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푸른 상흔 프랑수아즈 사강 리커버 개정판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권지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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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빚어내는 은유는 그때마다 대상이 되는 인간에게 어떤 깨달음을 안겨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영혼의 성숙도에 조금의 흔적을 남기는 건 사실이지 않을까 싶다. 열아홉이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엄청난 성공과 폭발적인 인기를 거머쥐었던 프랑수아즈 사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삶에는 공짜가 없다는 사실과 함께 말이다. 그래서인지 작가 사강은 그녀의 초기작이었던 <스웨덴의 성>에 등장했던 두 인물을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그녀 나이 서른일곱 살에 다시 소환한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두 인물의 서사를 써 내려가는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도 함께 적는다. 일기처럼 혹은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문처럼.

 

"사실 내가 섬기는 유일한 우상, 유일한 신은 시간이다. 오직 시간만이 나에게 심오한 기쁨과 고통을 줄 수 있다. 이 포플러가 나보다 더 오래 살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대신 이 건초는 나보다 먼저 시들겠지. 나는 집에서 사람들이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나무 밑에서 한 시간 정도는 거뜬히 머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서두르는 것은 굼뜬 것만큼 어리석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삶도 마찬가지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이 과학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단지 운 좋은 순간일 뿐이라는 것을. 나로서는 그것만이 진짜다."  (p.42)

 

소설에 등장하는 세바스티앵과 엘레오노르 남매는 사강과 비슷한 또래의 스웨덴 출신 이민자이다. 무일푼이었던 그들은 대도시인 파리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특별한 재능이나 직업이 없었던 그들로서는 그것마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자신들의 젊음과 몸이 재산이었던 까닭에 그들이 가진 재산을 후하게 평가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인물을 찾아 끝없이 부유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자신들의 유일한 재산인 육체의 젊음은 서서히 시들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빼앗아가는 것은 뭔가 약하고 소중한 것, 기독교인들이(무신론자들은 다른 말을 사용한다)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영혼을 잘 돌보지 않으면 어느 날 숨이 턱에 차 은총을 구하는 영혼의 상흔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상흔은, 분명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p.139)

 

사강은 세바스티앵과 엘레오노르 남매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한편 작가로서의 현실적인 고뇌, 독자에 대한 진심, 페미니즘의 문제 등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한 견해를 소설 중간중간에 펼쳐 놓는다. 말하자면 이 책은 작가가 쓰는 허구의 소설과 현실에서의 작가 자신의 생각이 교차하는 '소설 에세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는 소설을 쓰던 당시의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예컨대 소설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어떤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작가가 창조한 인물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는지 등 출간 후 기자들과의 인터뷰 자리에서나 겨우 들었을 듯한 이야기들을 같은 책에서 실시간으로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소설이면 소설, 에세이면 에세이가 한 권의 책으로 엮이는 보편적인 구성과 비교할 때 흐름이 끊기고 가독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로베르 베시는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남아 있던 알약을, 그것도 어렵게 삼켰다. 우연히도 양은 딱 죽을 만큼이었다. 가끔 추리소설에 나오는 표현처럼 그는 자기 자신과 부딪혔다. 삶에 부딪히고 그 삶을 넘어가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꽤 시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승마장에서 멋지고 혈기 왕성한 말이 울타리에 부딪힐 때가 있다. 그때 아예 일어나지 못하거나 일어났더라도 힘겨워하면 수의사가 끝을 내준다. 로베르 베시는 멋지지도 않았고 혈기 왕성하지도 않았으며 수의사도 없었던 셈이다."  (p.171)

 

<슬픔이여 안녕>을 읽어 본 독자라면 느끼겠지만 이 책의 곳곳에서 우리는 조금 더 성숙해진 사강의 면면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그녀의 삶을 관통했던 '솔직함'에 대한 성숙일 수도 있겠다. 어린 시절의 날 선 '솔직함'이 아니라 다른 어느 누구의 삶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부드러운 느낌의 '솔직함'이 문장 곳곳에서 감지된다. 그것은 이른 나이의 부와 성공으로 인해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마약, 사랑, 알코올 등 온갖 유혹에 대한 작가 자신의 경험담인 동시에 '마음에 들어가는 푸른 멍을 외면하는 모두에게' 드리는 경고인 셈이다. 우리는 어쩌면 마음에 들어가는 푸른 멍은 외면한 채 서로에게 형식적인 인사만 건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상흔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한낮 기온이 초여름처럼 높다. 느슨해진 더위를 배경으로 사람들은 흐드러진 벚꽃 거리를 걷는다. 오늘이라는 시간이 초조하게 흐르는 오후의 어느 순간. 영혼에 든 푸른 멍이 하얀 벚꽃에 가려져 봄날처럼 화려하게 빛난다. 행복을 가장한 완성체의 영혼이 봄꽃 흐드러진 거리를 누비고 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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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 봄.

