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테레사의 하느님께 아름다운 일
맬컴 머거리지 지음, 이정아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나는 가끔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유치원생의 글을 읽을 때 어떤 성인도 흉내낼 수 없는 논리가 숨어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문맥이나 글자의 배열만 놓고 보자면 너무나 허술하고 오류 투성이로 보이지만 마음의 눈으로 읽으면 가장 완벽한 논리로 쓰여진 글임을 부인하기 어려워진다.  이것은 글 뿐만 아니라 그림에서도 그렇다.  원근법이나 명암 등 그림의 기초가 되는 구성이나 비례 또는 채색 어느 것 하나 지키지 않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기괴하다거나 우스꽝스럽다 느낄만한 그런 작품이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작품이라고 느껴질 때,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지기 마련이다.
일상에서도 그런 경우를 종종 목격하게 된다.  불치병의 환자가 완쾌되었다거나  지진의 현장이나 탄광의 갱도에 갇혀있다 기적적으로 구출된 사람들.  과학적 잣대나 의학적 설명이 불가능한 그 현실을우리는 ’기적’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인간의 의지나 노력만으로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우리 앞에 펼쳐질 때, 과연 그 힘은 어디서 오는가? 하는 물음은 우리 인간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 책은 영국인 저널리스트 맬컴 머거리지에 의해 쓰여진 신앙 고백서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마더 테레사가 이렇게까지 국제적으로 크게 주목받게 된 계기는 1968년 작가와의 만남 덕분이며, 그 특별한 만남을 통하여 노년기의 작가가 로마카톨릭에 귀의하게 된 것은 우연이라 말하기 어렵다.  성공한 방송인이자 논객으로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던, 어찌 보면 낯설고 기괴하기까지 한 작가가 알바니아 출신의 작고 가녀린 한 수녀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인생관과 종교관이 바뀌게 된, 어쩌면 그의 전 인생이 바뀐 데에는 마더 테레사의 인간에 대한 숭고한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구걸을 마치고 돌아온 나병환자들을 보기라도 하면 벌이가 어땠는지 그들에게 직접 물어볼 태세였다.  마침 그녀와 내가 함께 있던 그 날은 벌이가 신통치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벌이가 변변치 못한 나병환자들에게는 위로의 말까지 전했다.  열성을 다하다 못해 그들에게 그토록 절실한 문제를 논의하면서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실로 아름다울 따름이었다.(P.28)
로레타 수녀원을 나와 동전 몇 푼만 지닌 채 캘커타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구역을 자신의 거처로 삼았던 마더 테레사의 용기와 깊은 신앙심에 어느 누군들 감동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가난보다도 세상에서 버림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공허함임을 마더 테레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책에서 작가는 마더 테레사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받았던 그의 솔직한 느낌과 마더 테레사의 신앙과 인터뷰 내용 및 마더 테레사가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에 대하여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마더 테레사의 생전의 모습과 캘커타의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이 사진으로 실려 있어 그 감동을 더한다.  깊게 패인 주름과 깡마른 얼굴로 따뜻한 미소만큼은 결코 잃지 않았던 마더 테레사의 모습은 이기심으로 병들어 가는 현대인들에게 커다란 경종을 울리고 있다.
진심을 다해 서로  사랑하라고.

이 책을 종교에 대한 색안경을 끼고 읽는다면 마더 테레사를 미화했다거나 종교적 색채가 진하다고 비판할 여지는 있으나 그것까지는 논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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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목을 부드럽게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 고개를 숙여 키 작은 풀과 작은 생명체를 관찰하는 것은 목이 유연하지 못하면 하기 어렵다.
하시라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도록 목의 유연성을 유지하려면 먼저 마음이 부드러워져야 한다.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나이든, 지위든)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는 것, 나보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맞추고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것은 모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마음이 목으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목이 뻣뻣하다거나, 이유없이 아프면 내가 얼마나 경직된 삶을 살고 있는지 내 마음을 찬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목이 부드러워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삶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시의 은유와 같아서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는 곳에 꽁꽁 숨어있다는 것을 드넓은 하늘을 보며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때로는 하늘과 땅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에게서 얻지 못하는 따뜻한 위로를 얻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가슴으로 전해지는 진심어린 위로는 아무런 대가 없이 거저 얻는 것이지만, 그런 위로와 격려를 통해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내가 가야 할 길을 제대로 찾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길을 잃고 헤매며 원망과 시름의 나날을 보냈던 때는 모두 내 시야가 좁아졌을 때였다.  내가 보는 것은 오직 내 눈높이의 사물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뿐이었다.
해나 달을 보기보다는 가로등을 보고, 키 작은 풀과 작은 생명체를 보기보다는 수없이 많은 자동차와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예술 작품을 제외하면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은 삶의 위안도, 현명한 대답도 제공하지 못한다.  시선을 돌려 자주 보지 못했던 것을 바라보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위안과 용기가 되는 것이다. 
