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우리는 시를 읽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시인들은 뉘라 지목할 것도 없이 안 팔리는 시집보다는 여행서나 수필집을 낸다.

그렇다고 시집이 우리에게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세간에 잘 알려진 류시화, 안도현, 신경림 등 몇몇 시인들만이 근근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그마저도 신통치 않은지 앞다퉈 책의 정가를 낮추고 있다.

그외에 시집이라고 눈에 띄는 목록은  수험생들을 위한, 시험 대비용으로 출판된 명시 모음집이 대부분이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나는 시인도 아니고, 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닌, 순수 독자의 입장에서 시가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다.

시인의 속내를 낱낱이 알지 못하더라도, 시가 전하는 그 울림만으로 설레이던 시대가 있었다.

맘에 쏙 드는 시구를 연애편지에 인용하며, 제가 쓴 것인 양 얼굴을 붉히던 그리움이 있었다. 

술동무를 옆에 두고, 노래 삼아 시를 읊조리던 젊음이 있었다.

우리는 시를 잃고, 사랑을 잃고, 그 속에 숨겨진 설레임, 그리움, 그리고 젊음의 낭만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시를 모르고 어찌 문학을 논하랴.

시를 모른 채 어찌 사랑을 노래할 것이며, 순수의 아름다움을 어찌 볼 수 있으랴.

시를 제쳐 두고 주옥같은 언어의 향연을 어찌 즐길 수 있으랴.

시는 문학의 태동이자, 끊이지 않는 북소리이다.

시는 언어가 아닌 몸짓이며, 아픔을 위로하는 따뜻한 손길이다.

시는 논리를 따라 흐르는 나의 의식이 아닌, 무의식에 흐르는 작은 흔들림이다.

시를 읽지 않는 사회!

그 각박한 현실을 사는 우리는 무엇에서 위로받을 것이며,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그 통로를 무엇에 의지하여 찾을 것인지....

시를 쓰지 못하는 문학가는 한낱 글쟁이에 불과하며, 그 글을 읽는 우리는 영혼을 잃은 로봇에 불과하다. 

사랑은,설레임은, 그리움은,낭만은 언어가 아닌 시에 숨겨진 떨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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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찾아오면 의자를 내주세요 사계절 1318 문고 1
미리암 프레슬러 지음, 유혜자 옮김 / 사계절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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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50년대 초 전후 독일의 한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열네 살의 사춘기 소녀 할링카의 이야기이다.

어린 나이에 엄마에게 학대를 받아 요양원을 거쳐 보육원 생활을 시작하게 된 할링카는 어린아이들만 있던 힐데가르디스 보육원을 떠나 기숙사와 학교가 있는 지금의 보육원으로 오게 되었다.

저마다의 아픔을 갖고 이곳에 오게 된 아이들은 더이상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것이 두려의 각자의 방법으로 자신을 지키며 생활한다.  자신의 비밀 상자를 껴안고 사는 곱사등 도로테아, 조금 일찍 성에 눈뜬 로제마리, 두 사람 이상이 함께 하는 일은 무조건 싫어하는 키 작은 유타, 생각없이 말하는 잉에, 잠들기 전에 늘 우는 레나테, 힐데가르디스 보육원에서 같이 지낸 주잔네, 못난이 인형을 갖고 노는 냉소적이고 지적인 엘리자벳, 그리고 폴란드에서 엄마와 로우 이모와 함께 독일로 건너온 유태인 할링카.

주인공 소녀 할링카는 미군 구내식당에서 일하는 로우 이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기다리며 힘든 기숙사 생활을 견디고 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좋아하는 할링카는 혼자만의 공상 속에서 외로움을 잊는다.  작업실에 딸린 창고에 자신만의 비밀 공간을 마련하고 모두 잠든 밤에는 그 비밀 장소에서 촛불을 켜고 자신의 생각을 비밀 일기에 적어 놓거나 상상을 하곤 한다.

