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에 감사해
김혜자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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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이나 경험 탓이겠지만 연예인의 저작을 잘 읽지 않는다. 잘 읽지 않는다기보다 거의 읽지 않는 편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인기를 등에 업은 연예인이 자신의 과거를 왜곡, 윤색하여 홍보용이나 돈벌이용으로 책을 출간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책에 대한 지나친 경외심을 지닌 까닭에 책을 깔보는 듯한 그와 같은 행위가 마음에서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었는지도 모른다.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나는 그동안 일부를 전부인 양 오해하는 일반화의 오류 속에서 나 스스로를 묶어두었음을 깨닫는다. 김혜자의 에세이 <생에 감사해>를 읽어가면서 나는 많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고, 고집스레 지켜왔던 나의 편견과 잘못된 행동에 대해 반성했다.


"어떤 한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뒤에서 희생한 다른 이들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반드시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산도 좋고 물도 좋고 정자까지 좋은 곳은 없습니다. 내가 남편에게도 잘했고, 아이들에게도 너무나 좋은 엄마였고, 그리고 연기도 빼어나게 잘했다? 그런 건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배우로서 살아온 것 말고는 모든 부분에서 부족한 여자였습니다."  (p.221)


평생 동안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매진했던 사람들은 삶에 대한 저마다의 확신과 철학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비단 연예계라고 해서 다를 리 없다. 나는 그것을 간과했었고, 그들의 화려한 삶 뒤에 숨겨진 갖은 구설과 도덕적 결함과 텅 빈 허무를 지레 짐작했었다. 말하자면 나는 모든 연예인의 삶이 껍데기뿐인 공허한 것이라고 내 멋대로 재단했던 것이다.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이처럼 연예인을 뭉뚱그려서 경시하는 데는 전통적인 유교 제도에서 기인한 바가 크겠지만 반상의 계급구조가 사라진 현대에 있어서 그보다는 연예인에 대한 질투와 시기의 감정이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삶은 그냥 살아가는 것밖에 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픈 오스카만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게 아닙니다. 몸이 성한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처음 보는 것처럼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낭비할 때가 많습니다. 며칠을 살더라도 얼마만큼 가득 차게 사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삶은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p.240)


사실 나는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를 그닥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렇다고 예능이나 스포츠에 열광하지도 않는다.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드라마에 정신을 놓고 빠져들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텔레비전과는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는 내가 '김.혜.자'라는 이름 석 자를 똑똑히 기억하는 까닭은 지난 60년간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연기가 단연 돋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배역을 맡으면 '그 사람'이 되어야만 했고, 그렇게 되기 위해 수십, 수백 번 몸부림치며 연기했다는 그녀의 고백처럼 어떤 배역이든 혼신의 힘을 다했던 그녀의 연기에 매료되지 않을 이가 과연 누구이겠는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 까닭 없이 우울하고 절망하는 것은 나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알았습니다. 책을 통해서도 나 같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조금씩은 부조리 연극의 배우들입니다. 단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절망감과 우울증 속에서도 스스로 힘을 내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이고 그것이 인간입니다."  (p.56)


자살을 꿈꾸며 수면제를 사 모으던 한 소녀가 대한민국 국민 전체를 웃고 울리는 국민 배우가 되고 인기 스타의 자리를 유지한 채 수십 년을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은 누구나 매 순간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만의 기적을 창출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그러나 정작 기적을 만드는 본인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을 일구는 일련의 과정임을 깨닫는다면 현실의 생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배우 김혜자는 여러 가상의 삶을 현실로 살아보면서 그 모든 게 기적임을 본인 스스로의 삶 속에서도 깨닫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끝나는 날까지 단정하게 살리라' 책상 위에 있는 달력에 써놓고 생활한다는 그녀는 우리의 이미지 속에서는 언제나 훌륭한 배우이자 연기자로만 각인되어 있지만, 사실은 한 가정의 주부이자 생활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읽지 않았으면 미처 알지 못했을 내밀한 이야기부터 배우로 살아오면서 그녀가 맡았던 여러 배역과 감독들 그리고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 등 배우 김혜자의 삶 전반에 대해 들려주는 이 책은 내가 생각하던 어느 연예인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배우라는 직업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었던 장인(匠人) 김혜자의 삶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뿐이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갖게 해준 그 사람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김혜자의 고백이 가슴 뭉클하게 느껴지는 이 책은 삶에 지치고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작은 희망으로 읽힐지도 모른다. 인생의 황혼녘에 선 대배우 김혜자의 삶이 편안하고 길게 이어질 수 있기를 한 사람의 팬으로서 간절히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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