매일 아침 오르는 산에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다. 가지마다 연녹색 새순이 돋고 다소곳한 진달래도 꽃을 피웠다. 숲은 나름의 질서 속에 오가는 계절을 준비하곤 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산 주변은 온통 새로 들어선 아파트로 빼곡하다. 그렇게 아파트 건설이 한창이었던 몇 년 동안 숲과 그것에 기대어 살던 동물들이 수난을 겪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소리에 민감한 뱀들이 제일 먼저 자취를 감추었고, 겨울철이면 먹이를 찾아 산 아래쪽을 향해 겅중겅중 뛰던 고라니도 보이지 않고, 이따금 나타나 나의 아침 산행길에 동무가 되어주던 너구리도 찾을 길 없고, 흔하디 흔하던 청설모도 모두 사라졌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숲의 어둠을 몇몇 산새들이 겨우 생명의 기척을 내고 있을 뿐이다. 숲은 이제 콘크리트 바다에 둘러 쌓인 작디작은 섬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자연이 살아 있는 곳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언젠가 자연이 모두 사라지고 인간 홀로 남으면 인간다워지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사람에게는 '애정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어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동물에게 과도한 애정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 사람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개든, 고양이든 동물과 친밀해지는 게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고, 그것이 꼭 나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가 조작과 허위 이력의 피의자가 처음 보는 경찰견을 꼭 끌어안고 찍은 사진이 온 국민이 꼭 알아야 하는 소식은 아닐 터, 요즘 기자들은 뉴스거리가 어지간히도 없는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게다가 그런 범죄를 저지른 자가 입은 후드티나 슬리퍼를 두고 검소하다는 둥 매진이 되었다는 둥 하는 가십 거리를 뉴스 지면에 실어준다는 것도 참으로 창피한 일이 아닌가. 대한민국의 기자는 참으로 한가한 사람들이다.


며칠 전에는 제74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이 있었다. 그 자리에 보수 정권의 대표가 참석하는 건 어찌 보면 획기적인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묵념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당당하게 이동하는 태도는 뭐란 말인가. 지각 입장도 미안한 일인데 하물며 묵념도 하지 않고... 그런 오만방자한 태도가 보수의 품격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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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둘리지 않는 말투, 거리감 두는 말씨 - 나를 휘두르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책
Joe 지음, 이선영 옮김 / 리텍콘텐츠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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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고, 받는 것 없이 예쁜 사람이 있다. 나와는 친분도 없고 특별히 해가 되는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 사람만 보면 기분이 나쁜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싫어할 만한 안 좋은 소문을 들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아침 출근길에서라도 우연히 마주친다면 평생 재수 옴 붙을 것만 같고, 승강기 내에서 말이라도 걸어온다면 절로 소름이 돋을 것만 같은 것이다. 뭐라 콕 집어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 사람의 외모도, 스타일도, 심지어 목소리나 말하는 톤조차 느끼하고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싫어하는 대상은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매일 마주쳐야 하는 직장 상사나 동료 직원일 수도 있다. 이처럼 싫어하는 대상과 업무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라면 일의 성과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도 역시 증가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와 반대되는 유형의 사람들만 쏙쏙 골라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테지만 말이다.

 

"당신의 매력은 보여주지 않은 부분을 얼마나 늘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은 종종 빛보다 그림자 부분에 마음이 끌리기 마련입니다. 보여주지 않은 부분이 늘어나면 주위 사람들은 거기에 뭔가 매력을 느낍니다. 그중에는 그 보여주지 않은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당신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특정 누군가와 거리가 좁혀졌을 때 쌓아 올리는 관계는 지금까지 휘둘리기 쉬웠던 갑을 관계와는 다를 것입니다."  (p.226)

 