이야기는 '어머니 쉼터' 건립을 위한 기금 모금을 하게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수업을 마치고 이틀간에 걸쳐 모금을 하게 되는데 가장 많은 액수의 모금을 한 학생에게는 상이 주어진다는 우어반 사감의 말에 할링카와 같은 방을 쓰는 엘리자벳이 모금 운동에 나선다.  눈 밑에 숯검정을 칠하여 조금 불쌍해 보이도록 잔꾀를 쓴 할링카는 많은 기부금을 모았을뿐 아니라 그 덕분에 소시지도 얻어먹고, 한 아주머니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초콜릿을 받게 된다.  그날 밤 흐느껴 우는 레나테에게 마음이 쓰인 할링카는 자신의 초콜릿을 침대에 누워 흐느끼는 레나테에게 주고, 자신의 비밀 장소로 그녀를 데려간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할링카가 생활하는 방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레나테에게 동생과 같은 연민을 느낀 것이다.  할링카는 자신의 모금함에서 로우 이모에게 갈수 있는 차비 10마르크를 몰래 꺼내고 봉인 철사를 본드로 붙여 놓는다.  그 돈을 비밀 장소에 숨기고 모금함을 사감에게 제출한다.  할링카는 로우 이모가 몸이 아파 일을 못했던 탓에 몇 주째 로우 이모를 만나러 가지 못하고 마음이 울적하던 어느 휴일, 죄수의 딸이라며 레나테를 놀리는 엘리자벳의 말에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한다.  그동안 할링카는 친구에게 맞아도 꾹 참으며 세상과 맞서왔던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본래 그렇다고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길들여 왔었다.  세상을 향해 닫았던 문이 분노로 인하여 열려진 것이다.  할링카는 자신보다 덩치가 큰 엘리자벳과 싸워 주먹을 날리고, 할퀴고 물어뜯으며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신에게 놀란다.  그렇게 세상과 정면으로 맞서는 용기를 통하여 레나테를 친구로 받아들인다.  모금 운동에서 1등을 한 할링카는 우어반 사감, 레만 부인 그리고 그녀의 아들인 볼피와 함께 슈베칭엔 성으로 소풍을 간다.  1등에 대한 상으로 성을 구경하고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다.  드넓은 성의 규모에 놀라고 무엇보다 할링카는 아름다운 여인의 조각상에 매료된다.  그리고 엘리자벳과 싸운 벌로 조리실 당번을 하게 된 할링카는 자신의 일을 돕는 레나테와 조리실의 슈묵 아주머니에게서 따뜻한 정을 느끼게 된다. 

 

세상과의 고립과 단절, 편견을 버리고 서서히 세상 속으로 향하는 할링카의 이야기는 그녀가 모금함에서 돈을 훔치며 '그리움도 배고픔과 비슷한 것 아닌가요? 내 말이 맞죠.  안 그래요? 그리움은 영혼이 허기진 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독백처럼 흘린 말을 되새기게 한다.

"신은 오랫동안 기다렸다가 이자와 함께 대가를 치르게 한다."고 했던 로우 이모의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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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간에 유행하는 신조어 중에 'XX녀' 또는 'XX남'이라는 말이 있다.

그중에서도 유독 나의 눈에 거슬리는 말은 '품절녀' 또는 '품절남'이다.

'품절'의 사전적 의미는 '물건이 다 팔리고 없음'을 말한다.

즉, 품절이라는 표현은 물건에 해당하는 것이지 사람을 지칭하여 쓰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이 일상의 언어로 공공연히 쓰이는 데에는 언론의 책임도 크다고 하겠다. 

철부지 아이들이 뜻도 모른 채 쓰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사회 순기능적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기자들마저 이런 말을 쓴다는 것은 무식하기 그지 없는 짓이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권을 무시하고 사람을 물건에 빗대어 지칭한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만일 이것이 허용된다면 인간의 탄생을 '신상품 출시' 또는 '제품 출시'라고 해야 옳으며, 인간의 죽음은 '폐기 처분'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혼남이나 이혼녀는 '반품남' 또는 '반품녀'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면 재혼남, 재혼녀는 '중고남','중고녀'로 불러야 할까?