태풍 뎬무가 지나간 하늘.  그 구름 사이로 여전히 빛나는 별이 내가 가야 할 길을 비추어 주리라 나는 믿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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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인간에게 본능일까?  아니면 의무일까?
이 질문에 쉽게 답하기는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본능이라고 말할 수도, 의무라고 말할 수도, 어쩌면 이도 저도 아닌 본능이자 의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열에 일곱, 여덟은 의무라고 답할 것이라 생각한다.
막 말을 배우기 시작했거나 유치원에 입학하지 않은 어린 아이들에게 공부는 본능으로 보인다.  모든 게 신기하고, 궁금한 대상일 뿐이니 하루 종일 질문하고 배운다 한들 지겹다거나 재미없다고 느낄 겨를이 있을까?  어쩌면 하루가 너무 짧다고 한탄할지 모르겠다.
그랬던 공부가 제도권의 교육으로 옮겨오면 왜 갑자기 재미없고 따분한 것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일까?
어린 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황순원의 소나기는 아주 적절한 본보기라고 볼 수 있다.
맑고 순수한 소년과 소녀의 가슴 짠한 사랑 이야기는 그 나이의 학생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전해져야 당연한데, 교과서에 실린 작품에서는 그런 감동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다.
아이들은 ’먹장구름’이 복선이라는 둥, ’ 조약돌’이 소년과 소녀를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소재라는 둥 소설의 감동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만 기억하고 있었다.
간혹 나는 우스개소리로 조카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너희들이 가장 좋아하는 만화를 교과서에 싣는다 하더라도 일단 교과서에 실리면 그 순간 재미 없어질거야.  그건 장담할 수 있다."라고.
그것이 어찌 국어 한 과목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이겠는가.  아이들이 배우는 세계사와 국사에는 아주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알기나 하는 것일까?  우리가 볼 수 없는 원자와 전자의 이면에는 얼마나 많은 신비가 숨어 있는지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바로 시험과 성적에 대한 중압감 때문이다.  아무리 재미있는 내용도 일단 시험과 결부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고 따분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내 아들녀석의 예를 들어 보자.  자랑질 하려고 옮겨 적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아내는 초등 1학년인 아들에게 "Tonight on the Titanic"이라는 책을 CD와 함께 사주었다.  영어학원이라고는 다녀 본 경험이 없는 아들녀석이 CD를 들으며 책을 보고 있길래 살며시 들여다 본 적이 있었다.  책의 두께가 그리 얇지 않아 보였는데 아들은 열심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나는 원어민이 읽는 것에 맞추어 책장을 넘기고 있는지 아니면 제멋대로 넘기는지 몰래 살펴 보았는데 아들녀석은 정확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웬만한 중학생도 하기 힘들어 보이는 것을 아들녀석은 너무도 손쉽게 해내고 있었다.  궁금해서 책의 내용을 아는지, 알아듣기는 하는 것인지 물어보았다.  아들녀석은 대충 안다며 재밌다고 했다.
그렇다고 내 아들이 천재라거나 다른 사람 몰래 특별 과외를 시킨 것은 아니다.
아내와 나는 아들녀석이 하기 싫어하는 것은 시키지 않는 편이다.  학교 공부 외에 하는 것이라고는 학교의 방과후 학습인 창의력 수학(1주일에 1시간)과 논술 학원(1주일 1회)에 나가는 것이 전부이니 극성 부모는 분명 아닐 것이다.  학원이나 공교육의 맹점은 바로 시험과 성적이라는 부담감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부모가 부추기는 측면이 강하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아이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력 향상은 되고 있는지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이 아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부모를 위한 것인지 곰곰히 되짚어 볼 일이다.  지금 당장의 성과에 집착하는 부모의 조급함은 교육당국도 예외는 아니다.
지나친 성과주의와 성적지상주의로 아이들의 미래는 병들고, 공부에 대한 재미를 그들로부터 빼앗은 것은 분명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스스로 터득하고 하나하나 익혀가는 재미, 그것이 공부가 아니겠는가.  學而時習之, 不易悅乎?(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공부는 분명 본능이며 그렇게 유지하는 한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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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그동안 읽었던 책을 선별하여 다시 읽고 있다. 
나의 선택을 기다리며 다소곳이 꽂혀있는 책들을 바라볼 때면 뭐랄까?  무소불휘의 권력을 지닌 어느 임금이 자신의 맘에 드는 후궁을 간택하는 기분이랄까?  그럴 때마다 나는 괜스레 달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구입한 책을 처음 펼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일면식이 있는 지인을 만나는 듯한 편안한 기분.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새로운 느낌.  책의 중간중간에 꽂힌 익숙한 필체의 메모지와 가지런히 그어진 밑줄들.  잘 갈무리된 추억들이 내 품에 달려와 안긴다.
