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유유상종에 대하여


거듭 말하지만 시간은 결코 우리 편이 아닙니다. 굳이 어려운 열역학 제2법칙을 꺼내들 것도 없이 시간은 우리들로부터 많은 것을 앗아갑니다. 나는 누구이며, 너는 누구인가?라는 개인의 자의식이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나는 내 경험과 기억의 총체(總體)"라고 말했다면 시간에 대한 대가로 자신을 정립하는 중이라고 퉁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지난 과거에 대해 조금의 후회도 갖지 않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기 어려운 것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시간을 허비한 것에 비해 스스로가 얻은 대가는 아주 미약하거나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대다수인 듯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시간은 결코 우호적이거나 친밀한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우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위에 언급한 내용은 내가 존경하는 어느 인간의 철학을 내 일기에 간추려 옮긴 것입니다. 나의 스승인 천공(千空) 멧돼지의 철학이라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밝히는 바이지만 우리 멧돼지는 근본적으로 철학과 같은 이성적인 추론은 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기시감 멧돼지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라든가, 날리면 멧돼지의 말이라면 무조건 알아서 기라는 둥 현실적인 조언만 할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20년 남짓의 짧은 멧돼지 생애에서 천 개의 구멍(空)을 파는 걸 목표로 열정을 쏟아붓는 스승의 모습에 반하여 다른 멧돼지들이 천공 스승이라 부르며 우러러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언제였던가 천공 스승이 나와 '동운' 멧돼지를 불러 놓고 한마디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천공 스승 왈, "인간의 언어 중에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단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귄다는 뜻이라더구나. 너와 동운 멧돼지는 어쩌면 그리 똑같은지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너희 둘이 떠올랐단다. 다른 멧돼지들에게 조금의 양보나 배려도 용납하지 않는 점도 그렇고, 다른 멧돼지들로부터 요만큼의 해라도 입을라치면 이만큼의 크기로 되갚아주는 점도 판박이처럼 닮았지. 게다가 다른 멧돼지의 뒤통수를 치는 것도, 갚아야 할 복수는 마음속에 반드시 기억하는 것도 서로 흡사하지 않니?"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역시 스승은 스승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내가 리더 멧돼지가 된 지도 벌써 1년이 훌쩍 지났습니다만 나에 대한 지지율은 좀체 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하여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하는 '똥광' 멧돼지를 중용하기로 했습니다. 기시감 멧돼지의 핵 오염수 방류 및 국내 경제의 부진 및 막대한 세수 결손 등 앞으로 나에 대한 지지율을 약화시킬 악재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와 나의 측근들을 비난하는 멧돼지들은 모두 잡아들여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리는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화로울 것입니다. 오늘은 6월 10일, 6.10 민주항쟁 기념일이라는데 이것을 기념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나 또한 그 시절의 리더 멧돼지처럼 거리에 나오는 멧돼지들을 잡아 죽일 생각이니까 말입니다. 내가 비상 도시락으로 키우는 강아지들을 대동하고 '동물 광장'에 나갔다고 전 난리를 치는 멧돼지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욕을 먹을 일인지 지금 생각해도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런 멧돼지들은 모두 잡아 바다에 처넣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늘은 비가 온다는데 가까운 멧돼지들과 술이라도 한 잔 해야겠습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