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답장을 기다리며 - 자폐아 아들과 좌충우돌 살아가기
채영숙 지음 / 좋은책(단행본)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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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자폐아 배형진군을 모델로 한 영화 <말아톤>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었다.

자폐증을 앓고 있는 한 청년이 마라톤을 통해 사회와 소통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 조승우와 김미숙이 열연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감동의 박수갈채를 받았던 작품이다.  그러나 그 감동이 자폐아와 그 부모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에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이 땅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장애인을 가족으로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천형에 가깝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비장애인을 아들로 두고 있는 나는 이책을 읽는 내내 '아,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외쳤었던가.

남의 불행에 견주어 나의 행복을 확인하는 알량한 이기심이 '공감'이라는 말로 포장되려는 순간,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좌절을 맛보았다.

 

이 책은 자폐아 호민이를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보내고 겪어야 했던 여러 경험들을 호민이 엄마 채영숙님이 글로 옮긴 것이다.

첫째를 사산하고 둘째로 태어난 호민이는 30개월이 되었을 때 자폐아 판정을 받았다.

세째가 8개월만에 태어났지만 20여 일만에 세상을 떠나 외둥이로 자라게 된 호민이.

 '지금 아이를 데려가세요, 하나님!  저렇게 답답한 가슴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정말로 그래야 한다면, 세상에서 덜 상처받았을 때, 해맑은 웃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지금 데려가 주세요!'(P.13) 이렇게 기도했던 아이는 남들보다 조금 늦은 아홉 살에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입학했고, 초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기까지 호민이와 엄마가 겪어야 했던 많은 일들을 작가는 담담한 필체로 기록하고 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여인이 자폐아를 아들로 두면서 '천사'가 아닌 '전사'가 되어야 했다는 그녀의 고백과 사회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호민이에게 따뜻한 시선과 배려로 힘을 더해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는 코끝을 시큰하게 했다.

 

약자에 대한 배려와 보살핌이 없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국민이 말하지 않아도 정부가 앞장서 약자를 위한 예산을 편성하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국민이 원해도 그 예산을 삭감하는 나라도 있다.

우리 나라는 곧 초고령 사회가 된다.  강자보다는 약자가 많아지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사회적 편견을 버리고 약자를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지 못한다면 내게도 예외란 있을 수 없다.

나는 리뷰를 쓰기 전 작가의 블로그를 방문했었다.

이 책이 다음 칼럼에 실렸던 것을 책으로 엮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와 호민이의 현재 모습이 몹시 궁금했었던 이유가 더 컸다.

'더디 자라지만 아들과 쉬엄쉬엄 순리대로 살아가기'라는 글귀가 나의 시선을 한참이나 머물게 했다.

나는 오늘도 '사회적 편견이 없는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헛된 구호를 외치며 대답없는 메아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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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 - 나의 야고보 길 여행
하페 케르켈링 지음, 박민숙 옮김 / 은행나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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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의 직각삼각형에서 빗변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넓이는 다른 두 변을 각각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넓이의 합과 같다."

이것은 다름 아닌 중학교 수학과정에 나오는 피타고라스의 정리이다.

a2 + b2 = c2 이라는 공식으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이 명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하여 그리스의 수학자 유클리드, 영국의 주식 중매인이자 아마추어 수학가인 페리갈, 인도의 수학자 바스카라, 심지어 미국의 대통령 가필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증명에 성공하였고 지금까지 360여 가지의 증명 방법이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다고 한다.  동일한 문제에 대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과 방법으로 증명하고자 했던 위의 사례는 어쩌면 우리의 삶과 비슷할지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저마다의 시각으로 답을 구하고 그에 이르는 과정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증명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곧 삶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의 저자인 하페 케르켈링은 독일의 유명한 코미디언이자 MC로서 남 부러울 것 없는 삶을 누렸으나 자신의 몸을 혹사시켜 청력약화와 담낭제거 수술을 겪게된 후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지난 날의 삶을 반성하고 사고의 전환을 위한 계기로 삼고자 야고보 순례의 길에 들어섰노라 밝히고 있다.

프랑스 생 장 피드포르에서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800km의 이 험난한 순례길은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야고보 사도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걸었다 한다.

'카우치 포테이토'(움직이기 싫어하는 게으른 사람)였던 작가가 11킬로그램의 배낭을 지고 순례자용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걷는다는 것은 그리 녹록지 않은 여정이었으리라.  인기스타였던 그가 땀과 먼지에 절은 모습으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일정을 묵묵히 소화한다는 것은 순례의 육체적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  작가는 순례 도중 만났던 세계 각지의 수많은 순례자들과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소중한 교훈을  자신의 노트에 기록하며 산티아고에 닿았다.

비록 단 한 차례도 레퓨지오(순례자용 숙소)에서 묵지 않고 때로는 여관에서, 때로는 호텔에서 잠자리를 해결했으며, 체력의 한계를 느낄 때는 기차나 차를 타고 이동했지만 자신이 소유한 부와 명예를 접어두고 오직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고자 했던 그의 선택은 참으로 훌륭했다.

우리는 어쩌면 극한의 결핍이나 고난에 처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자신의 내면을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가?

모든 근원적인 물음의 답을 찾아가는 길은 자신의 내면, 우리 모두의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 아닐까?

2001년 6월 9일부터 7월 20일까지 42일간의 그의 야고보길 여행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증명하는 그 과정과 너무나 흡사하다.

우리가 알고있는 대부분의 진리는 a2 + b2 = c2 에서 보듯이 그리 장엄하지도, 경이롭지도 않다.  우리네 삶도 이와 같아서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에 이르게 되면 커다란 감흥은 금새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왜 사느냐 묻는다면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증명하여 결론에 이르듯이 한발한발 내딛는 우리네 발걸음이 근원적인 물음의 답으로 인도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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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를 타고 달렸어 민음의 시 154
신현림 지음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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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현림에게 시란 무엇일까?