신성한 생명이 탄생한 자리에서 신상품이 출시되었다고 말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아무리 물질만능의 사회로 변화하여 사회 구성원이 부품화 되어가고 있다 한들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권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이런 한심한 작태마저 용인되는 우리 나라의 국민들은 너그러운 것인지 아니면 무식한 것인지......

그 일차적인 책임은 무식한 정부와 지도층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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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제로 가는 길
제이슨 브라이언 산토스 지음, 김율희 옮김 / 청림출판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나는 이 책의 리뷰를 쓰는 지금 유튜브에서 떼제의 노래를 찾아 듣고있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작은 농촌마을인 떼제를 순례하기 위해 매년 10만여명의 젊은이들이 방문하는 곳.  세계 최초의 개신교 수도회이자 초교파 수도 공동체가 위치한 곳.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귀동냥으로 떼제가 어떤 곳이라는 것을 상식의 차원에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비기독교인이었던 내게 떼제는 먼 나라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고, 그들의 생활은 내 일상의 작은 관심거리도 되지 못했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떼제 공동체에 대한 나의 관심과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 증폭되었다.

1979년부터 떼제의 수사들이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는데 그들이 추구하는 화해와 용납은 과연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불행히도 지금 우리 나라의 모습을 보면 개신교는 개신교 나름대로 그 종파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 서로를 헐뜯고, 카톨릭과 개신교의 오래된 반목은 절대자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앙인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눈에도 믿음에 대한 부정적 모습으로 비춰진다.  교회와 성당이 사랑과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영적 안식처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성경이나 다양한 예배 프로그램을 통하여 사람들을 유혹하고 축재와 치부의 도구일 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난들 그들에게 달리 변명하고 설득할 말이 있을까.

이 책은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박사과정에 있던 작가가 떼제 공동체를 방문하여 겪었던 경험, 떼제 공동체의 유래와 구성, 떼제 공동체의 정신 및 가치에 대하여 3부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부록에는 떼제 여행을 위한 어드바이스와 수사들의 종신서약문 그리고 용어설명으로 구성되었다.

스위스에서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와 프랑스 부르고뉴 혈통의 음악을 좋아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아홉 형제의 막내로 태어난 로제는 중학교로 진학하며 자신의 종교와 다른 로마 카톨릭 집안에서 하숙을 하였다.  훗날 로제가 떼제 공동체를 계획했던 까닭이다.  같은 그리스도를 믿으며 서로를 불신하고, 자신들만의 방식을 고집했던 관습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고 그들과 함께 하며, 종파와 인종과 배경을 떠난 화해와 용납, 자유와 평화, 신뢰와 책임을 추구하는 떼제 공동체만의 목표를 향해 로제 수사는 1940년 자신의 외가 근처인 부르고뉴의 작은 마을 떼제에 정착하여 독일 점령지에서 피난온 유태인들을 돌보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떼제 공동체는 하루 세 번의 기도와 노래, 침묵과 노동의 전통을 계승하며 세계 젊은이들에게 복음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떼제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은 체류기간 동안 자신이 할 일을 배정받고, 하루 세 번의 기도에 참석하고, 소그룹 성경모임에 참석한다.

노래와 침묵, 성경봉독으로 이루어지는 떼제의 독특한 예배 방식, 밝은 조명 대신에 개개인의 손에 들려진 촛불, 제단도 없고 벤치형 의자도 없는 교회에서 맨바닥에 앉아 드리는 기도.

