘 드러나지 않던 시인의 본모습은 산문에서 더 뚜렷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독자들에게 자신의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낸다는 건 시인에게도, 우리와 같은 장삼이사에게도 불편하고 꺼려지는 일임에 분명하다. 시인이 산문집의 출간을 꺼리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본업이 아니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독자들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감추고 싶은 시인의 속내를 끝내 들추어내고 만다. 시인의 기억 속에서 '기억의 병균들'을 끝도 없이 끌어올려 현재라는 도마 위에서 무참히 난도질하는 풍경은 차마 볼 수가 없다. 시인의 산문집을 사랑하는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죄책감을 느낀다.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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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격이 높아지고 민주주의 선도 국가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촛불 혁명 이후가 아닐까 싶다. 그런 측면에서 현 정부는 높아진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한국인의 문화적 역량과 친절한 국민성 및 수준 높은 공동체 의식을 세계만방에 알릴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결과물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과거 대한민국의 국민의 공동체 의식이라는 게 아주 보잘것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면서 하는 한 줄 서기는 끼어들기와 편법으로 무너지기 일쑤였고, 시내버스는 물론 고속버스와 시외버스에서도 자유롭게 담배를 피우는가 하면 뒷사람은 생각도 않고 과도하게 의자를 눕히는 일도 빈번하였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열차 안에서도 흡연에 대한 제재는 일체 없었다. 술집은 물론 식당과 커피숍에서도 흡연은 지극히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비좁고 환기가 용이하지 않은 공공 화장실과 같은 곳에서는 담배 연기로 가득 찬 '너구리 굴'이 되는 게 일상이었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흡연자들의 천국이었다.


그러나 흡연에 대한 규제가 시작되면서 거의 모든 게 달라졌다. 담배를 물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이도 많이 줄었고, 아파트를 비롯한 식당이나 커피숍 등 실내에서의 흡연도 완전히(?) 사라졌으며, 지하철 안에서의 '쩍벌'이나 고속버스 좌석의 과도한 눕힘도 보기 힘들어졌다.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 것이 서로에 대한 배려이자 우리 사회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걸 국민 대다수가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흡연자의 권리가 그만큼 축소된 것도 사실이고 그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없다는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말이다.


높아진 시민의식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역행하려는 자는 어느 곳에서도 있게 마련, 내가 사는 아파트인데 담배 좀 피운다고 뭐가 잘못됐냐? 따지는 이도 있고, 지하철에서의 '쩍벌' 행위 및 흡연 등 반사회적 행위도 서슴지 않는 사회 부적응자들을 종종 목격하게도 된다. 물론 인터뷰 도중의 도리도리는 반사회적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무궁화호 열차 안에서 맞은편 의자에 구둣발을 올린 이가 지금도 존재한다면 그는 사회 부적응자 혹은 작금의 대한민국 시민의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구시대적 인물임에 분명하다. 한마디로 '진상' 승객인 셈이다. 아무리 제 돈을 내고 승차한 승객이라 할지라도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런 손님이 있을 수 있겠어? 의아해하는 분이 있겠지만 진짜로 있다. 그것도 제1야당의 대선 후보란다. 믿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렇듯 대선을 기회로 양분된 대한민국을 경험하고 있다. 평생 동안 대접만 받으며 귀족처럼 살았던 '쭉뻗족'과 달라진 시민의식을 하루도 잊지 않는 평범한 시민들. 그들에게 과연 공동체 의식이란 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지 물어볼 수는 없지만 공동체 의식을 강요하기에는 예순이 넘은 그의 나이가 왠지 걸린다. 공중도덕을 가르치고 그것을 하나하나 연습하도록 하기엔 너무 늦은 게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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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차 방앗간의 편지
알퐁스 도데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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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나 우화처럼 담백하고 꾸밈이 없는 글을 쓴다는 건 오히려 어렵다. 더구나 길이에 제한이 있는 짧은 글을 통해 글쓴이의 의도를 독자들에게 정확히 전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쉽고 담백한 글을 쓰는 작가에 대한 독자의 찬사와 경탄은 찾아보기 어렵다. 찬사는 고사하고 무시와 조롱이 뒤따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쉽게 읽히는 글일수록 작가의 더 많은 피와 땀이 요구된다는 걸 독자들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뭔 뜻인지 이해도 되지 않는 현학적인 글을 천의무봉의 완벽한 글인 양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는지 나는 이따금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그랭구아르, 이건 자네와 나, 우리 둘만의 속내 이야기인데, 까만 털의 젊은 수컷 영양이 여복이 있었던지 블랑케트의 마음에 든 모양이야. 두 연인은 한두 시간 동안 숲에서 쏘다녔어. 녀석들이 무슨 말을 속삭였는지 알고 싶거든 이끼 밑에 숨어서 졸졸 흐르고 있는 수다쟁이 샘물에게 물어보게."  (p.45 '스갱 씨의 염소' 중에서)


알퐁스 도데의 단편 소설집 <풍차 방앗간의 편지>는 「레벤망」지와 「르피가로」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출판한 책으로, 책에 실린 단편 소설들은 대부분 알퐁스 도데의 고향인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을 배경으로 씌었다. 프로방스의 날씨, 풍경, 전설 등을 소재로 하여 작가 특유의 따뜻한 시선이 가미된 아름다운 작품은 읽는 이들의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의 소설은 동정심이 많은 인간성과 사물 및 개인의 신비에 대한 외경심도 포함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은 모파상이나 찰스 디킨스와도 유사점이 있다고 평가된다.


