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 칼릴지브란
칼릴 지브란 지음, 강은교 옮김 / 이레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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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학의 정수는 역시 시가 아닐까 ?
소설이나 수필, 희곡이나 평론 등 여타의 다른 쟝르의 문학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전해지는 중저음의 느낌을 글로 옮기려 할 때,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듯한 막막함.  그렇게 며칠이고 불면의 밤이 지나서 잿더미 속에 묻힌 몇 알의 낱알을 보석처럼 건져내는 것.  하세월이 지난 후 한알 두알 모아진 그 곡식을 눈앞에 펼쳐 보이는 것.

  이 말들이 비록 모호하다 해도 결코 명백하게 말하려고 애쓰지 말라.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이야말로 만물의 끝이 아니라 시초.
  그러므로 바라건대 그대들 언제나 시초로서 나를 기억하기를.
  생명, 살아 있는 모든 존재란 결정(結晶)으로부터가 아니라 안개 속에서 잉태되어지는 것.

칼릴 지브란이 그의 산문시 <예언자>를 쓸 때 그런 기분이었을까?
정든 고장 오펄리즈 시를 떠나는 알무스타파.
선택받은 이이며, 가장 사랑받은 이, 또한 시대의 여명이었던 예언자 알무스타파.
작가 자신이 직접 전하기에는 너무나 길고 깊었던 이야기들.
한계를 느꼈음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 안에 전할 자신이 없었음이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생명이 탄생하고 파괴되는 십이지(十二지)의 약속된 기한.
우주가 순환하는 그 열두 해의 기나긴 기다림 속에서 얻은 소중한 깨달음을 남겨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많은 이야기들.  돌아갈 그의 배는 안개에 휩싸여 오고 있었다.
사랑, 결혼, 아이들, 나눔, 먹음과 마심,일, 기쁨과 슬픔, 집, 옷, 매매, 죄와 벌, 법, 자유, 이성과 열정, 고통, 자기 인식, 가르침, 우정, 말하기, 시간, 선과 악, 기도, 쾌락, 미, 종교, 죽음 등 남겨진 사람들의 질문은 끝이 없는데, 이제는 가야할 때.

  어제란 오늘의 추억이며, 내일이란 오늘의 꿈임도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대들 속에서 노래하고 명상하는 것은 우주에 별이 흩뿌려지던 최초의 순간, 그 속에 아직도 살고 있는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대들 가운데 누가 그 사랑의 무한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가?
  그리고 누가 아직 바로 그 사랑을, 무한함에도 존재의 핵심에 둘러싸여져 이 사랑의 생각에서 저 사랑의 생각으로 움직이지도 않으며, 한 사랑의 행위로부터 다른 사랑의 행위로 움직이지도 않는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가?
  사랑이 그렇듯 시간도 무한하며, 결코 나누어지지 않고, 자취도 없는 것이란 말인가?

이 책은 화가로, 철학자로, 시인으로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칼릴 지브란의 산문시이며 오펄리즈시에 남겨진 사람들이 떠나는 알무스타파에게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의식주의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종교와 죽음의 근원적 질문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깊은 성찰을 통한 깨달음을 감성적 언어로 전하고 있다.
레바논에서 태어나 서구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살았던 그는 이 작품을 통하여 '현대의 성서'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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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폭설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 했다.
이렇게 가끔 자연은 우리들 앞에 예기치 않은 상황을 펼쳐보임으로써 자연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이런 갑작스러움은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나 보다.
점심 시간에 나누었던 대화의 전반을 차지했던 것은 갑자기 내린 눈으로 인한 혼란과 자신들이 겪었던 불편함과 의미없는 불평이었다.
내가 "아름답지 않아?  3월에 이런 장관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지."라고 말했을 때 같이 대화를 나누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졸지에 나는 원치 않았던 이상한 놈이 되고 만 것이다.
"아직도 그런 낭만을 간직하고 있으니 좋겠군."하며 어깨를 치는 사람의 표정에서는 신기한 표정이 역력했다.
심지어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사람의 표정에서도 그와 똑같은 표정을 읽었을 때 나는 새삼 놀랐다.

