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미대에 다니는 친구들과 방배동의 빈 차고를 빌려 겨울방학을 같이 보낸 적이 있었다.  어려서 예체능 학원을 다녀 본 경험이 없었던 나는 내가 과연 어느 분야에 재능이 있는지 항상 궁금했었기에, 한사코 싫다는 친구들에게 모든 비용을 내가 부담한다는 것과 당시 사진에 미쳐있던 내가 친구들에게 사진을 가르쳐주는 대신 그들은 나에게 그림의 기초를 가르쳐주면서 자신들의 작품활동을 하면 되지 않겠냐는 논리로 간신히 그들을 설득했다.  난방도 되지않고, 골목길 쪽으로 뚫려있는 출입문은 여러 장의 유리문과 셔터가 전부였으니 밤이면 추위가 뼛속 깊이 스며드는 듯했다.  나를 제외한 3명의 친구는 모두 미대생들이라 묘하게도 그들의 생활방식은 공통점이 많았으나 나는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잠자는 습관은 더욱 그러했다.

하나뿐인 연탄난로 근처에 3개의 이젤을 세우고 각자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 나의 침대에는 온기라고는 눈꼽만큼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밤새 술을 마시며 떠드는 통에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은 초저녁에 잠시 뿐,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조용한 주택가에서 밤새 불을 밝힌 채, 안주도 없이 소주 두 병씩을 마셔야만 잠이 들었던 친구들은 오후 세시는 되어야 일어났다.  잠이 깨면 고양이 세수로 얼굴에 묻은 잠기를 쫓고는 라면으로 간단히 허기를 달랜 후 행선지를 말하지도 않은 채 뿔뿔이 흩어졌다가 아홉 시 무렵이면 약속이나 한 듯 한 손에 소주를 들고 나타났다.  가끔은 숙제를 하듯 내게 데생을 가르치고는 습관처럼 이젤 앞에 앉아 깡소주를 마셔댔다.

새벽녘 그들이 잠들 무렵이면 고요한 밤공기를 울리는 여자의 구두소리가 '또각 또각' 들려왔다.  인적 드문 겨울의 새벽거리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어느 날 친구에게 "너 소리도 그릴 수 있어?"라고 물었더니, 잠시의 고민도 없이, "그럼. 그릴 수 있지."하는 것이었다.  속으로는 반신반의 믿지 못하면서도 내심 궁금했다.  '정말 소리를 그릴 수 있을까?'

그 후 친구들은 소리를 그릴 수 있다는 호언장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그림에는 소질이 없다는 말만 여러 번 들었다.

그렇게 겨울방학을 보내고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림에 대한 안목을 조금이나마 넓혀준 소중했던 시간이었다.  지금도 가끔은 묻고싶다.

"정말 소리를 그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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