어쩌면 영영 잊혀진 채 세월따라 켜켜이 먼지만 쌓일뻔한 책들이 내 손길이 닿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는 듯하다.  처음에 미쳐 몰랐던 새로운 의미를 새록새록 느끼는 재미도 쏠쏠하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고 했던가.
공자가 주역을 즐겨 읽어 책의 가죽 끈이 3번이나 끊어졌다는데, 나는 그동안 가죽 끈은 커녕 세 번을 반복하여 읽은 책도 손에 꼽을 정도이니 부끄러운 일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몇 년 더 나이를 먹어, 쉰 살까지 주역을 습득하게 된다면 가히 큰 허물은 없으리라. (子曰, 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고 했다하니 그 학구열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나는 그동안 헛된 것에 눈이 멀어 그 의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새책만 사려고 했지 감동을 주었던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책을 읽을 때는 눈으로 보고(眼到), 입으로 읽고(口到), 마음으로 깨우쳐야한다(心到)는데 나의 독서는 기껏 눈으로만 읽고 말았으니 헛되고 부질없는 짓으로 소일했음이다.

오늘은 말복.
귀뚜라미 우는 가을도 멀지 않았으니 올해가 다 가기 전에 공자가 주역을 두고 아꼈듯 내게도 곁에 두고 아낄 책 한 권을 고를 수 있다면 좋겠다.
경쟁하듯 책의 권수로만 허세를 부렸던 내 독서 습관을 반성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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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숲에서 길을 잃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매년 이맘때쯤 신록이 우거진 숲에 들어서면 대낮에도 어두컴컴하게 마련이고, 오르는 산이 초행길이라면 사방을 구분한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  한참을 길을 잃고 헤매었는데 자신이 서있던 그 위치를 맴돌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두려움.  그 서늘한 기운을 아마도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강원도의 산골에서 길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놀거리가 많지 않았던 그 시절에 산은 아이들의 놀이터요, 자연 학습장이며,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 있는 비밀 아지트였다.  또한 마땅한 찬거리가 없었던 시골에서 산은 계절의 풍미를 더해주는 보물창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봄이면 갖가지 산나물을, 가을에는 각종 버섯과 더덕이며 도라지로 또 한 계절을 살아갈 힘을 얻었으니 말이다.
어느 해 가을.  나는 친구 한 명을 대동하고 버섯을 딸 목적으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제법 높은 산으로 향했다.  그곳은 비 온 다음날이면 글쿠버섯이며 싸리버섯이 떨어진 솔잎을 뚫고 소복히 올라오는 곳이었다.  갈색 솔잎과 버섯의 색깔이 비슷하여 시선을 땅에 두고 집중하여 살피지 않으면 여간해선 찾기 어려웠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버섯을 따고 해가 지기 전에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버섯을 찾아 없는 길을 헤치며 돌아다녔더니 속도 헛헛하고 금세 해도 질 듯하여 친구를 여러번 반복해서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더럭 겁이 났다.  울창한 참나무 숲에선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사 나는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을 헤매던 나는 나를 찾는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간신히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버섯 따는 재미에 나는 시간이 가는 줄도, 길을 잃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산자락이나 산의 정상에서 바라보면 그렇게 쉽게 찾을 듯한 길도 산의 중턱에 이르면 길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어린 나이에 알게 되었다.

국가경제는 좋아지고 있다는데 체감하는 서민경제는 어렵기만 하다.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뉴스를 자주 듣는다.  이럴 때마다 내게 드는 생각은 다들 중산층이라고 말하는데 중산층의 정확한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다.
개인마다 생각하는 기준이 다르고 그 차이도 천차만별이다.  
 경제협력개개발기구(OECD)는 전체 근로자를 소득 순으로 줄을 세웠을 때 정중앙에 있는 사람의 소득인 중위(中位)소득을 기준으로 50% 미만을 빈곤층, 50~150%는 중산층, 150% 이상을 상류층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기준을 사람들은 납득이나 할까?
나는 다분히 문학적인 기준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산의 정상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류층, 산의 중턱에 있는 사람은 중산층, 산자락에 있는 사람은 빈곤층이라고 분류한다면 조금 쉽지 않을까?
산의 정상이나 산자락에 있는 사람들은 길을 묻지 않는다.  아니 물어 볼 필요도 없다.  훤히 잘도 보이니 굳이 묻지 않아도 길을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중턱에 있는 사람들은 길을 끝없이 물어야 한다.  
우리네 인생도 그와 같지 않을까?  인생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분명 중산층이다.   그 기준은 명확하다.  책을 통해서든, 정상에 오른 사람에게든, 내가 가야할 길을 묻고 있다면 나는 지금 중산층인 것이다.  산자락으로 내려가게 될지, 정상으로 오르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올처럼 무덥고 습한 날씨가 지속된다면 통통한 버섯이 많이도 올라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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