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학자의 노트 - 식물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
신혜우 지음 / 김영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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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이라는 건 지각할 수 있는 인간이 단지 자신의 뇌기능만으로 지금 살고 있는 이곳으로부터 저곳으로 훌쩍 뛰어넘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육체의 이동이 없다고 해서 아무런 제약이나 장애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특정 분야에 대한 개인의 관심이나 지적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와 같은 장애나 제약을 없애고 우리로 하여금 전혀 다른 세계, 예컨대 식물의 세계나 동물의 세계, 바닷속 세계나 먼 우주에 이르기까지 관심은 있었지만 닿을 수 없었던 세계로 우리를 이끌었던 것은 전문가의 연구나 풍부한 설명, 말하자면 그들의 친절한 안내 덕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일반인의 호기심이나 지적 관심을 미지의 영역까지 확장하는 데는 전문가의 숨은 노력과 열정이 한몫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식물학자 신혜우의 에세이 <식물학자의 노트>에는 식물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저자의 모습뿐만 아니라 식물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의 모습도 담겨 있습니다. 영국왕립원예협회 국제전시회 사상 처음으로 영국왕립원예협회 보태니컬 아트 국제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이 2013, 2014, 2018년 모두 금메달을 수상하였다는 저자의 그림은 놀라울 정도로 세밀한 것은 물론 그림 속에 그 식물에 대한 모든 것을 담아 놓았습니다. 식물의 생김새며, 꽃의 모양이며, 심지어 씨의 형태까지... 어쩌면 그것은 식물의 한살이를 그림 속에 모두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식물 그림은 그리는 식물 종에 대해 깊이 조사하고 전 생애를 관찰하여 최소 1년에 걸쳐 제작됩니다. 그릴 때는 문헌 조사와 오랜 관찰, 많은 표본을 살펴보는 길고 고된 과정이 있습니다. 관찰해야 하는 중요 부분을 놓치기라도 하면 다음 해를 기다려야 하기 일쑤이지요. 그런 고된 과정만큼 모든 내용이 집약된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면 더없이 뿌듯합니다."  (p.8 '프롤로그' 중에서)


책을 읽다 보면 식물의 한살이도 우리의 삶 못지않게 치열하고 힘겹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하려 했던 바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종을 유지하기 위해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고, 자신의 DNA를 퍼뜨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며, 번식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모나 힘겨움도 감수할 수 있는... 식물에 대해 깊이 알면 알수록 인간의 폭력성과 나약함에 대해 깊이 반성하게도 되고, 그들의 한살이에 깊이 감동하게도 됩니다. 그리고 식물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 저자의 노력에 깊은 감사의 마음이 듭니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우리는 떨어지는 낙엽을 마주합니다.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고, 올 한 해도 다 지나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식물에게 필요한 양분을 만들고 숨쉬게 하던 잎은 결국 떨어지지만,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새로운 잎을 키우는 또 다른 소임의 시작이죠. 도심에서는 떨어진 낙엽을 금세 치워버리지만, 자연에서 낙엽은 오래도록 나무뿌리 근처에 쌓여 서서히 썩어갑니다. 매서운 바람과 차가운 눈을 맞으며 낙엽은 거름이 되고, 나무를 다시 살게 하는 양분이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이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p.64~p.65)


총 5개의 챕터에 30여 종의 식물을 그림과 함께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말 못 하는 식물을 대신하는 저자가 그들의 세계로 안내하는 작은 안내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크기가 너무 작아 스스로 발아조차 할 수 없는 까닭에 곰팡이의 도움을 받아 싹을 틔우는 난초의 씨앗, 원래 살던 곳에서 떠나와 한국에 정착한 귀화식물들, 인간보다 한참 전에 출현하여 오랫동안 지구에서 잘 생존하여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고사리, 하나의 개체에서 세 가지 색의 꽃을 피워내는 산수국, 수정을 위해 벌의 페르몬과 같은 향을 내는 벌난초 등 저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식물의 세계를 멋들어지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의 세계는 자연선택의 결과이며, 늘 경쟁과 약육강식만 존재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의 세계에서 아름답게 여겨지는 이타심이 동물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식물의 세계에도 분명 존재합니다. 이는 어쩌면 진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일지도 모르죠. 이런 식물의 세계를 보며, 우리가 다른 이를 돕는 것은 자연의 진정한 섭리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p.235)


