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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평점 :
우리는 현실이라는 중력에 갇혀 평생을 살게 된다. 그러나 현실을 바라보는 마음의 태도나 색깔에 따라 체감하는 중력의 크기는 제각각 다르다. 심지어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도 각자가 느끼는 마음의 중력은 서로 다르고, 다를 수밖에 없다. 성장 배경을 비롯한 마음을 둘러싼 외부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운동에는 언제나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현실을 향해 이끌리는 구심력과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꿈과 낭만 혹은 무관심 등과 같은 원심력이 늘 존재하게 마련이다. 양귀자의 소설 <모순>은 우리가 마음속의 구심력과 원심력 중 어느 한편으로 극단적으로 기울었을 때, 그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는 문제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세상의 숨겨진 진실들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것은 마치 평생 똑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식이요법 환자의 불행과 같은 것일 수 있었다. " (p.227~p.228)
소설은 주인공인 안진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딱히 불행할 것도 없지만 별 볼일 없는 25살의 어른이 된 안진진. 그녀의 가족 구성원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출과 귀가를 반복하며 가산을 탕진하더니 이제는 장기 가출로 생사마저 불분명한 아버지, 제대 후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건달질을 일삼으며 조폭 두목을 꿈꾸고 있는 동생 진모, 어쩔 수 없이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전사가 된 엄마. 자신의 인생에 양감이 없음에 늘 우울해하던 주인공은 어느 날 아침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며 자신의 인생에 온 생애를 다 걸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시작된 다짐의 첫 번째 과제가 바로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두 남자 중 한 명을 결혼 상대자로 선택하는 것이었다.
"나영규와 만나면 현실이 있고, 김장우와 같이 있으면 몽상이 있다.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끝까지 달려가고 싶은 무엇, 부딪쳐 깨지더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 그렇게 죽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강렬한 무엇, 그 무엇으로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힘이 사랑이라면,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의 손을 잡았다." (p.195)
주인공이 그렇게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아마도 9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함께 결혼과 동시에 달라진 엄마와 이모의 극단적인 삶이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만우절인 4월 1일 한날한시에 태어난 엄마와 이모는 거짓말처럼 4월 1일 만우절에 합동결혼식을 치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운명은 그때부터 정 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량처럼 술과 낭만을 찾아 밖으로만 맴돌고 술에 취해 폭력을 행사하던 안진진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이모부는 세상의 중심이 오직 자신의 가족인 성실한 가장이었다. 게다가 성장 과정에서 작고 큰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진진과 동생 진모에 비해 사촌인 주리와 주혁은 말썽 한 번 없이 반듯하게 성장하여 미국 유학길에 올라 있다. 그럼에도 이모는 가슴에 늘 채울 수 없는 휑한 빈자리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주인공인 안진진을 찾았다.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p.173)
안진진이 예비 결혼 상대자로 생각하며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두 남자도 성격과 외모 등 모든 면에서 판이하게 다르다. 즉흥적이고 감성적인 김장우에 비해 모든 걸 계획하고 준비하는 나영규. 자신의 아버지를 닮아 낭만적인 기질이 강했던 안진진은 나영규보다 김장우에게 마음이 끌린다. 그러던 와중에 동생인 진모가 구속된다. 죄목은 살인미수. 그가 사귀던 여자친구의 남자친구를 진모가 자신의 조직원과 함께 살해하려 했다는 혐의였다. 한동안 평안한 날들을 보내던 엄마는 진모의 구명운동에 전력을 다한다. 김장우에게 마음이 기울었던 주인공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나영규와 만나기로 약속하고 이별을 결심했지만 치매와 중풍으로 반송장이 된 채 집에 돌아온 아버지로 인해 이별 통보는 무기한 연기되고 만다.
"행방불명으로 먼 세상을 떠돌던 한 인간이 속세로 귀향하기에 이만한 날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런 말을 알고 있다. 인생은 짧다고,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고. 아버지는 참으로 긴긴 인생을 살았다. 그것이 진정 아버지가 원했던 삶이었을까." (p.268)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은 소설의 결론 부분에 이르러 일어난다. 마냥 행복한 듯 보였던 이모. 이모는 주인공에게 보낸 편지에 '모든 불행을 떠안은 것 같아 늘 불안해 보이던 엄마의 삶이 부러웠다’고 썼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불행을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동동거리며 종종걸음을 쳐야만 했던 엄마. 크게 걱정할 것이 없어 큰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늘 우아하고 멋진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는 듯 보였던 이모. 그러나 삶의 이면에는 타인이 알 수 없는 마음의 중력이 작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이 저켠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가슴만 아픈 게 아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 안진진, 환한 낮이 가고 어둔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맡아본 적 있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나는 끝내 지고 마는 거야......" (p94~p.95)
삶의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현실의 구심력이 우리의 팔목을 비틀 때마다 꿈과 이상을 좇아 저 멀리 달아나고도 싶고, 세상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현실을 향해 빠르게 젖어들기도 한다. 우리는 이처럼 현실이라는 마음속의 중력을 가볍게 벗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현실이 주는 익숙함과 안온함에 나른한 향수를 느끼기도 한다. 그 중간에는 언제나 자신의 선택이 존재할 뿐이다. 뭔가 궁리를 하고 자신의 삶을 더 나은 쪽으로 이끌려는 노력이 없다면 삶이란 다만 관에 누운 채 무덤에 묻히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생각이 없는 조용한 삶을 간절히 원하는 건 과연 어떤 연유인지...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p.127)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라는 주인공의 말이 귓가에 쟁쟁한 오후. 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저절로 손그늘을 만들게 되는 초여름의 휴일 오후를 나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벗어날 것인가 아니면 강하게 빨려 들어갈 것인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주인공의 각성은 께느른하게 번지는 오수(午睡)의 유혹에 삼켜진 지 오래.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꺼풀이 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