"나는 프로방스 농부들이 이야기할 때 곁들이는 멋진 지방 속담이나 대중적인 속담 혹은 격언 중에서 이보다 더 생생하고 독특한 속담은 들어보지 못했다. 나의 풍차 방앗간에서 60킬로미터 이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앙심을 품고 복수를 벼르고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할 때 이렇게 내뱉는다. "저 사람! 조심들 하게! 7년 동안이나 뒷발질을 벼르고 별렀던 교황의 노새 같은 사람이니까!" 나는 도대체 이 속담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교황의 노새가 어떤 것이며, 또 7년 동안이나 참았다는 뒷발질이 무슨 뜻인지 알아내려고 꽤 오랫동안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며 수소문했다."  (p.68 '교황의 노새' 중에서)


작품 중에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시골의 풍경이 변하게 되고 농경사회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며 지켜오던 전통이나 풍습이 파괴되고 급기야 농촌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한 지중해 연안 지방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작품도 있다. 이는 증기 제분 공장이 들어서면서 일거리를 잃게 된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로 대표된다. 뿐만 아니라 <메뚜기 떼>처럼 작가의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사실에 기반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세관원>, <황금 두뇌를 가진 사내의 전설> 등 비극적인 내용의 작품도 있다.


"경제적 고통과 오랜 지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을 끈기 있게 극복해 가면서 창작 생활에 온 힘을 기울인 도대의 모든 작품에는 소외된 인간들에 대한 따뜻한 인간애, 현실에 대한 씁쓸하고도 냉정한 인식, 당시 프랑스 사회에 대한 예리한 풍속 묘사 등 생생한 감동이 녹아 있다."  (p.292 '역자 후기' 중에서)


알퐁스 도데의 작품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평생 종지기로 살면서 아름다운 동화를 남긴 아동 문학가 권정생 선생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지병과 가난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맑은 눈을 잃지 않았기에 도데의 작품 속에서도, 권정생 작가의 작품 속에서도 순수함에 깃든 푸른 감동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평생을 고위 공직자로 살면서 단 한 번도 가난한 자의 편에 서지 않았던 자가 표를 위해서라면 서민의 대변자인 양 잘도 꾸며대는 작금의 세상에서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성 회복, 바로 그것이 아닐까. 알퐁스 도데의 <풍차 방앗간의 편지>를 읽는다는 건 누군가를 향해 보복의 정치를 꿈꾸는 이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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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아침. 그렇지만 이렇듯 조용한 시간에 우리는 저마다의 삶이 우리를 사박스럽게 몰아붙이고 있음을 처연히 깨닫는다. 바쁘고 정신없었을 때는 모른 척 지나쳤을 것들도 조용한 오전의 균질한 침묵 속에서만큼은 예외가 된다. 햇살 속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먼지처럼 나의 실존은 침묵 속에서 가려지는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거울을 보듯 추레한 나의 삶을 바라보는 일은 결코 즐겁지 않다. 즐겁기는커녕 꽤나 불쾌한 일이다. 그러므로 삶에 있어서 침묵의 시간을 가급적 줄이는 게 불행을 막는 제 일의 법칙이라고 나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더구나 자신의 삶을 소재로 글을 쓴다는 건 섶을 지고 불행의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아서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부지불식간에 하는 낙서조차 금할 일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두 가지 일을 병행하며 자발적 불행을 향해 전속력으로 치닫고 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대선 후보들의 행보가 매 시간 속속들이 보도되고 있다. 제1야당의 대선 후보에 대한 소식은 언제나 술과 뒤섞이는 경우가 많다. 체질상 술을 한 잔도 마시지 못하는 나로서는 매일 폭탄주를 마셔대는 그의 일상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몸이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알코올을 매일 쏟아 부음으로써 불행을 감지하는 뇌세포를 철저히 박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산당을 없앤다는 '멸콩' 놀이를 할 게 아니라 뇌세포를 없애는 '멸뇌' 놀이를 하는 게 격에 맞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아무튼. 언젠가 그의 뇌는 행복을 감지하는 뇌세포마저 모두 사라질 테지만 적어도 그전까지 그는 어린아이처럼 마냥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그가 자연인 윤 모 씨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는 현재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라는 사실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정말 대한민국의 국운이 다하여 그가 정말 대통령이라도 된다면 우리의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과하게 우려도 하고 걱정도 하는 것이다. 뇌세포가 부족하여 정상인보다 판단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그래서 사사건건 누군가에게(주로 무속인일 테지만) 그 판단을 미루는 일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그 후보에게 투표했던 자신의 손가락을 두 눈 질끈 감고 부러뜨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우려를 반영한 듯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해외 언론(물론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대부분이지만) 중 우리나라의 정치에 관심이 있는 언론은 제1야당의 대선 후보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듯하다. 일본의 언론은 크게 다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대다수 언론이 제1야당의 대선 후보에 대해 무척이나 긍정적인 보도를 연일 쏟아내는 건 다소 의외라는 반응이다. 그러나 언론, 특히 주류 언론이 그럴 수밖에 없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언론사가 누렸던 과도한 혜택과 기자라는 특수한 신분의 명예와 특권이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일말의 위기의식이 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현상은 종교계에서도 나타난다. 성직자로서 갖는 각종 혜택과 지위가 땅으로 떨어진 요즘, 과거에 대한 향수는 그들로 하여금 복권 내지 과거로의 회귀를 도와줄 인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개신교뿐만 아니라 불교계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심심찮게 나타난다. 얼마 전에 있었던 승려대회 역시 그러한 맥락의 연장선이 아닌가 싶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개신교에서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만 말이다. 이러한 속셈은 진보를 주창하던 군소 언론사도 다르지 않다. 변절자 소리를 듣더라도 자신들부터 살고 봐야겠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백 투 더 퓨쳐(Back to the future)'가 아니라 '백 투 더 패스트(Back to the past)'를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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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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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의 밑바탕에는 말할 수 없이 깊은 공허가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종종 간과하곤 한다. 이를테면 저따위를 해서 뭘 하나? 하는 심리는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행동을 가로막고 종국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한다. 무기력은 아마도 벗어나기 힘든 늪이나 수렁과 같아서 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벗어나기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기력의 늪에 빠진 누군가를 구조할 때 우리들 대부분은 그저 늪의 주변만 빙빙 맴돌면서 왜 빠져나오지 않느냐는 타박만 늘어놓을 뿐 묵묵히 도움의 손길을 내밀거나 최선을 다해 구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이는 찾기 어렵다.