직장 내 괴롭힘 대책 상담사로서 개인 상담과 각지에서 강연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는 Joe의 저서 <휘둘리지 않는 말투 X 거리감 두는 말씨>는 인간관계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마음 컨트롤을 위해' 실천할 수 있는 43가지의 기술을 소개하고 있다. '마음과 행동을 분리하고,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기술은 당신의 인간관계를 편안하고 풍부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자신하면서 말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남에게 휘둘리기 쉬운 인간 유형은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인간관계에서는 언제나 상대방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항상 왠지 모르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며, 사람을 만나고 오면 마음이 개운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을 너무 활짝 열어 놓고 있다는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사실 직장 내 분위기도 예전에 비해 많이 변했고, 꾸준히 변하고 있다고 말해지기는 하지만 연공서열이 확실한 대한민국의 직장 분위기는 서양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른 면이 있어서 직장 내 분위기를 개선하려는 노력만으로는 한계를 보이게 된다. 말하자면 금세 바닥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달라진 게 없다'는 한결같은 불만이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노골적인 갑질이나 강압적인 권위를 내세울 수는 없지만 무언중에 흐르는 눈치보기 문화마저 완전히 없앤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원래 타인의 마음을 간파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속은 단지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서 추측하고 있을 뿐이므로, 당신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마음과 분리하여 말과 행동을 선택하면 상대는 당신의 마음을 알 수 없게 됩니다.

•마음을 꿰뚫지 못하면 그 사람은 당연히 당신을 휘두를 수 없고, 오히려 지금까지보다 당신을 존중하게 됩니다."  (p.19)

 

1장 '좋은 인간관계는 적당한 거리감이 유지되어야 한다', 2장 '누구도 파고들 수 없는 베이스를 만들어라', 3장 '미움받지 않는 '거절쟁이'가 되어라', 4장 '보이지 않는 무게감으로 상대를 사로잡아라', 5장 '사람을 끄는 매력적인 인간이 되는 법'의 총 5장에 담은 내용은 단순히 인간관계의 비법만을 명시한 것은 아니다. 그와 더불어 어쩌면 끊고 맺음에 있어 명확하지 못했던 당신의 처신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여, 당신과 상대방 모두에게 이로운 관계 설정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묵묵히 참아오던 당신이 갑자기 반기를 들면 상대가 놀라 당신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거나 조종의 강도를 더욱 높이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거절하려고 한다면 무조건 빨리 말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정말로 한계에 달하기 전에 "무리입니다."라고 말하세요."  (p.96)

 

직장, 가족, 모임 등 모든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상대방에 의해 휘둘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독재 권력에 기생하여 알아서 기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들은 간혹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거처럼 굴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이 넘쳐나곤 한다. 자신이 마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성자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남이 알지 못하는 고민이 있을 테지만 달리 해결책은 없어 보인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발적으로 휘둘림을 당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어쩔 수 없이 휘둘림을 당하던 자의 고민을 다룰 뿐 기꺼운 마음으로 무릎을 꿇는 자의 고민을 말하지는 않는다. 당선인이 직접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기꺼운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손을 비비는 기자와 검찰, 그들에게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은 욕구가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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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기억이 나른한 일상을 떠받치는 오후. 오늘처럼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하는 궂은 날씨의 휴일이면 온갖 상념들이 사정없이 몰아친다. 생각의 물꼬가 터져 부유하는 상념을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다 보면 괜한 허기가 몰려오기도 하고, 축 늘어진 피로가 혈관을 타고 흐르기도 한다. 이런 날 오후에는 달콤한 오수(午睡)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동네 뒷산에는 여전히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궂은 날씨에도 개화를 위한 분주한 노력이 꿈결인 양 아른거린다. 아파트 화단에 핀 산수유는 빗물을 머금은 채 다소곳하고 아슴아슴 잠에 빠져드는 듯 시야에서 멀어지는 풍경들.

 

"산수유는 다만 아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 중에서)

 

김훈의 글은 언제 어느 곳에서 읽어도 그 맛이 느껴진다. 때로는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을 주문(呪文)처럼 믿고 따르는 정신 나간 사람도 있긴 하지만 사계절 온전한 정신을 갖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둥글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글을 읽는 사람도 덩달아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럴 때면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공간을 지배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기도 한다. 오죽 못났으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공간에 따라 자신의 의식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지배를 당할까.