떼제 공동체를 이끄는 것은 100여명의 수사와 수녀들과 세계 각국에서 온 젊은이들이다.  젊은이들은 방문자를 안내하고 청소를 하고 식사 준비와 배식 등 떼제 공동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역설적이게도 젊은이들은 노동 속에서 신뢰를, 여러 제약과 규칙 속에서 자유를 느낀다고 말한다.  인종이나 종파, 살아온 배경을 따지지 않고 방문자에게 주어지는 책임은 그들에게 소비지향적인 삶에서의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이 공동체에 꼭 필요한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수사들은 젊은이들을 그저 믿는 것이다.  또한 기도에 참석하고, 지나친 음주가 제한되는 등 제약과 떼제의 규칙 속에서 절은이들은 자신들이 할 일만 하면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자유는 최소한의 제약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떼제 내에 위치한 화해의 교회는 더 많은 젊은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여러 번에 걸쳐 증축되었고, 여름에는 육천여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프로그램도, 현란한 설교도 없는 떼제 공동체를 향해 세계의 젊은이들은 왜 끊임없이 모여드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복음을 실천하는 수사들의 모습과 그들에게 동화된 떼제의 방문자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평화를 경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세계인이 추구하는 화해와 용납, 자유와 평화, 신뢰와 책임에 대해 말뿐이 아닌 가슴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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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미대에 다니는 친구들과 방배동의 빈 차고를 빌려 겨울방학을 같이 보낸 적이 있었다.  어려서 예체능 학원을 다녀 본 경험이 없었던 나는 내가 과연 어느 분야에 재능이 있는지 항상 궁금했었기에, 한사코 싫다는 친구들에게 모든 비용을 내가 부담한다는 것과 당시 사진에 미쳐있던 내가 친구들에게 사진을 가르쳐주는 대신 그들은 나에게 그림의 기초를 가르쳐주면서 자신들의 작품활동을 하면 되지 않겠냐는 논리로 간신히 그들을 설득했다.  난방도 되지않고, 골목길 쪽으로 뚫려있는 출입문은 여러 장의 유리문과 셔터가 전부였으니 밤이면 추위가 뼛속 깊이 스며드는 듯했다.  나를 제외한 3명의 친구는 모두 미대생들이라 묘하게도 그들의 생활방식은 공통점이 많았으나 나는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잠자는 습관은 더욱 그러했다.

하나뿐인 연탄난로 근처에 3개의 이젤을 세우고 각자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 나의 침대에는 온기라고는 눈꼽만큼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밤새 술을 마시며 떠드는 통에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은 초저녁에 잠시 뿐,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조용한 주택가에서 밤새 불을 밝힌 채, 안주도 없이 소주 두 병씩을 마셔야만 잠이 들었던 친구들은 오후 세시는 되어야 일어났다.  잠이 깨면 고양이 세수로 얼굴에 묻은 잠기를 쫓고는 라면으로 간단히 허기를 달랜 후 행선지를 말하지도 않은 채 뿔뿔이 흩어졌다가 아홉 시 무렵이면 약속이나 한 듯 한 손에 소주를 들고 나타났다.  가끔은 숙제를 하듯 내게 데생을 가르치고는 습관처럼 이젤 앞에 앉아 깡소주를 마셔댔다.

새벽녘 그들이 잠들 무렵이면 고요한 밤공기를 울리는 여자의 구두소리가 '또각 또각' 들려왔다.  인적 드문 겨울의 새벽거리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어느 날 친구에게 "너 소리도 그릴 수 있어?"라고 물었더니, 잠시의 고민도 없이, "그럼. 그릴 수 있지."하는 것이었다.  속으로는 반신반의 믿지 못하면서도 내심 궁금했다.  '정말 소리를 그릴 수 있을까?'

그 후 친구들은 소리를 그릴 수 있다는 호언장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그림에는 소질이 없다는 말만 여러 번 들었다.

그렇게 겨울방학을 보내고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림에 대한 안목을 조금이나마 넓혀준 소중했던 시간이었다.  지금도 가끔은 묻고싶다.

"정말 소리를 그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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