 

"나는 쾌감이 전혀 없지도 않은 채 그냥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결국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무엇이나 다 어디엔가로 인도하게 마련이다. 오직 그것에만 아무런 출구가 없었다. 설사 그 상태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삶 자체가 어찌나 죽음과 흡사한 것이었는지 그 차이를 분간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동물도 죽을 때는 본능적으로 경련하는 법이라지만."  (p.30)

 

알베르 카뮈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장 그르니에의 수필집 『섬』은 일반 독자들보다는 작가들에게 더 인기가 있는 책일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추론은 대개 작가들의 추천 도서 목록에 오르는 횟수에서 기인한다. 말하자면 일반 독자들이 『섬』에 대해 자신의 블로그에서 리뷰를 쓰거나 『섬』을 자신이 추천하는 도서로 지인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장 그리니에의 『섬』이 갖는 특성, 이를테면 작가의 깊은 사색과 정제된 문장에서 오는 생각할 거리가 일반 독자들보다는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작가들에게 훨씬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긴 하지요. 그렇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할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 이외에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마음속에서 모든 순간들과 모든 존재들을 하나로 합쳐주는 것입니다."  (p.64)

 

프랑스 알제 대학교의 철학교수를 지내면서 많은 명상적인 에세이를 남겼던 장 그르니에. 『섬』이 세계적인 문호 알베르 카뮈에게 영감을 주고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처럼 다른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고 앞으로도 꾸준히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책을 읽어오며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결론이라는 게 사실 어떤 객관적 근거에 기반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나의 추측에 불과한 것이지만 말이다. 결론인 즉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 『섬』에 실린 글의 대부분이 특정한 목적을 갖고 쓰지 않았던 것은 물론 오랜 시간을 두고 쓰고 또 고치면서 각고의 노력으로 완성한 게 아니라 글의 윤곽이 떠오른 어느 날 단숨에 써내려갔을 것이라는 추측, 바로 그것이었다. 누군가에게 큰 감동을 주는 글은 하루에 한두 문장씩 긴 시간의 사투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진 사색의 결과를 일필휘지로 단숨에 써내려가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저 형언할 길 없는 과거의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나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맹목적이고 엄청난 힘들로부터 헤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인식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무(無)에 대한 섬뜩함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정신적인 생활을 하게 된 셈이지만 그것은 실상은 거꾸로 된 정신적 생활이었다. 저 성벽처럼 쌓인 책들 속에는 얼마나 대단한 매혹이 깃들여 있었던가! 그러나 도서관 밖을 나설 때면 머리가 아팠고 마음은 더욱 메말라가는 듯 느껴졌다."  (p.120~p.121)

 

고백하자면 나 역시 사색의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 중 한 명인 까닭에 200쪽도 되지 않는 이 책을 그저 눈으로만 서너 차례 읽었을 뿐 가슴으로 읽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책에 대한 느낌이나 어설픈 리뷰를 써보자 결심했던 것도 최근의 일이고 보니 책에서 장 그르니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더더욱 아니어서 리뷰를 쓰면서도 핵심에는 접근하지 못한 채 그저 겉도는 이야기만 쓸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관찰하는 대상을 멀찌기서 바라볼 뿐 자신만의 잣대로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들지 않는 점은 그르니에로부터 배웠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그것이 내가 여전히 미숙한 독자임을 밝히는 꼴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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