 

나라가 미쳐 돌아가려는지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는 사람들이 뉴스의 전면을 뒤덮고 있다. 그것을 변명이나 하려는 듯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둥 해괴한 소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말이다. 봄비가 내린 산에는 하루가 다르게 초록이 짙어지겠지만 2022년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갈색이 짙어지는 느낌이다. 초봄에 낙엽이 지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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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 - 한국 사회는 이 비극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김승섭 지음 / 난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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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당시의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이명박 씨는 신년사에서 '우리는 지난해 위기 속에서 미래로 뻗어 갈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냈습니다. 어둠 속에서 새로운 밝음을 찾아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예언이 적중하기라도 한 듯 그해 3월 26일 밤 9시 22분 백령도 남서쪽 1.8km 떨어진 해상의 어둠 속에서 천안함의 폭발로 인한 새로운 밝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로 뻗어 갈 새로운 기회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것은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고 하는 게 더 옳을 듯하다. 천안함 생존자들에게는 패잔병이라는 낙인과 함께 PTSD 환자라는 불명예를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진영논리를 더욱 격화시키는 하나의 단가 되었을 뿐이다.


"2010년 3월 26일 저녁 폭침의 순간에, 함미에 있던 장병들은 사망하고 함수에 있던 장병들은 살아남았습니다. 폭침이 발생한 9시 22분, 한 배에서 같은 경계 근무를 하던 이들은 그 시간에 어디 있었느냐에 따라 삶과 죽음이 갈렸습니다. 사망한 46명의 장병은 화랑무공훈장을 받으며 숭고한 희생을 한 존재가 되었지만, 살아남은 58명의 장병은 패잔병이라는 부당한 낙인과 싸워야 했고 폭침 이후 얻은 PTSD로 병원에서 꾸준히 치료를 받으면서 국가유공자가 되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p.149~p.150)


이 책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의 저자인 김승섭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하버드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보건학자로서 데이터 분석을 통해 사회적 약자의 건강을 연구한다고 한다. 저자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트라우마 생존자의 이야기를 광범위하게 다룸으로써 혹시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들이 지금과 같은 사회적 냉대도 받지 않고 진영논리의 도구로 이용되지도 않는, 있는 그대로의 참상 혹은 있는 그대로의 희생으로 우리 사회가 인식하고 희생자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 책이 구상된 듯하다.


"트라우마의 생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생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고 답해주고 그 고통을 비하하는 사람들에 맞서 함께 싸워주는 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생존자의 몸속에서 고통의 에너지로 머물던 사건은 언어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p.259)


언제나 그렇듯 사회적 참사는 그것을 이용하려는 자와 진실을 파헤치고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아픔을 대신 아파하려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사회적 참사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이제나저제나 목을 빼고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참사가 발발하면 희생자들이나 유가족의 아픔은 전혀 돌보지 않은 채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무자비하게 달려든다. 그런 모습은 한국 사회에서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서 폭식 투쟁을 하며 그들을 조롱하던 인간성 상실의 철부지들과 천안함 생존자들과 희생자 유가족들의 아픔은 도외시한 채 사고 경위에만 몰두하던 사람들. "너는 어느 편이냐"는 물음이 마치 누군가의 정체성을 인증하는 통과 의례로 자리 잡은 듯한 21세기의 대한민국. 그 냉정함의 끝을 잡고 우리는 삶의 온기를 향한 먼 시선을 던지고 있다.


"용맹한 영웅신화에 갇혀 침묵을 강요당하고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 말할 수 없었던 이들은 한국의 참전 군인만이 아니었습니다. 베트남 작가 바오 닌은 소설 『전쟁의 슬픔』을 통해 전쟁이 남긴 상처와 살아남은 사람들의 슬픔과 상실감을 이야기합니다."  (p.212)


사실 이 책에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피해자가 등장한다. 피우진 전 보훈처장과 고인이 된 변희수 하사,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하는 피해 근로자들, 공상 신청을 하지 못하는 소방공무원 등은 피해자인 동시에 그들이 속한 조직에서 배척된 사람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렇게 조직의 존립을 우선시하고, 자본의 논리를 철저히 따르고 배운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자신의 재해에 안도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는 유예된 참사 피해자인 동시에 조직으로부터 언제든 배척될 수 있는 소외 가능자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삶의 기적은 항상 좋은 쪽으로만 발생하지 않기에. 먼 시선으로 딱하게 바라보던 내 이웃이 언젠가 나로 대체될 수 있음을 우리는 가슴에 깊이 담아야 한다. '이해관계에 따른 대립이 정치적 선동으로 인한 공허한 충돌이 아니라,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생한 현실에 뿌리박은 갈등이기를 바란다'는 저자. 그런 진통을 겪지 않고 생겨나는 대안은 현실에서 힘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하는 저자. 저자의 주장은 진보나 보수로 흐르는 게 아니라 피해자의 아픔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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