농경사회를 벗어난 현대인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빈번한 이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식물의 세계에서 강하다는 말은 힘이 세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처한 환경에 얼마나 잘 적응하는가를 뜻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좋든 싫든 여러 번의 이사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나 역시 새로운 환경에서의 적응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고향의 뒷동산에 올라 나물도 뜯고, 꼴도 베고, 땔감을 준비하기도 했던 나로서는 내 고향의 식생과 그곳의 냄새와 지형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지만 새롭게 정착한 곳은 모든 게 달랐습니다. 그렇게 이사의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적응 기간은 짧아질 수 있었지만 몸도 마음도 깊게 뿌리를 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최근에 '반려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까닭도 그런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잦은 이사로 주변의 환경이 늘 낯설기만 한 현대인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할 수 있는 반려식물로부터 받는 위로와 안정감은 무엇보다 각별할 테니까 말입니다. 2022년의 1월입니다. 우리는 또 낯선 한 해를 살아내야만 하고, 익숙했던 고향의 시간들을 그리워하겠지요. 좁은 베란다에서 수년째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애플민트의 푸른 생명력으로부터 나는 따뜻한 격려의 말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잘 될 거야. 잘 할 수 있어!" 하고 등을 토닥이는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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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불현듯 찾아올 때가 있다. 그것은 뭉근하게 가슴을 짓누르다가 때로는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기도 하고, 잊고 지내던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도 하고, 주변 사람들을 애잔한 눈으로 바라보게도 한다. 나는 다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고 오가는 마음길을 터주었을 뿐인데 이다지도 많은 슬픔이 밀려드는 걸 보면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슬픔이 산재하고 있었던 것인가! 미처 알지 못했거나 마음의 여유가 없어 가 닿지 못했던 슬픔을 생각할 때 나는 이따금 동시대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곤 한다.


3명의 소방대원이 화재 진압 과정에서 순직했다. 28년 차 베테랑 소방관도, 결혼을 석 달 앞둔 예비 신랑도, 8개월 차 막내 소방관도 화마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웃의 죽음에 너무도 둔감해진 까닭에 그 깊은 슬픔을 공감하지 못한다. 박수를 치고 환호하던 정치인이 표정을 바꿔 형식적인 조문을 하기도 하고, 어느 재벌 총수는 뜬금없이 중국 시진핑 주석의 사진과 함께 '멸공' 해시태그를 달아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감정도 없고, 뇌도 없는 것인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은 '사람다움'이 아닐까.


며칠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더니 여지없이 미세먼지가 찾아왔다. 탁한 하늘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마치 좀비처럼 살고 있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은 어찌할 것인가.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까. 하늘을 뒤덮은 미세먼지와 우리 이웃의 마음을 뒤덮은 슬픔이 주말의 거리를 온통 잿빛으로 물들게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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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계획이라는 게 뭐 '작심삼일'을 염두에 둔 하나의 이벤트와 같은 것이지만 이것도 사실 매년 반복하다 보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남들 다 하는데 나만 손도 까딱 않은 채 멀뚱멀뚱 시간만 보내는 것도 쑥스럽고 꽤나 머쓱한 일이어서 억지로 동참하게 됩니다. 예컨대 아침 운동을 계획한다거나 금연 혹은 금주, 다이어트 등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올라오게 됩니다. 물론 처음부터 어길 수는 없고 적어도 삼일은 지켜야 예의인지라 작심이일은 넘기곤 하죠. 예의상 말입니다.


천성적으로 게으름이 몸에 밴 저로서는 그마저도 귀찮다 여겨질 때가 많고, 굳이 기록으로 남겨 '빼박' 증거가 되는, 그런 미련한 짓은 안 하는 게 상책이라는 지극히 이성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까닭에 신년 계획을 세우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대부분의 집단지성(?) 추종자에서 벗어난 반지성주의자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거나 부끄럽다는 어떤 감정적 견해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현실로서 존재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연초에 읽을 책을 고르는 데는 비교적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몇 날 며칠을 끙끙대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것은 아니지만 책의 제목이나 내용, 저자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살피기는 합니다. 연초에 읽기에 적당한 책인지 아닌지 나름대로 판단을 하면서...


반전은 늘 있게 마련입니다. 신중하게 골랐다고 하는 책을 반도 읽지 못한 채 슬몃 책꽂이에 꽂아 넣는다거나 책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채 일 년 내내 냄비 받침대의 역할만 묵묵히 수행하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게 그런 예외에 속하는 경우이겠지요. 아무튼 내가 연초에 고르는 책은 기분을 업시키거나 뭔가 열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책보다는 삶에 대해 관조적이거나 죽음을 생각하는, 말하자면 어둡고 칙칙한 주제의 책을 고르곤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도 나는 반지성주의자가 분명해 보입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했던 김영민 교수의 책 제목처럼 '연초에는 죽음을 공부하는 것이 좋다'는 게 저의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지금 이유진 정신과 전문의가 쓴 <죽음을 읽는 시간>을 읽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어 땅에 묻힌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은 다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쓰고 버린, 부패하지 않는 시간들이 서서히 차올라 발목을 덮고, 무릎을 덮고, 시나브로 정수리를 덮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쓰고 버린 시간에 묻혀 최후를 맞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자신이 쓰고 버린 시간에 묻혀 죽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


