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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200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르 클레지오의 장편소설이다.
영국계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르 클레지오는 열렬한 여행가로도 잘 알려져 있어 세계 여러 나라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었다.
이러한 그의 삶은 이책에서 주인공 라일라를 통하여 잘 드러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라일라는 예닐곱 살 무렵에 인신 매매범에게 유괴되어 아랍 지역의 독거 노인 랄라 아스마라는 여인에게 팔려간다.
자신의 진짜 이름과 자신을 낳아준 엄마 아빠의 이름, 태어난 장소조차 알지 못한 채 밤에 팔려왔다는 이유로 '밤'이라는 뜻의 라일라로 명명된 한 흑인 소녀의 이야기.
라일라는 랄라 아스마의 저택에서 온갖 집안 살림을 하며 늙은 주인을 돌본다.
랄라 아스마의 아들 아벨과 며느리 조라는 가끔씩 찾아와 집안의 동정을 살피곤 하였는데, 어느 날 조라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외출을 하였을 때 아벨은 라일라를 겁탈하려 한다. 랄라 아스마가 병으로 쓰러지자 외출을 극도로 꺼려하던 라일라는 의사를 찾으러 달려나가지만 의사는 찾지 못하고 낡은 여인숙에서 산파로 일하는 자밀라를 만난다. 결국 랄라 아스마가 죽자 그녀를 돌보지 못했다는 불안감에 도망친다.
라일라는 자밀라가 묵고있던 여인숙에서 몸을 파는 여인들과 자밀라의 잔심부름을 하며 세상을 배운다. 랄라 아스마의 집에서 프랑스어와 에스파니아어로 읽고 쓰는 법, 암산과 수학, 종교를 배우며 오직 집 안에서 절제된 삶을 살았던 라일라는 그와는 너무나 다른 낡은 여인숙에서 매춘부들과 어울려 도둑질을 일삼으며 세상의 규율과 절제로부터 멀어진다. 라일라는 결국 조라가 보낸 경찰에 의해 그녀의 집으로 끌려가게 되고 조라의 가혹한 학대 속에서 집안일을 하게 된다. 조라의 집을 드나들던 들라예 부부의 요청으로 그들 부부의 집안일까지 하게 된 라일라는 사진사였던 들라예씨로부터 성폭행을 당한다. 그후 조라가 라일라를 결혼시키려 하자 라일라는 그녀의 집을 빠져나와 여인숙을 찾지만 여인숙은 이미 폐쇄되고 그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라일라는 여인숙에서 천막촌으로 이사한 타가디르와 후리야를 어렵게 찾아간다. 당뇨병으로 다리가 썩어가는 타가디르와 세탁소에서 다림질과 바느질로 생활하는 후리야. 라일라는 도서관에서 공부도 하는 한편 근근히 돈을 모아 후리야와 함께 병든 타가디르를 뒤로 하고 프랑스 파리로 밀입국 한다.
불법 밀입국자의 신분으로 만삭의 후리야를 돌보는 라일라는 지하철 역에서 노래하는 집시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같은 신분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셋방에서의 작은 파티에 위안을 얻는다. 그곳에서 만난 권투선수 노노에게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낀 라일라는 지하 셋방에서 동거하며 잠시의 평화를 얻지만 그것도 잠시, 한 여의사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중 성폭행을 당하고, 다시 거리로 나선 라일라는 거리의 가수 시몬느로부터 노래와 피아노를 배운다. 노노의 친구 하킴으로부터 자유 응시생 자격으로 대학 입학 시험을 권유받은 라일라는 그의 할아버지 엘 하즈를 만나 그로부터 따뜻한 가족의 정을 느낀다. 그러나 엘 하즈가 죽고 그에게서 죽은 손녀의 여권과 신분을 유산으로 받게된다. 믿었던 엘 하즈를 잃은 라일라는 집시들과 어울리던 주아이코와 함께 파리를 떠나 니스로 간다. 니스의 한 구제소에서 생활하며 쓰레기더미 속에서 그곳의 아이들과 버려진 옷과 책을 주으며 지내던 라일라는 호텔에서 재즈 가수로 일하던 새라에게서 시몬느를 떠올린다.
라일라는 프랑스를 떠나 새라가 사는 보스턴으로 향한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새라로부터 독립한 라일라는 우연한 기회에 피아노 연주자로 일하다가 음반 제작업자 르로이씨와 계약하고 음반 취입을 한다.
그 무렵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장 빌랑을 만났지만 그는 이미 애인이 있었고, 그의 애인과 공유해야만 하는 장 빌랑에게 염증을 느낀 라일라는 가수가 꿈인 마약 밀매업자 벨라를 만난다. 장 빌랑의 아이를 임신한 라일라는 벨라와 함께 캘리포니아로 가던 중 유산을 하고 병원에 입원한다. 벨라는 그녀를 두고 떠나고 라일라는 유산과 함께 남아있던 한쪽 귀의 청력마저 상실한다.
그녀의 보호자를 찾던 병원에서 음반업자 르로이씨에게 연락이 닿았고, 르로이씨는 라일라에게 <니스 재즈 페스티벌> 초청장을 건넨다.
다시 돌아온 니스에서 지난 추억을 떠올리던 라일라는 주최측에게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그녀가 태어난 아프리카로 향한다.
라일라는 그곳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느낀다.
빌랄 족의 여인으로 태어난 부족의 시대에서 길고 험난했던 세파를 넘고 넘은 황금 물고기는 원점에서 장 빌랑을 기다리는 사랑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햇빛이 내리 쬐는 백인의 사회에서 까만 피부의 라일라는 혼탁한 강물을 힘겹게 헤엄치는 여린 물고기, 황금빛 비늘로 어부의 눈길을 사로잡는 외로운 황금 물고기였다. 곳곳에서 조여드는 그물과 날카로운 작살을 온몸으로 피하며 찢기고 피흘리는 기나 긴 여정, 작가는 청력을 모두 잃은 그녀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방향을 잃어버릴 듯하면 음들이 저절로 내게서, 내 입술과 손과 아랫배에서 솟아나왔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피아노 안에 들어 있었다. 입술은 벌어졌고, 배와 목과 다리에서 울림이 느껴졌으며, 마치 바깥에서 햇빛을 받으며 걷고 있는 것 같은, 달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나는 음악을 귀가 아니라 내 온몸으로 듣고 있었으며, 전율이 나를 감싸고, 살갗을 자극하고, 신경과 뼈까지 아프도록 파고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들을 수 없는 음들이 내 손가락 속으로 거슬러올라가, 나의 피와 나의 숨결, 그리고 얼굴과 등에서 흘러내리는 땀과 한데 섞였다.(P.281)"
작가는 주인공의 처절한 삶을 잔인하리만치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어떠한 연민이나 희망, 잠시의 행복도 허용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읽는 독자들이 분노와 함께 견디도록 요구한다. 고난과 역경의 긴 터널을 독자들 스스로 걸어가도록 작가는 방관자로서 숨어버린다.
라일라가 그녀가 태어난 원점으로 회귀하였을 때 독자들은 비로소 안도하고,손가락마저 까딱할 수 없는 평화를 맛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