우리 사회에서(물론 다른 나라도 그렇지만) 이런 1차원적인 집단적 사고가 관습처럼 굳어 있음을 흔히 보게 된다.
안락과 행복이 최상의 선이며 그외의 것은 악으로 치부하는 고정관념 또는 집단적 사고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갈등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이러한 순응적 사고는 지금 겪고 있는 '소통의 부재'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어쩌면 사람들은 생각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의심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고정관념에 묶여있는 사람들은 타인의 생각을 들으려 하지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화란 있을 수 없다.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이나 비열한 속임수만이 존재할 뿐이다.
M.스캇 펙 박사가 그의 저서에서 썼던 말이 떠올랐다.
부모나 고용주 또는 정부처럼 통제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우리가 독자적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를 위협적인 것으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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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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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신(또는 조물주)으로부터 "네가 한번 살아보고 맘에 안 들면 미련없이 버려라"는 말과 함께 던져진 것이라면, 일회용 종이컵처럼 한 번 쓰고 비참하게 버려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게 될까?
운 좋게 자신이 바라던 바를 성취한 사람은 ’그래 죽을 때까지 살자.’라고 할테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살을 선택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실체인 신이나 운명에 저주를 퍼붓고, 그 무형의 실체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한번쯤은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20세기에 들어와 광범위하게 퍼진 이러한 현상('실존적 공허')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가치있는 것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방법에 대하여 작가는 자신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3부로 나뉘어 있는데 제1부는 라슈 교수가 영어로 옮긴 저자 프랭클 박사의 끔찍한 체험 수기이다.  온갖 잔악성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죽음의 강제 수용소에 얽힌 실상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제2부는 1부에서 기교적으로 다룬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이 사례와 함께 간결하게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제3부는 <무의식적인 신 : The Unconscious God>이라는 제목으로 로고테라피의 실존분석을 다루고 있다.
정신의학자인 프랭클 박사는 스스로 창안한 현대의 '실존적 분석'과 '로고테라피'의 목적을 조각난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의미와 책임의 유형으로 짜 만드는 것이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한계를 알 수 없는 잠정적 실존이라고 규정한  것처럼 강제 수용소에서의 실존은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도 없었을뿐 아니라 지나간 과거에 몰두함으로써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일반 죄수들의 모습과 결국에는 강제 수용소의 '잠정적 실존'이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게 됨으로써 살고자 하는 의지마저 상실하게 되는 혹독한 과정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목격하고 같이 겪으면서도 정신의학자로서 자신이 겪는 실존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그리하여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운명을 초월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증명하였다.
개개인은 삶에 질문을 던질 것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저자는 미래에 대한 믿음과 살겠다는 의지가 살아가야 할 이유이며 어떤 목적이라고 말한다.  삶의 의미는 결국 삶의 문제에 대해 올바른 대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책임을 지는 것이며 삶의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고테라피는 개개인의 삶에서'의미(logos)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실존을 인식하고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삶은 우리의 행동과 처신에서 그 대답을 제시할 것이다.
책에서 저자가 자주 인용하고 있는 "살아갈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도 참고 견디어 나갈 수 있다."는 니이체의 말은 참으로 유용하다.

나의 심리학적 소양이 부족하여 2부와 3부의 내용은 반복하여 읽었음에도 확연하게 깨닫기 어려웠다.  그의 방대한 이론을 간략하게 요약한 탓도 있겠지만 비전공자에게는 분명 그 한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이미 두번째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라!"외치는 저자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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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일마다 실패하였다는 한 사람을 만났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남들처럼 잘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던 그는 필요하다면 전국 안 가본 곳이 없고, 안 만난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여전히 자신의 태도에서 확실히 변했다고 자신있게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한동안 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나는 본인에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한마디로 제 의지가 부족한 탓이겠죠."라고 말하며 체념한듯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잘못된 점을 인식하고 자신의 사고를 행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나를 포함한 대다수 일반인에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거창하게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의  '인지 부조화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나의 사고와 행동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 즉 나의 사고와 행동을 일치시키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단순히 자신의 빈약한 의지력을  탓해야 할까?
오래 전부터 내가 생각했던 인지 부조화 현상은 일종의 '문명병'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고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비하는 것이 자신의 사고를 지배하게 되었다.  과거의 원시사회에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미래'라는 단어가 현대인에게는 문신처럼 각인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나의 결심이나 행동 변화에 있어 미래형의 언급은 치명적인 약점을 갖게 마련이다.  '나는 달라지겠다' 또는 '나는 달라질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켜질 것이라 믿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말 속에는 미래의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재와 미래에는 아무리 그 간극이 미세하다고 하더라도 시간상의 간격이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그 시간의 벌어짐에서 우리는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약간의 유예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것이 자신의 '의지 부족 '이라 인식하게 되고 한없이 자책하게 되는 빌미로도 작용한다.
종국에 나는 하나의 결심마저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바보'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은 어쩌면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지속될지 모른다.
관건은 나의 결심과 실천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상의 간극을 없애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매순간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한 시간 전의 '나' 또는 방금 전의 '나'와 현재의 '나'는 느끼지 못했어도 분명 달라져 있다.
이러한 사실을 확연하게 깨닫는 것, 현재의 나는 달라져 있음을 인식하는 자체가 변화의 출발이다.  우리는 매순간 변화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렇게 인식하는 순간 나의 결심과 행동 사이의 간극이나 부조화는 소멸되고 만다.
인식의 틀을 미래가 아닌 현재에 맞추는 행위는 의지가 아니라 각성의 문제이다.