"삶은 고통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태어나는 과정도, 살아가는 과정도, 죽어가는 과정도 모두 고통이다. 그러니 매 순간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피곤한 인생도 없다. 삶이란 애초에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 고통을 완화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정신분석 치료 또한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 덜 불행하기 위해서 받는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했다."  (p.331 '에필로그' 중에서)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덕담을 나누고 싶다. 새해에는 덜 고통스럽기를, 그런 시간을 써버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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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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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고르는 기준은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그것은 대개 진리에 대한 탐구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접근, 혹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파악조차 불가능한 미지의 영역(예컨대 우주나 영혼 그리고 신과 같은)에 대한 상상이나 추측이 주가 되는 작품으로 요약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책을 읽는 재미나 지식의 습득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기준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러한 기준에서 보면 한강의 소설이 독자들에게 좋은 책으로 선정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우리의 영혼이 슬픔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한강의 소설을 통해 어렴풋이 깨닫곤 하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의 기원, 태곳적 영혼의 원형질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가도록 한다는 점에서 한강의 작품은 선택에 있어서 언제나 앞선 순위에 놓이게 된다. 우리들 각자의 몸 어딘가에 제 어미의 자궁 속 물의 무늬가 새겨지는 것처럼 우리네 영혼 어딘가엔 눈물의 흔적이 물결처럼 어려있다는 걸 생각하면 육체와 영혼이 결코 둘로 이분화될 수 없다는 걸 나는 한강의 소설을 통해 배우곤 한다.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 영혼의 기원에 대해 천착하는 듯 보이는 작가는 소재의 선택에 있어서도 비극과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한강의 소설은 개인의 삶에서 건져 올린 슬픈 사건이나 역사적 비극이 주요 테마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언제나 우리 육체의 기원인 물(水)이 등장한다. 그것이 비(雨)이거나, 눈(雪이거나), 바다(海)이거나, 강(江)이거나 그 본질은 언제나 물(水)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인간 영혼의 기원이 슬픔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우리가 흘리는 눈물 역시 육체의 기원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강 소설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단출한 구성에서 오는 인간의 절대 고독과 나약함이다. 관계의 단절에 놓인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하며 그 속에서 인간의 영혼은 어떻게 발현되는가 하는 문제는 작가가 닿고 싶은 궁극적 종착지였는지도 모른다.

 

소설은 주인공인 경하의 꿈으로부터 시작된다. 눈 내리는 벌판에 심겨진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가 마치 묘비처럼 서 있고, 묘지가 여기 있었나, 생각하는 순간 순식간에 물이 차오르고, 무덤들이 모두 바다에 쓸려가기 전에 뼈들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며 허둥대다가 어쩌지 못하는 채로 꿈에서 깬다. 경하는 그것이 자신이 지난 책에서 다룬 학살에 대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꿈과 연관된 작업을 영상을 만들 계획을 세워 함께 작업을 하려 했던 친구 인선을 떠올린다. 경하와 함께 사진과 다큐멘터리 영화 작업을 했던 인선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제주로 내려가 목공 일을 하고 있다. 경하는 인선에게 자신의 꿈과 연관된 작업을 영상으로 만들 계획을 알렸으나 몇 해 동안 힘든 시기를 겪으며 겨우 몸을 추스르는 사이 계획은 진척되지 못했고, 경하는 마음을 접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하는 병원에 있는 인선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는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 밟아간다 해도 더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 (p.33)

 

통나무 작업을 하던 중 사고로 두 손가락이 절단되어 급히 통합수술을 받게 되었던 인선은 영문도 모른 채 달려온 경하에게 다짜고짜 한 가지 부탁을 떠넘긴다. 그날 안에 제주 집으로 가서 혼자 남은 자신의 새를 구해달라는 것. 경하는 인선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해 서둘러 제주로 향하지만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폭설과 강풍에 휩싸여 길을 잃고 헤맨다. 게다가 지병처럼 앓고 있는 두통이 찾아오는 바람에 경하는 죽음 직전의 위기에 빠진다.