이혼의 상처를 안고, 싱글맘으로 살아가는 그녀가 사랑하는 엄마를 잃었을 때의 상실감, 그 깊은 가라앉음 속에서 차곡차곡 쌓인 그녀의 슬픔은 가둬두기엔 이미 차고 넘쳤던 까닭일까?  쉰을 눈 앞에 둔 그녀가 자신이 살아가야 할, 그녀가 죽어가야 할 내밀한 침대에서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는 것일까?

세상에 질긴 것이 슬픔이다.

혹자는 숨이 멎을 듯한 행복에 지난 슬픔을 그리워 하고, 혹자는 지나친 슬픔으로 습관처럼 그곳에 빠져드는데....침대를 타고 죽음을 향해 달리는 그 여정에 시인은 나의 이야기, 너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를 '글빚 갚으며 딸과 살아남으려' 애쓰고 있다.

  "엄마, 화나고 슬프고 외로우면 나한테 말해.  내가 도와줄게 내가 웃겨줄게 내가 얼마나 웃기는데."

  그렇게 적은 딸의 일기를 보며, "너도 사랑을 누려라"라고 말한 엄마의 유언에서 시인은 '만성적인 절망과 희망의 시소타기'를 한다.

내가 그랬듯 시인은, 스캇펙 박사의<아직도 가야할 길>을 읽으며, 유통기한의 세계가 낯설어 적응 못하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슬퍼하는 자는 깨달음이 있다고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그녀.

인도의 순례기에서, 이스탄불의 어느 거리에서, 캄보디아의 빈민촌에서, 카자흐스탄의 어느 공동묘지에서 그녀는 슬픔도 7분만 씹고 버리자고 말한다.

아직도 다 못한 그녀의 이야기가 있기에 그녀의 침대에는 무성한 사과나무가 피어난다.

 

 

침대를 타고 달렸어

 

누구나 꿈속에서 살다 가는 게 아닐까

누구나 자기 꿈속에서 앓다 가는 거

거미가 거미줄을 치듯

누에가 고치를 잣듯

포기 못할 꿈으로 아름다움을 얻는 거

 

 

슬프고, 아프지 않고

우리가 어찌 살았다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찌 회오리 같은 인생을 알며

어찌 사랑의 비단을 얻고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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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푸념이나 넋두리를 하는 것보다 더 손쉬운 일을 찾기도 어려울 듯싶다.

앞으로의 굳은 맹세나 결심을 듣기는 어렵지만, 푸념이나 넋두리는 익숙하게 들려온다.

내가 우선 그렇고, 아내도 별반 다를 바 없고, 주위의 사람들도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약속이나 한 듯 그렇게 비슷한 행위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푸념이나 넋두리는 습관이요, 일종의 배설행위이다.

우리의 육체가 음식을 먹고 배변행위를 통하여 그 잔여물을 몸 밖으로 내보내듯이, 우리의 마음도 불필요한 찌꺼기를 일정한 시점에서 푸념이나 넋두리를 통하여 밀어낼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이해득실이 존재하고, 우리의 잘못된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다.

먼저 우리가 범하는 일반적 오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음식의 섭취보다는 배변행위가 더 사적이고 은밀한 행위로 인식한다.

실상은 정반대이다.  음식의 섭취는 개인의 취향이나 기호에 따라 매우 다양하고, 경제적 여건과 같은 외부적 환경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배변행위는 모든 생물체가 취하는 공통의 행위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유아기 이후로 배변행위를 자연스러운 인체활동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반면에 마음의 문제에서는 이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맹세나 결심을 음식의 섭취로 본다면 이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러므로 자신만의 결심은 남에게 내보이기 어렵고,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는 에너지원으로서 그 본래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겪는 실패와 좌절은 소화과정을 거친 음식의 찌꺼기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배설행위를 통하여 마음의 밖으로 나가게 된다.  이는 우리 육체의 배변행위와 너무나 닮아있다.  그러나 육체의 배변행위나 마음의 배설행위에는 모두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적당한 에너지의 소비를 통한 배변행위는 육체의 건강을 도모하지만 설사와 같은 지나친 배변행위는 에너지의 고갈로 이어지듯, 마음의 배설행위도 그 정도가 적당할 때는 나와 듣는 상대방에게 실보다는 득이 크다.

즉, 적당한 푸념이나 넋두리는 듣는 상대방에게 나에 대한 친밀도를 높이며,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고, 나 또한 스트레스 해소를 통한 기분의 전환을 맛볼 수 있다.

반면에 지나친 넋두리나 푸념은 나와 상대방의 에너지를 고갈시켜 지치고 피곤하게 한다.  여기서 보듯이 마음의 배설행위는 육체와 달리 상호의존적이다.

즉, 내가 그 정도를 조절하지 못하면 나와 상대방의 에너지가 동시에 고갈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푸념이나 넋두리의 정도를 잘 조절할 필요가 있다.

나와 너의 기분 전환에 알맞은 푸념은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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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모른다

너도 나를 모른다

모르는 나와

모르는 너는

백지처럼 하얀 인연에

그렇게 편지를 쓴다.

 

네가 있는 자리에

또는 내가 있는 자리에

낯선 언어가 배달되던 날

평면의 일상에

숨죽인 메아리로 살아있느냐

 

오늘이 그리운 이에게

어제의 흔적은

습관처럼 메마른 자판을 스치운다.

 

모르던 사람들은

모르는 우리들로 남아있다.

 

 

 

<나의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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