나의 생각을 그에게 말했을 때, 그의 얼굴에 피어나는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찰나의 짧은 순간에도 그는 변해 있었다.
매순간 변화하는 사람들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우습지 않은가.
변화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연현상이다.  우리가 의지를 갖고 행동할 때만 선별적으로 발생하는 특별한 사건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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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도 천재는 아니었다
김상운 지음 / 명진출판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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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불과 일년  전만 하더라도 '애들은 열심히 놀고 건강하면 되지 공부하라고 들볶을 필요까지야....' 했던 내가 막상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조금씩 생각이 바뀌는 걸 보면 나도 영락없는 한국의 학부형이다.
동네의 작은 서점에 들러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 눈에 들어온 것이 겨우 '아버지도 천재는 아니었다' 라니....
예전의 내 모습을 기억하는 지인들은 그럴 것이다.
"너도 별 수 없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애보다 부모가 더 몸이 달을테니 두고 봐라." 
서점을 나서는 내 뒷꼭지가 불편하다 느꼈던 것은 괜한 자격지심이었을 게다.
책의 내용은 우리가 흔히 보았던 성인용 자기계발서에서 더 나아간 것이 없다.
방송기자로 일하는 저자가 "왜 나를 천재로 낳아주지 않았냐?"는 딸의 푸념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저자 자신이 딸과 대화를 하듯 다정한  문체로 자신이 겪었던 에피소드를 섞어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생각의 힘과 몰입의 중요성, 목표의식과  마음관리의 방법 등 우리가 흔히 접하는 자기계발서의 내용과 특별한 차이를 느끼기 어렵지만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읽을 수는 있겠다.
공부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내가 느끼는 공부의 핵심은 동기의식과 지속성이었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그 분명한 이유를 납득해야 하고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공부가 재밌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랑같지만 나는 학창시절에도 공부가 재밌었고 지금도 여전히 공부는 재밌는 오락처럼 느끼고 있다.
아마도 내가 중학교  1학년 시절이지 싶다.
당시 내가 다녔던 남자 중학교에는 유난히 여선생님의 수가 적었다.   지금이야 오히려 남자 선생님의 수가 적다고 아우성이지만 그때는 예체능 과목을 빼면 여선생님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교생 실습을 나오시는 선생님들 중에 여선생님이 있으면 모든 학생들의 관심이 그분께 집중될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날 사회 과목을 담당하는 교생 선생님이 실습을 나왔다.
늘 뒤에서 담당 선생님의 수업을 참관만 하시더니 하루는 교생 선생님이 직접 수업을 하신단다.  사춘기 사내아이들이 다 그렇겠지만 싱글벙글 하는 아이들 표정에서 들뜬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교생 선생님의 자기 소개와 짧은 수업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시간.
나는 기회가 왔다고 내심 쾌재를 불렀다. 

더구나 선생님은 어떤 질문이라도 상관없다고 말씀 하지 않으셨던가. 
"선생님, 코샤크족이 뭐예요?"
일순 교실이 조용해지고 선생님의 얼굴이 빨갛게 변하더니 말조차 더듬으셨다.
조금 경력이 있는 분들이라면 대충 얼버무리고 마셨을테지만 처음 강단에 서신 그 선생님은 그럴만한 융통성이 없었다.   선생님은 종이 울리기도 전에 출석부 챙기는 것도 잊은 채 교실을 뛰쳐나가셨다.  그 이후 수업이 몇번 더 있었지만 질문은 받지 않으셨고 책을 읽으실 때는 나를 요주의 학생으로 생각하셨던지 강단을 내려와 내 주위를 맴돌았다.
가끔 퇴근시간에 나와 몇몇 친구들을 불러 학교 앞 빵집에서 빵을 사주시기도 하며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다 그때의 질문 덕분이었다.
물론 나는 질문을 하기 전에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고골리의 < 대장  불리바>나  미하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여러 번 읽었던 나는 코샤크족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설명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나는 '공부는 정말 재밌는 것이구나' 라고 진심으로 느꼈다.
비록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공부에 한번쯤 미쳐본 사람만이 그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아직도 공부가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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