 

시시각각 더 무거운 어둠에 잠기는 눈길에서 나는 그 바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적의 뒷면에 먹 자국처럼 배어 있는, 언제든 형상을 이루며 선명해질 수 있는 그림자 같은 그걸 걸음마다 느꼈다. 박명 속에 함박눈은 쉼없이 떨어져내렸고, 마침내 갈랫길이 나왔을 때에는 정말 어두워져 있었다. (p.130)

 

천신만고 끝에 인선의 집에 도착하였지만 경하는 새를 구하지는 못한다. 경하는 그곳에서 칠십 년 전 제주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과 인선의 슬픈 가족사를 듣게 된다. 가족 전체를 잃고 슬픔을 안은 채 십오 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아버지와, 부모와 동생을 한날한시에 잃고 오빠마저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채로 언니와 둘만 남아 남은 생을 살아내야 했던 어머니. 학살 이후 오빠의 행적을 찾는 일에 수십 년의 세월을 바쳤던 인선의 어머니 정심의 간절했던 마음이 무게도 없이 느리게 하강하는 눈송이처럼 독자들 마음에도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눈의 벽에 촛불이 감싸이자 사위가 더 어두워졌다. 내 눈앞에 어지고 있는 눈송이들이 거의 잿빛으로 보였다. 빛나는 것은 인선이 누운 곳으로 내리는 눈송이들뿐이었다. 코트 안에 껴입은 더플코트의 후드를 꺼내 쓰고 나도 눈 속에 누웠다. 두터운 눈의  격벽에서 스며 나온 빛이 음음하게 내 얼굴을 밝혔다. (p.319)

 

작가는 우리 삶에 스며드는 슬픔의 시간들, 과거에 존재했지만 드러나지 않은 슬픈 역사의 흔적들을 마치 눈송이처럼 독자들의 가슴에 녹아들게 한다. 인간 육체의 기원이 물이었던 것처럼 인간 영혼의 기원 역시 눈물, 그 슬픔의 역사였음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겨울밤, 길을 잃고 캄캄한 눈 속에 갇혔을지라도 우리 영혼의 발걸음이 슬픔의 강을 따라 다음 세대에 면면히 이어지는 한 우리는 결코 영원히 작별하지 않는 것이라고 작가는 외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흘린 눈물이 저 눈송이처럼 나의 눈에 가볍게 내려앉아 마음속 뜨거운 사랑을 일깨우는 한 우리는 결코 나약하거나 외롭지 않다는 걸 작가는 가만가만 말하려 했을 터, 내가 작가의 슬픔을 기억하는 한, 그리고 먼 미래에 나의 자리를 누군가 대신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작별하지 않는 것이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노래한 어느 시인의 노랫말처럼. 삶과 사랑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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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성향과 일치하는 사람들을 가려 교류를 이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헤어지곤 합니다.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이라고 하던가요. 사람들의 만남에는 헤어짐이 있기 마련이고, 돌아간 사람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는 법이라는 의미의 불교 용어이지요.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전부 기억할 수는 없을 테고 그럴 필요도 딱히 없을 듯합니다. 우리의 삶이 한아름의 기억할 수 없는 기억과 기억하는 한 줌의 기억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사람이 더러 있게 마련이지요. 어떤 필요에 의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 역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왔습니다. 개중에는 남들에게 요만큼의 손해도 입히지 않으려 하고 반대로 자신도 남들로부터 눈곱만큼의 손해도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의 특징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고집이 세고 내면화된 자신들의 신념을 불변의 진리인 양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도 혹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뭐 나쁜가? 하고 말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개인의 행동지침으로 이것보다 더 쿨하고 쌈박한 것들을 달리 찾아보기 어려운 듯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피해도 주지 않고 자신도 피해 입기 싫다는 데 그게 뭐 어떻다고?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자신 한 사람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강요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눈곱만큼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아주 작은 일까지 세세하게 따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지난번에 내가 저녁을 샀으니까 오늘은 네가 저녁을 사라는 식이지요. 본인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21년의 마지막 날, 그것도 아침부터 별 이상한 말을 다 꺼낸다 싶겠지만 그러한 행동지침을 내면화한 사람이 있다면 올해가 가기 전에 한 번쯤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 싶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르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보이지 않는 도움을 받고 있으며 그와 같은 도움이 없다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저 또한 그 사실을 가끔씩 까먹곤 하지만 말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늘 음으로 양으로 타인의 도움을 받으며 자신의 삶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냥 웃고 넘어갈 일을 한나절 피곤하게 따지는, 그런 짓은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이름도 알 수 없는 누군가에 대한 고마움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겠지요.


야당의 어느 대선 후보는 말하더군요. 현 정부가 무식한 삼류 바보들을 데려다가 정치해서 경제, 외교, 안보 전부 망쳐놨다고. 그도 현 정권의 고위직 인사 중 한 명이었으니 자신도 무식한 삼류 바보라는 절절한 고백이었겠지요. 오늘은 단 하루 남은 2021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마무리 잘하시고 타인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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